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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시리아 난민 28명, 창 없는 방서 5개월째 햄버거로 끼니 2016.04.25.
송환 대기실에서의 생활은 열악하다. 출입국장 2층의 470㎡ 공간에는 창문이 없다. 나무 평상과 샤워실, 남녀 화장실이 있지만 잠잘 공간은 없고 담요 한 장씩만 제공된다. 식사는 삼시세끼 햄버거·콜라만 준다. 세탁시설이 없어 폐렴·호흡기질환 등에 시달리고 있으며 전염병 위험마저 있는 상황이다.
지난 20일 화상 인터뷰를 한 무하마드는 “하루 종일 멍하니 지내다가 스마트폰 와이파이(wifi)가 잡혀 가족들과 연락이 될 때만 기다린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시리아인 A(23)는 “주로 치킨버거가 제공되고 ‘할랄 푸드’가 없어 치킨을 빼고 빵만 먹으며 5개월째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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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리는 특권의 효과를 고민했다. 한국에서 발생하는 인종이슈, 이주민 이슈 등을 나는 적극 사유하지 않는다. 한국 언론에 별로 소개가 안 되는 시리아 내전이나 난민 이슈 역시 적극 공부하거나 사유하지 않는다. 그래도 당장 내가 살아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이것은 내가 한국 사회에서 누리고 있는 특권이다. 한국인으로 인식되는 외모, 한국인 신분증은 내가 인종차별이나 한국에서 미등록/이주민, 난민이 겪는 차별에 무감해도 큰 문제가 없다. 내가 이런 이슈에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지만, 나는 내가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망각하며 살 수 있다. 나의 망각, 사유 없음은 기사에 나온 상황을 유지하는데 강력한 지지기반이 된다. 내가 이와 관련한 글을 써왔다고 해서 사회가 별로 달라지진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공모한 현실을 부정할 순 없다. 그러니까 출입국사무소의 관행이나 한국 정부, 혹은 끔찍한 내용의 글을 쓴 댓글러를 비난할 문제가 아니다. 물론 출입국사무소나 한국 정부를 살벌하게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그 비판이 나를 심판관으로 만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명백하게, 이런 식의 난민 대우가 지속되는데 나는 무지했고 방관했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또 다른 가해자, 더 많은 권력과 제도 운용 능력을 갖춘 가해자를 어떻게 비판하는 것이 좋을까? 비판하되, 나를 심판관으로 만들지 않는 언어는 무엇일까? 분노할 일이면서 반성할 일이라서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