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95-2008 베스트

관련 글: 키드님의 “1995-2008 영화 베스트10”

10개를 고를 수 있을까 하며, 이래저래 골랐는데 10개가 넘더라는. 문제는 본 영화를 다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영화를 극장에서 본 것도 아니고, 다 메모한 것도 아니라, 그땐 좋았지만 기억하지 못 하는 영화도 꽤나 많을 듯.

영화관에 가거나 비디오를 보기 시작한 게 2000년대 이후의 일이라, 대부분이 2000년대 이후의 작품들이다. 그래서 나는 2000년대 이후에 봤는데 제작년도는 1980년대거나 1990년대 초반인 작품도 여럿 있더라는. 흐흐. ;;

순서는 제작 년대 순으로.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1996)
: 국내에서 개봉하기 전부터 너무 유명했던 이와이 슈운지 영화 중 하나. 그 어두운 분위기도 좋았고, 노래도 좋았고. 이 영화를 보고서야 비로소 슈운지의 영화에 빠져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푸줏간 소년(1997)
: 사실 이 영화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 이제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_-;; 그럼에도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너무 좋았다. 지금 이 영화를 다시 읽을 수 있다면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DVD도 없고 불법파일도 없어서 무척이나 안타까워하고 있는 영화.

밀리언 달러 호텔(2000)
: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 영화는 호평보다는 혹평이 넘쳤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개봉 여부가 불투명했을 정도로. 그럼에도 이 영화의 몇몇 장면들은(특히 주인공 둘이 처음 만나는 장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로 좋았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
: 어찌 이 영화를 뺄 수 있으랴. 투명하게 맑은 날의 서늘한 느낌. 붉은 피가 예쁘게 반짝이는 느낌. 이 영화는 OST도 좋아해서 여전히 자주 듣는 편. (음악다방에서도 들을 수 있다.)

판타스틱 소녀백서(2001)
: 이니드란 캐릭터가 어찌 아니 좋을 수 있으랴. 그 불안한 위치가 마치 나를 보는 것만 같아서 한동안 이 영화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봤다. 아울러 시모어가 레코드를 보관하고 있는 모습도 좋았고. 다만, 번역한 제목은 참…, 할 말이 없다.

별의 목소리(2002)
: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단편 애니메이션.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초속 5센티미터]의 감독 작품이기도 하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란 단편도 무척 좋아하고. 요즘도 우울한 날이면 이 단편 애니메이션을 보곤 한다.

미치고 싶을 때(2004)
: 좋아하는 영화가 여러 번 반복해서 보곤 하는 영화라면, 이 영화도 그렇다. 한땐 이 영화를 며칠에 한 번씩 보기도 했다. 초반의 몇몇 장면을 특히나 좋아하고.

불량공주 모모코(2004)
: 너무 사랑스러운 영화. 흐흐. 영화가 너무 좋아서, 드물게 원작 소설도 읽었다. 근데 소설보단 영화가 낫다. 흐흐. ;;

메종 드 히미코(2005)
: 이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오다기리 죠를 얘기하는데, 난 이 영화를 통해 시바사키 코우란 멋진 배우를 만나서 좋았다. 이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이미 여러 번 쓴 거 같아서 생략. 흐흐.

판의 미로(2006)
: 처음엔 모르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해서 떠오르는 영화가 있는데, 내겐 이 영화가 그렇다. 현실과 환상이라는 이분법의 경계를 효과적으로 허물면서 환상적인 요소를 너무도 멋지게 표현한 영화.

아쉽게도 10개란 목록엔 빠졌지만, 심히 고심했던 영화들은

비행기 납치범, 레일라 카흐레드(2005)
트랜스아메리카(2005)
미녀는 괴로워(2006)
스파이더 릴리(2007)
밀양(2007)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 이건 영화가 아니라서 안타까울 따름;;

몸살

지난 금요일부터 몸살이다. 그렇다고 이불 속에 파묻혀 지낼 상황은 아니라 만날 약기운으로 지내고 있다. 사실 이불 속에 파묻혀 있어 봤자 궁상스럽기만 해서 그냥 평소처럼 움직이고 있다. 활동을 하고 있으면 그나마 살만해서 계속해서 돌아다니지만, 약기운으로 버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약은 꼬박꼬박 챙겨먹고 있다.

조금 불편한 것도 있는데, 일단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의 3분의 1 정도만 들린다. 나머지 말은 흘리고 있다. 집중력도 현저하게 떨어져서 종종 멍하니 지내기도 한다. 조금 쉬면 좀 괜찮을까 싶지만, 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쉴 정도로 아픈 것도 아니고. 그냥 좀 불편한 정도.

몰랐는데 노란 콧물이 나오면 코에 염증이 심한 거라고 한다. 이번에 처음 알았다. 어릴 때 읽은 소설에서 감기에 걸려 노란 콧물이 나오는 건 당연한 것처럼 묘사해 그러려니 했다. 물론 노란 코가 나온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감기라고 해야 알러지성 비염으로 인해 맑은 콧물이 나오는 경우일 뿐, 다른 이유로 감기에 걸린 경우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몸살기운이 돌기 시작한 날부터 노란 코가 나왔다고 하니 약사가 당황하는 반응을 보여서, 당황했다. ;;; 흐흐. 아무려나 오랜 만에 감기몸살에 걸리니 반갑기도 하다. 푸훗. -_-;; 이런 농담을 할 수 있는 정도인 걸 봐선 그리 심각한 상황도 아닌 거 같고.

아, 불편한 건 하나 더 있는데, 그렇잖아도 비염이라 발음이 별로 안 좋은데 코가 제대로 막혀 발음이 더 안 좋아진 것. 듣는 내가 괴로울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괴로울까.

이러나저러나 요즘 생활은 재밌다. 활동으로 하는 일이 늘어갈수록 고민할 일도 많고 배우는 것도 많고 자극도 많고. 이것도 얼마 안 남았지만. 🙂

다른 세상의 아이들

제레미 시브룩 지음, 김윤창 옮김 [다른 세상의 아이들] 고양: 산눈, 2007

‘논쟁’은 지연되고 있다. 폐지론자들은 노동에서 벗어난 유년기라는 전망을 빨리 촉진시키려 하고, 점진주의자들은 세계 전역의 별 5개짜리 호텔에서 세미나를 개최하며, 국제금융기관들은 자신들이 최근에 빈곤 완화와 건전한 통치의 방향으로 전환했음을 떠들썩하게 홍보한다. 그러는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더 많은 아이들이 생존을 위해 노동시장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 (259쪽)

그리고 나는 이곳에 짧은 글만 끼적일 뿐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며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이런 부끄러움이 나의 양심을 위한 임시방편이 아님을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

다른 책을 사며 이 책을 함께 샀을 때, 구체적으로 어떤 논조인지 정확하게 확인했는지 의심스럽다. 하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건 저자의 논조 때문이었다.

테레사 블란쳇은 “경제적인 기준만으로는 일과 어린이 노동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달리 말해, 이곳에는 서구의 규범과 다른 방식의 유년기 해석들이 있다는 것이다. 문화적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어린이에 대한 폭력과 착취를 인정해서도 안 되고, 서구적인 가치들을 보편화 하기위해 어린아이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근절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물론 둘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기란 극히 힘들다. (255쪽)

만약 저자가 어린이 노동/일을 근절해야 하는 끔찍한 것이라고만 주장했다거나 어쩔 수 없으니 점진적으로 개선하자고만 주장했어도, 읽지 않았거나 읽다가 중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저자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 이런 식의 주장이었으면 저자는 이 책을 쓰지도 않았겠지만. 저자는 근절을 주장하며 아동 노동/일의 끔찍함을 주장하는 것의 이면을 폭로하는 동시에 점진주의가 가진 허상도 동시에 드러낸다. 물론 이 과정이 유쾌하진 않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위해 설명하기보다는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분명 ‘영리’하지만, 보여주기 방식이 각 챕터의 후반부에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을 위한 근거로 나열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혐의가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19세기 영국에서 빈번했던 어린이 노동/일이 현재 남반구/남아시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어린이 노동/일과의 유사성에 있다. 지금 남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린이 노동/일이 마치 미개발국가, 문명적이지 않은 국가에서나 일어나는 제3세계의 현상으로만 치부하는 서구의 논의는 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빈번했던 어린이 노동을 은폐한다. 그러니 이 책 제목의 한 구절 “다른other”은 “나와는 무관하지만 현재 일어나고 있는”이란 의미가 아니라 “나와 무관한 현상처럼 간주하는, 타자로 만들어 가는”이란 의미다(other의 의미를 꽤나 적확하게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방글라데시(저자는 주로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린이 노동을 중심으로 논하고 있다)의 경제가 발전하면 어린이 노동이 없어질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행여나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린이 노동은 없어지거나 통계상 현저하게 줄어들지 모르지만, 그 노동은 또 다른 국가/지역으로 이동해서 일어날 것이다. 그렇기에 어린이 노동/일을 근절하자는 주장도 점진적으로 개선하자는 주장도 문제가 많다.

최상층을 제외하면, 역사적으로 어린이들의 일은 이상할 것도 없다. 오늘날 유년기를 사회의 일과 동떨어진 별개의 시간으로 여긴다는 점이 오히려 더 비정상적이다. 아이들에게 어떠한 직분을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발상이며, 그토록 많은 젊은이들의 곤경에 대한 서구의 관심도를 감안할 때, 그들의 특권적인 사회적 무용성은 큰 혼란과 불만을 야기하는 중요한 요인일지도 모른다. 과로에 시달리는 방글라데시 어린이들과 소비자주권주의에만 고용되어 있는 서구 어린이들 사이의 어딘가에, 분명 일과 여가의 적절한 균형이 있다. 쉽게 찾을 수는 없지만 어느 곳엔가 분명 묻혀 있다는 보물처럼, 그 균형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128쪽)

어린이 노동/일의 근절이 가지는 허상은, 어린이들의 노동을 통해 이루어진 상품 수입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을 때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일시적으론 어린이들이 공장이나 여타의 노동현장에서 벗어났지만, 이들은 더 어려운 삶을 살아가거나 이전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길 선택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전의 일을 하기 위해 공장주에게 뇌물을 써서라도, 더 적은 임금을 받고서라도 일을 하고자 한다. 아이들이 일을 못 하게 되면서 아이들이 속해 있는 가족은 더 가난해지고 삶은 더 피폐해졌다.

뇌물을 써서 착취적인 노동에 발을 들이는 아이들의 이미지는 눈길을 잡아끄는데, 이는 스스로의 이해관계에 관해서 아이들의 인식과 아이들의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인식이 종종 서로 어긋난다는 점을 시사한다. (83쪽)

남반구에서는 그런 압력들이 오히려 서구의 산업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의 피땀으로 얼룩졌다고 생각되는 제품을 꺼려하는 서구 소비자들의 양심을 보호하려는 것일 뿐이라고 널리 믿는다. 서구의 양심 때문에 실직한 아이들의 운명이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은 서구의 의제가 반드시 어린이들에게 혜택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102쪽)

아울러 어린이 노동을 둘러싼 논쟁은 상당히 서구 중심적인 입장인데

오늘날 어린이 일의 가치를 둘러싸고 나타나는 모호성의 역사적인 뿌리는 서구에 있다. 남반구 국가들을 살펴본 많은 사람들은 도시마다 아이들이 넘쳐난다고 말한다. 어린이 노동에 관한 서구 국가들의 비난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 국가의 인구가 노령화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인구 노령화로 인해 어린이의 인구비율이 낮은 국가들은 아이들을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만들었으며, 수많은 제 3세계 어린이들은 미래의 인구증가와 국가의 힘이라는 관점에서 서구를 불편하게 만든다. (119쪽)

유엔 아동권리조약은 어린이 노동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조항들을 담고 있다. 32조는 경제적 착취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언명하고, 28조는 교육받을 권리를 다룬다. 이 조약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이상화된 서구적 가족규범을 어린이 보호의 기반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이는 인도아대륙을 비롯한 여러 곳의 확대가족과 합동가족들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이미 해체가 진전된 서구적 가족유형을 장려한다. (99쪽)

저자는 계속해서 19세기 영국의 어린이 노동/일의 현상과 20~21세기 남반구 국가의 어린이 노동/일의 현상의 유사성을 비교하지만, 그렇다고 이 둘이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아울러 그 지역의 국가경제가 발전하거나 경제적인 여건이 좀 더 나아지면 될 거라는 믿음의 허상도 분명하게 지적한다.

오늘날 남아시아의 낙타기수 및 어린 성매매 소녀들과 19세기 영국의 어린이 공장노동자들은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성인들의 오락을 위한 레저산업에 고용된다. 그들의 고통은 그 자체가 곧 큰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구경거리다. 과거에 가난한 아이들에게 닥쳤던 고난은 대부분 은밀하고 비밀스럽고 눈에 보이지 않았다. 수치심 때문에 은폐되는 경향이 짙었던 것이다. 이익은 그들의 노동에서 얻어지는 것이었지, 그들의 노동을 공개적으로 보여주는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가 안정된 성장의 경로에 오른다면 그러한 모든 야만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재고되어야 한다. 이미 알려진 형태의 속박뿐만 아니라 새로이 통합된 세계경제에서 나타난 새로운 종류의 학대-낙타기수는 그 기상천외한 학대의 일례에 지나지 않는다-를 받는 아이들의 수를 고려한다면 알이다. 러시아 농노들이 해방되고 미국 노예들이 자유를 얻었을 때보다 오늘날 오히려 세계적으로 더 많은 노예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부의 창출이 온 인류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리라는 믿음은 확실히 비현실적이고 근거 없는 희망사항이다. (192-193쪽)

노동하는 많은 어린이들이 공부하길 바라지만,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다고 해결되는 것이 많은 건 아니다. 한 비정부단체는 아이들에게 무상교육을 실시하지만 이 아이들을 선택하는데 몇 가지 자격을 제시함으로써 교육받을 수 있는 어린이와 교육받을 수 없는 어린이, 아이가 교육을 받아도 생계가 덜 위협적인 계층과 아이가 교육을 받으면 생계가 치명적으로 위협받는 계층을 다시 나누는 문제가 발생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아울러 ‘노동하는 어린이’와 ‘교실에서 공부하는 어린이’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은 너무도 간단한 인식임을 지적하기도 한다.

‘어린이 일’과 ‘어린이 노동’을 구별하는 이 지나치게 교묘한 방식은 많은 반대에 부딪힌다. 마찬가지로 ‘일하는 어린이’와 ‘공부하는 어린이’의 구별 또한 지나치게 단순하다. 테레사 블란쳇은 이렇게 말한다. “정책 입안자나 이론가, 연구자와는 또 다른 실질적인 어린이 관련 지도자들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일은 나쁘고 학업은 좋다는 생각도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노동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학습”이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기계적인 학습”보다 나은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블란쳇은 노동/일 구분에 따를 경우 담배 공장에서 일하는 소년들이 어린이 노동자로 인정되리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들은 한 공장에서 오랜 시간 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는 시간에” 소년들이 받는 급료의 3분의 1을 받으며 집에서 담배종이를 마는 그들의 여자형제들은 단지 일하는 어린이로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당한 노동과 성별 착취는 이 임의적인 범주들 속에서 실종될 것이다. (109쪽)

동시에 교육이 무조건 좋다는 건 상당히 허상이다. 교실에서 정규교육을 이수했지만 별다른 희망을 갖지 못 하는 이들(한국에서 특히나 많이 접할 수 있는데)이 정규교육을 받진 못했지만 삶을 영위할 상당한 지혜가 있는 이들보다 낫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수백 가지의 나무, 꽃 그리고 이들의 뿌리를 이용할 수 있지만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은, 비록 통계상으론 ‘문맹’으로 표시되고 ‘낙후’로 표시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실에서 기계적인 교육만을 받고 ‘발전과 개발’만을 외치는 이들이 이들보다 더 나은 걸까?

저자 스스로는 상당히 경계하고 있지만 서구중심적인 인식은 꽤나 자주 드러난다. 아울러 성별관계에 따라 노동의 의미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블란쳇의 논의를 빌려올 때를 제외하면 이와 관련한 논의가 드물다는 한계도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이 꽤나 좋았다면, 근절도 점진적인 개발도 아닌 그 어느 지점에서 논의를 전개하려는 저자의 노력 때문이다. 당연히 분명한 대안은 없다. 하지만 끊임없이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어린이 노동을 불쌍하게만 여기지 않으려는 저자의 노력만은 중요하다고 느꼈다.

덧붙이면, 저자는 방글라데시를 중심으로 논하고 있지만, 한국이라고 얼마나 다를까 싶었다. 한국에서 10대들은 학교에서 입시공부를 하는 존재로 간단하게 등치되어,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일자리를 찾는 10대들은 “문제아”로 불리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인식이 10대 혹은 그보다 더 어린 이들의 노동시장을 논하기 힘들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을 잠시 했다. 일을 하더라도 아르바이트만 구할 수 있고, 구할 수 있는 일이 상당히 제한적이고, 최저임금마저 지켜지지 않는 경향이 상당히 많고. 관련 논의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건, 당연히 나의 무식에서 비롯한다는 점에서 반성을 하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