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하는 와중에 출판…: 트랜스페미니즘, 트랜스규범성

어쩐지 올해는 뭘 특별하게 하지 않는 상황에서 뭔가 출판되는 느낌이다.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의 역사]가 그러한데, 물론 3월에 집중해서 작업을 하긴 했지만 사실상 몇 년 전 작업물이 이제 나오다보니 뭘 했다는 느낌없이 공동 번역 책이 나왔다.

마찬가지로 논문 하나가 나왔다. 작년 초에 영어로 글을 써서 투고했고 게재하겠다는 연락을 받았고 이후 정말 여러 번 편집자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 한국에서 논문을 투고하면 겪는 절차나 과정과는 많은 점이 달랐다. 한국은 게재하기로 결정이 나면 큰 절차가 없다. 수정해야 하는 사항이 있긴 하지만 그러고 나면 며칠 안 지나 논문이 나온다. 하지만 TSQ만 그런지 미국의 여타 학술지가 다 그런지 모르겠지만 너댓 번은 편집자와 메일을 주고 받은 듯하다. 정말 꼼꼼하게 다 확인하더라. 그 중 하나가 이름인데 이름 표기를 어떻게 하길 원하냐는 질문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도 몇 번 메일을 주고 받았다. 이렇게 꼼꼼하게 작업하니 논문과 편집의 질이 올라갈 수밖에. 어쩐지 많이 부러웠다.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시스템부터 다른데 미국 학술논문은 출판사와 결합해서 나오는 듯하다(일반화할 순 없을 것이다). 한국 학술논문은 학회에서 자체적으로 출판한다. 급여도 제대로 못 받는 연구조교가 한두 명 있고 그가 관련 작업을 담당하기 때문에 개입할 여지가 없다. 연구조교에게 편집이나 교정을 요구할 수도 없다. 많이 배운 일이고 많이 아쉬운 일이다.
아무려나 TSQ: Transgender Studies Quarterly 최신호(3권 1-2호)에 트랜스페미니즘 관련 글이 실렸다. 트랜스페미니즘과 트랜스규범성을 다룬 논문인데 많이 부족해서 좀 많이 부끄럽다.

내가 누리는 특권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60425023207005

[중앙일보] 시리아 난민 28명, 창 없는 방서 5개월째 햄버거로 끼니 2016.04.25.
송환 대기실에서의 생활은 열악하다. 출입국장 2층의 470㎡ 공간에는 창문이 없다. 나무 평상과 샤워실, 남녀 화장실이 있지만 잠잘 공간은 없고 담요 한 장씩만 제공된다. 식사는 삼시세끼 햄버거·콜라만 준다. 세탁시설이 없어 폐렴·호흡기질환 등에 시달리고 있으며 전염병 위험마저 있는 상황이다.
지난 20일 화상 인터뷰를 한 무하마드는 “하루 종일 멍하니 지내다가 스마트폰 와이파이(wifi)가 잡혀 가족들과 연락이 될 때만 기다린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시리아인 A(23)는 “주로 치킨버거가 제공되고 ‘할랄 푸드’가 없어 치킨을 빼고 빵만 먹으며 5개월째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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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리는 특권의 효과를 고민했다. 한국에서 발생하는 인종이슈, 이주민 이슈 등을 나는 적극 사유하지 않는다. 한국 언론에 별로 소개가 안 되는 시리아 내전이나 난민 이슈 역시 적극 공부하거나 사유하지 않는다. 그래도 당장 내가 살아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이것은 내가 한국 사회에서 누리고 있는 특권이다. 한국인으로 인식되는 외모, 한국인 신분증은 내가 인종차별이나 한국에서 미등록/이주민, 난민이 겪는 차별에 무감해도 큰 문제가 없다. 내가 이런 이슈에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지만, 나는 내가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망각하며 살 수 있다. 나의 망각, 사유 없음은 기사에 나온 상황을 유지하는데 강력한 지지기반이 된다. 내가 이와 관련한 글을 써왔다고 해서 사회가 별로 달라지진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공모한 현실을 부정할 순 없다. 그러니까 출입국사무소의 관행이나 한국 정부, 혹은 끔찍한 내용의 글을 쓴 댓글러를 비난할 문제가 아니다. 물론 출입국사무소나 한국 정부를 살벌하게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그 비판이 나를 심판관으로 만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명백하게, 이런 식의 난민 대우가 지속되는데 나는 무지했고 방관했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또 다른 가해자, 더 많은 권력과 제도 운용 능력을 갖춘 가해자를 어떻게 비판하는 것이 좋을까? 비판하되, 나를 심판관으로 만들지 않는 언어는 무엇일까? 분노할 일이면서 반성할 일이라서 부끄러웠다.

모든 몸은 평등하다: 장애여성들의 몸으로 말하기

이호선_ 예전에는 목발을 짚으면, 교통사고가 나서 목발 짚어본 경험을 가진 사람이 말을 시켜요. ‘내가 다쳐봐서 아는데 너무 힘들더라’ 그런데 저는 아프진 않거든요. 나와 다른 경험인데 자꾸 그렇게 말하면 (내 경험이) 공감이 안 될까 봐, 너무 다른 몸이라서 공감이 안 될까 봐 걱정이지요. (235)

최해선_ 어릴 때부터 병 때문에 아팠지만, 이 병 외에도 아픈 데가 있잖아요? 생리통이 있다든지, 두통이 심하다든지, 감기 기운이 있다든지… 그런 이야기는 못하는 것 같아요. 큰 병 때문에 식구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폐를 끼치고 있으니까. 그 외에 자잘하게 아픈 건 내가 알아서 약을 먹거나 그냥 며칠 아프고 말거나, 어쨌든 이야기는 못했던 것 같아요. (236)
강다연_ (중략) 제가 이야기를 끄집어내야만 ‘이런 행동이 장애여성들에겐 폭력이구나’라는 걸 알릴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하는 게 제 자신에게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못 했어요.
이호선_ 못 쓴 이야기가 진짜 중요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우리는. (238)
이호선_ 중요한 부분이네. 중도장애인 이야기는 다들 얼마나 내가 잘 나갔나, 얼마나 내가 나락으로 떨어졌나, 그런데 어떻게 다시 성공했나, 그런 순서로 쓰는데. 우리가 암암리에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쓰지 않으려고 자꾸 노력을 했던 것 같아. 아무 생각 없이 쓴다 해도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쓰고 있을 때도 있어. 그렇지 않도록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후략) (239)
김효진, 최해선, 강다연, 박현희, 이호선 지음. [모든 몸은 평등하다: 장애여성들의 몸으로 말하기] (삶창, 2012)
근육통으로 누워 있는 동안, 미뤄둔 이 책을 읽었다. 다른 글을 준비하여 읽어야 하는 논문이 있음에도 그랬다. 장애여성의 몸 경험이 비장애여성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비장애-트랜스젠더퀴어의 몸 경험과는 또 어떻게 다른지 조금은 배울 수 있었다. 읽는 내내 내가 상상하고 사유하는 몸은 어떤 몸인지를 되새겼다. 당연히 부끄러웠다. 물론 이 책을 통해 배운 건 극히 일부다. 그것도 문자로 기록된, 그러니까 많은 검열을 거쳐 나온 언어를 다시 내 상상력의 한계 내에서 배웠다. 그러니 배웠다는 말이 부끄럽기도 하다.
이곳에 인용하려면 대담보다는 다섯 명의 작가가 쓴 각자의 글에서 인용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각자의 글은 어떤 문맥과 흐름이 있어서 일부러 뽑지 않았다. 대신 대담에서 몇 구절 뽑았다. 아마 비규범적 존재로 인식되는 사람이라면 많이 공감할 듯하다. 하지만 그런 공감이 장애여성의 경험을 나의 경험으로 등치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목발 에피소드가 정확하게 지적하듯. 타인의 경험을 내 경험과 유비하거나 내 경험에 수렴하며 말하지 않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 한 번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