강의, 초등학생

01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강의실 앞에 나가는 것, 누군가의 앞에 서는 것을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사람 수에 상관없이 누군가의 앞에 서서 곧잘 떠든다. 강의 체질-_-;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 서는 데 두려움이 없다. 하지만 난 여전히 개별 관계는 피하고 싶다. 낯설다.

무대에 서는 사람들과 인터뷰한 기사 중에, “저 낯가림이 심해요”란 식으로 제목을 뽑는 경우가 있다. 이젠 안다. 무대에 서서 연기를 하고, 텔레비전에서 개그를 하고, 큰 무대에서 사회를 하는 것에 능숙하다는 것과 낯가림이 심하다는 건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걸. 사람이 200명이건 10명이건 차이가 없다. 무대 앞에 서서 얘기하는 것과 개별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상당히 다른 문제란 걸. 그렇다고 타인의 감정에 무관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무대 위에 서면 마주하는 이들의 반응에 극도로 민감해진다. 내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따른 반응을 살피고 즉각 말을 수정하거나 내용을 바꾸는 것. 근데 이런 거에 능하다고 개별 관계에서도 능숙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그냥, 알 거 같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낯설다. 그리고 항상 불안하다. 이런 불안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0년의 경력이 생겨도, 30년의 경력이 생겨도. 아닌 척 하면서도 혼자선 불안할 것이다. 내가 제대로 했는지. 그리고 그렇게 해선 안 됐는데, 라는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02
예상은 했지만, 정말 똑똑한 수강생은 대학생이 아니라 초등학생이다. 초등학생들은 안다, 질문하는 사람이 어떤 대답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그에 적합한 대답을 한다. 그래서 당혹스럽다. 그리고 나의 모든 말은 의도와 목적이 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가 없다. 그냥 질문하는 거라고,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질문이라고 하지만 사실 듣고 싶은 방향의 반응은 있기 마련이다. 초등학생들은 이런 방향을 기가 막히게 잘 포착한다.

03
그나저나 요즘 난 뭐하는 짓이람. ㅠ_ㅠ

주절

01
카리스마와 상당한(극심한?) 소심함과 과민할 정도의 자기방어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느꼈다. 나는 소심해서 한 행동이 다른 사람에겐 카리스마라고 여겨질 때, 꽤나 당혹스럽다.

02
식탐은 없지만 허기를 느끼는 순간, 불안해 진다는 걸 어제 깨달았다. 아침에 김밥을 먹고 오후에 돈 벌러 갔다가 저녁을 못 먹었다. 저녁 늦게 팥빙수를 먹긴 했지만. 자려고 누운 밤 12시. 갑자기 심한 허기와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서둘러 무언가 먹을 걸 사러 가게로 향했다. ㅠ_ㅠ 내가 이런 적이 있을까 싶어 실실 웃었다. 그러면서도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처럼 서둘러 가게로 향했다. 크크

먹는데 별 관심은 없지만, 이런 순간을 참지 못 하는 구나, 싶었다. 하긴 심한 허기를 느낄 땐 성격도 좀 까칠해지지. 흐흐

03
어제 구글 크롬(웹브라우저)을 출시한다는 소식에 살짝 들떴다. 그리고 오늘 설치했는데, 와, 놀랍다. 디자인은 무척 단순하다. 그리고 정말 빠르다. 뭐, 이런 저런 얘기들은 아마 많이들 들어서 지겨우실 테고. 하지만 정말 놀라운 기능은 탭기능. 여기서 확인하면 알 수 있다. 탭의 순서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고, 새 창으로 빼낼 수도 있고, 새 창으로 연 걸, 탭으로 넣을 수도 있다. 이렇게 재밌는 기능이라니. 하긴 새로 나온 건 뭐든 신기하고 재밌다. 그것이 지속적으로 사용가능한 제품인지는 일주일 안에 결정 나겠지.

04
초등학생은 1년 차이가 천지차이 같다. 4학년은 너무 떠들고, 5학년은 얌전하면서 열심이고, 6학년은 모든 걸 다 안다는 표정의 다소 거만하면서도 심드렁하다. 단 한 살 차이가 날 뿐인데 이렇게 다르다니, 또 다른 배움이다. 나도 그랬을까?

이정화

며칠 전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TV에선 뉴스데스크가 나왔다. 잠시 쉬고 싶었기에 뉴스를 보는데 한국대중가요 60년을 정리하는 기사가 나왔다. 물론 내용은 뻔했다. “신라의 달밤”에서 시작해서 패티김, 신중현, 이미자, 조용필, 서태지로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이런 기획기사면 들어갈, 새로울 것 하나 없는 그런 기사. 기존의 기사를 새롭게 편집만 해도 가능할 기사. 뭐, 그런 빤한 내용의 기사를 나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봤다. 이런 기사는 빤한 내용이어도 또 본다. 그리고 볼 때마다 재밌다. -_-;; 흐. 무엇보다 조용필 노래가 세 곡이 나와서(전부 다는 아니고 조금씩이지만) 무척 좋았다.

그 기사를 보는 중에, 다소 뜬금없이 신중현의 연주에 매혹되었다. 곡은 “미인”. 예전에 이미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곡이다. 그땐 그저 잘 만든 노래 정도 이상의 감흥은 없었다. 근데 뉴스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이 아주 잠깐 나오는데, 뭐랄까, 놀람이랄까 감동이랄까, 뭐 그런 느낌이었다. 찾아 들으니, 역시나 좋다. 두어 가지 다른 버전을 듣는데, 와!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물론 가사는 좀-_-;; 그냥 무시하고 듣고 있다. 연주와 곡 자체는 정말이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신중현은, 그 동안 워낙 유명해서 그냥 안 들었다. 너무 유명하거나, 사람들이 존경한다는 각종 찬사를 보내면 왠지 안 듣고 싶어지는 그런 꼬인 심보라서.-_-; 흐. 달리 생각하면 만나기에 가장 좋은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뜸을 들이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 다행인지 운이 좋은지 몇 장의 앨범을 구해서 듣는데, 와, 멋진 곡들이 정말 많더라. 난 여태까지 “미인”, “님은 먼 곳에”, “봄비”, “꽃잎” 정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렇게 글을 쓸 정도의 감동은 다른 곳에 있다. 음악을 듣다가 어떤 목소리에 완전 빠졌다. 다름 아닌 이정화의 목소리. 찾아보니, ‘신중현 사단’이란다. 흥미로운 건 이 앨범은 ‘신중현과 덩키스 & 이정화’란 표현이 가능하다. 신중현과 덩키스란 그룹의 앨범이면서 이정화란 가수의 앨범이기도 하다. 이정화가 신중현과 덩키스의 보컬도 아니고, 이 앨범이 이정화 독집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수록곡으론 “봄비”, “꽃잎”. 찾아본 자료엔 상업적으로 실패했다고 한다. “미인”을 발표한 신중현과 엽전들을 제외하면 신중현의 그룹으로 성공한 앨범은 없다고 하니 재밌다. 암튼 찾아본 자료엔 이정화의 목소리가 ‘밋밋’하다고 평했다. 몇 년 후, 다른 가수가 “봄비”를 다시 불러 상당한 히트를 기록했다고.

하지만 난, 이정화의 목소리가 싸이키델릭 음악에 더없이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이 앨범이 목소리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의 그것이 아니라, 목소리와 악기가 잘 어울리는 그룹의 그것이라면 더욱더. 앳된 느낌도 들고 청아한 느낌도 드는 한 편, 묘하게 까끌까끌하고 깔깔한 느낌이다. 날 선 느낌이기도 하고. 아쉬운 건, 이 앨범 외에 별다른 앨범이 없다는 것. 하긴 카리스마나 어떤 특별한 개성이 있어 대중적인 히트를 칠 만한 목소리는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좀 아쉽다.

이 당시 한국에서 싸이키델릭이 유행했다는 것도 놀랍다. 이 앨범이 정말 잘 만든 싸이키델릭 앨범이란 것도 놀랍다. 무려 16분 3초에 이르는 곡도 있다. 조금도 지루하지 않은 구성은 신중현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정화란 목소리를 다른 곳에선 들을 수 없어서 많이 아쉽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은 더 없이 잘 어울리는데. (듣고 싶으면 다방으로. 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