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치학과 나의 윤리

여성운동에선 너무도 빈번하게, 단지 적절한 페미니스트 수사를 차용하는 것만으로 자신은 성차별적인 생각에서 자유롭다고 가정했다. 그것은 더욱이, 피억압자로 자신을 동일시하는 건 자신이 억압자와는 무관하다고 가정했다.
-벨 훅스(bell hooks, 1980:9)

한땐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정체성을 취해야 하는가 하는 얘기들이 있었다. 페미니스트면서 레즈비언이고 채식을 하고 환경운동을 하고 등등. 페미니스트, 혹은 정치적인 올바름의 측도라는 말로, 이런 기준들을 말하곤 했다. 이런 말이 단순히 농담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겐 심각한 상처를 주었을 정도로 진지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식의 분류기준에 나는 거의 다 속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올바르냐면 그렇진 않다. 채식을 한다는 것이 올바른 행동은 아니며, 어떤 식의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지 말하지 않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가장 올바른 정치학을 실천하고 있다고 쉽게 단언할 수 없으며, 내가 트랜스젠더 혹은 레즈비언 트랜스라고 해서 내가 가장 억압받는 위치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트랜스라는 나의 상황이 내 모든 삶의 다른 모든 상황을 압도할 정도로 절대적일 수도 없다.

누군가의 상황이 정치적 올바름의 지표/기준이 되는 건, 끔찍한 일이다.

바이센테니얼 맨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실버버그, [바이센테니얼 맨], 박상준, 이영 옮김, 서울: 좋은 벗, 2000

관련 글: 아옹, “바이센테니얼맨”

아직도 그런데, 누군가 추천해준 책은, 읽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경향이 있다. 이건 마치 그냥 읽으면 무척 재밌는 소설도, 시험을 위해 읽으려면 선뜻 읽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달까. 하지만 이런 경향은 누군가의 추천이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산 책들도 마찬가지이니, 딱히 이런 부담감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저, 그 책을 읽을 몸으로 만들 시간이 필요한 것. 그래서 당장 읽어야지 하고 산 책 중엔, 몇 달이 지나서야 집어 드는 경우도 빈번하다.

[바이센테니얼 맨]도 어김없이 이런 과정을 거쳤다. 2월 초에 아옹님 블로그에서 보고, 너무 재밌을 거 같아서 책을 제본했다. 출판사에도 재고가 없는 상태라 제본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리고 얼추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흘러, 정말 잠들기 전 한 시간 정도를 활용해 읽었는데, 일단, 무척 재밌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아침에 잠에서 깨니 스탠드도 안 끄고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을 정도로. 그러니까 책을 읽다가 스스륵 잠든 적이 별로 없는데, 이 책은 그랬다. 아침에 일어나선 꽤나 당황하기로 했고. 흐흐.

재밌으면서도 무척 흥미로운 건, 이 책의 내용이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것. 앤드류 마틴의 역사는 마치 미국에서 노예제 폐지와 흑인해방 운동의 역사를 은유하는 것 같기도 하고, 페미니즘 운동사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동성애운동이나 트랜스젠더 운동의 역사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물론 이런 운동들이 앤드류라는 어떤 한 개인의 성과로 치환할 순 없지만. 자신의 욕망, 자신이 원하는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앤드류 마틴의 노력은, 아옹님의 지적처럼, 이런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힘을 획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른 한 편, 이 책을 읽다가 문득, 로봇공학은 “인간”을 질문할 뿐 아니라,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효과적으로 허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로봇공학이 추구하는 목적이 인간처럼 보이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로봇을 만드는 것이라면, 이는 프랑켄슈타인의 욕망처럼 로봇을 통해 인간을 만드는 과정일까? 그렇다면 이는 인간을 공학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의 반영일 텐데, 이것이 가능하다는 믿음과 불가능하다는 믿음은 둘 다 동일한 욕망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기준이라는. 그렇다면 그 인간은 누구이고,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그 어떤 기준도 특정 나이나 인종, 신체조건에 근거하기 마련이고, 이럴 때 인간의 조건은 “정상적인 인간”의 조건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이라면, 사고능력이 없다고 얘기하는 이제 갓 태어난 아기는 인간이 아닌가, 와 같은 질문들, 이와 유사한 질문들을 통해 “인간의 조건/특성”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결국 특정한 누군가의 경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담, 인간과 로봇의 경계는 결국 인간을 어떤 식으로 정의하고자 하는가, 라는 욕망 혹은 두려움의 논쟁으로 슬쩍 바꿀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외과수술이건 다른 어떤 식이건 간에, “구성”되지 않은 몸이 가능은 할까?

나중에 다른 주제로 한 번 더 읽으면 좋겠다 싶은 책이지만, 사실 내용 전개에 있어 조금 허술한 부분은 아쉬웠다. 일테면, 자신의 마지막 욕망을 위해 앤드류가 취한 조치에 사람들이 감동 받아 결국 원하는 만장일치의 투표 결과가 나왔다는 식은, 좀 유치하다는 느낌. 좀 더 섬세하게 묘사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내용 자체는 재밌다.

“로봇의 역사에 대해서는 한 권도 없어요, 조지. 로봇이 쓴 로봇의 역사, 확실히 그런 책은 아직까지 없었어요. 나는 로봇이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설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처음으로 로봇이 세상에서 일하며 살게 된 이후, 인간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싶습니다.” (155)

: 로봇과 인간을 다른 용어들로 바꾸면 상당히 다양한 방식으로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데, 이게 이 책의 매력. 일테면 로봇에 트랜스젠더를, 인간에 의사를 대입해도, 로봇에 “여성”을 인간에 “남성”을 대입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로봇의 정신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적인 감정도 느낀다는 거요. 그렇다고 해도 난 사람이 될 순 없소. 다만 불행한 로봇이 될 뿐. 내가 내 몸 속에 있는 로봇적 요소들을 모두 없애버린다 해도 난 인간이 될 순 없을 거요. (…후략…)” (304)

: 이 구절이, 특히 좋다.

글 편집 과정에서의 고민

며칠 동안 노트북(아직 이름을 못 정했다-_-;;) 화면과 데이트했다.;; 눈이 침침하고 아프고 어질어질하다. 내용의 완성도와는 무관하게, 어쨌든 인터뷰 자료집의 초안을 완성해서 공동 편집자(?)들에게 메일로 보냈다. 무려 이틀이나 늦게. 일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라, 일을 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테면, 어떤 상황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아울러 이런 경험을 혼자만 알고 있기엔 너무 소중하고 빼어난 성찰이라, 다른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런 욕심을 앞세우다보면 그 말을 한 개인의 많은 부분을 폭로하게 되고, 볼거리로 만들 수도 있다. 이럴 때 어느 정도 수위에서 내용을 조율해야 할까?

ftm인터뷰 내용을 정리하면서 이런 고민을 했다. 여성성과 남성성, 성별, 남성문화라고 불리는 어떤 집단, 자신을 설명하는 방식까지, 거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 좋아서 최대한 많이 실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많이 실을수록 그 말을 한 사람을 볼거리로 만들 위험에 빠지는 아이러니.

다른 한 편, 이 사람들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하려는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했다. 어떤 내용을 선택하고 어떤 내용을 버릴 것인가 하는, 선별 과정에서 경험하는 갈등. 어떤 내용을 선택하느냐는 철저하게 나의 입장을 반영하기 마련인데, 작업 하는 내내 이런 나의 욕망과 부대꼈다. 아울러 주인공들의 말을 조금만 더 다듬어서 좀 더 섬세하게 표현하고 싶고, 좀 더 맥락을 덧붙이고 싶은 유혹을 매 순간 느꼈다. 물론 이 작업은 처음부터 주인공들의 말을 최대한 그대로 살리지만 상당한 윤문작업을 거치지 않을 수 없는 한계에서 출발한다. (같은 질문에 따른 답이 여러 가지였으니까.) 그럼에도 최대한 개입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조금만 더 세심하게 표현하면, 하고 싶은 말이 좀 더 잘 전달될 텐데, 라는 고민에 문장을 슬쩍 고칠까 하는 유혹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가장 큰 걱정은 이런 고민 속에서 주인공들에게 예기치 않은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 하는 거. 그래서 지금이라도 이 작업을 중단하고 싶은 갈등을 하곤 한다. 나도 나를 믿을 수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