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지향이나 가치가 아니라 현재 상황에 비추어 고민하면 LGBTAIQ와 같은 식의 범주 구분, LGBT/퀴어와 같은 방식의 범주 구분이 작동하는 현재 상황에서 이들 간의 통합적 연대가 이루어지는 논의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나, 이런 고민을 한다. 물론 이 고민은 [삐라] 2호에 쓴 글에서도 표현한 내용이지만 연대를 하기 위해선 근본적 변화,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이 필요하다.
물론 연대는 하나의 통일 이론을 지향하는 운동이 아니다. 연대는 가치 지향이며 그래서 서로 다른 논의, 서로 다른 입장과 위치에 있더라도 어떤 가치를 위해 연대는 가능하다. 하지만 연대는 그 과정에서 ‘나’와 연대하는 집단을 배제하거나 삭제하는 방식이 아니어야 하며 나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다시 점검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나의 입장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진행하는 연대는 억압이거나 점거일 뿐이다.
익숙한 예를 들어 보자. 이성애에 대항하여 동성애가 가능하다는 논리는 단 하나의 젠더를 일평생 변화없이 사랑한다는 인식 구조를 전제하는 측면이 있다. 이것은 바이섹슈얼/양성애를 배제하는 논리의 밑절미다. 단 하나의 젠더만을 일평생 변화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규범은 바이섹슈얼을 미성숙, 불완전 등으로 이해하고 존재 자체를 삭제하거나 부정하는 발언을 뻔뻔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 중 하나다. 또한 질문하기를, 저 두 사람의 연애 관계가 이성애나 동성애라고 가정하는 태도는 어떤 인식론을 가정하는가? 그런데 이런 인식론은 트랜스젠더퀴어를 사유하지 않는 인식이기도 하다. 트랜스젠더퀴어, 특히 젠더퀴어는 질문한다. 젠더는 정말 확정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가? 당신은 나와 같은/다른 젠더인가? 남성 혹은 여성으로인식하는 방식은 어떤 사회적 상상력에서 가능한 것인가? 트랜스젠더퀴어의 이런 젠더 인식론을 인식의 주요 토대로 받아들인다면 이성애나 동성애와 같은 범주는 성립하기 어렵다. 불가능하진 않지만 언제나 불안정하다. 트랜스젠더퀴어는 비트랜스여성이나 비트랜스남성 범주, 이성애나 동성애와 같은 범주를 불안정하고 취약한 것으로 만들었기에 트랜스젠더퀴어 혐오나 배제는 바이섹슈얼 혐오나 배제만큼이나 오래 되었다. 인터섹스를 사유의 한 축으로 고민하기 시작하면 논의는 다시 복잡하다. 당신은 정말 시스남성 혹은 시스여성으로 태어났는가? 남성 혹은 여성이란 범주는 어떤 몸 경험, 어떻게 태어나는 몸을 중심으로 구축된 상상력인가? 이 사회에서 인간을 인식하는 방식은 누가 생산한 ‘과학’을 기준으로 만들어졌으며, 이른바 ‘과학적 사실’이란 것이 어떻게 기획된 것인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성적 지향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의 많은 부분을 불안정하게 한다. 무성애는 질문한다. 인간의 관계는 왜 성적 욕망, 육체적 관계 중심으로 사유되는가? 이것을 상대화했을 때, 사랑과 성적 욕망을 등치했던 기존 논의는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 폴리아모리는 질문한다. 배타적 연애 관계는 이 사회의 무엇을 보호하는가? 왜 연애는 둘 만의 관계로 가정하는가? BDSM은 질문한다. 관계를 맺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논의와 합의가 필요한가? 그런데 LGBT/퀴어면서 장애인은 질문한다. 합의란 어떤 의미인가? 몸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더 많은 복잡한 사유와 질문이 등장한다.
그리하여 LGBTAIQ로 연대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서로가 서로의 기본 토대로 여기는 것, 혹은 당연하다고 여긴 것을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하고 때론 나 자신을 부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런 작업이 충분히 진행되었을 때 LGBTAIQ니 LGBT/퀴어니 하는 방식의 긴 호명이나 연대가 가능하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결국 LGBTAIQ니 LGBT/퀴어니 하는 행사나 농성에 연대라는 모이면서도 그것이 동성애 중심으로 구축될 것이며 다른 범주는 누락되거나 삭제될 것이다. 때로 부정되거나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것은 가정이 아니라 실제 일어난 일이고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