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4등 감상 추가…

영화 4등 감상평을 며칠 전 쓰면서 뭔가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는 표현이 있었다. 지금 갑자기 떠올랐다.

예를 들어, 혈연가족에게 대학원 같은 곳에 왜 가냐고 그냥 취직하라고, 공부하지 말라고, 너는 그런 일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가며, 때론 욕도 들어가며, 그럼에도 공부를 하고 싶어서 악착 같이 공부를 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미술, 음악,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 창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런 사람이 상당하다. 1등은 못 하지만, 4등도 못 하지만 어쨌거나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아둥바둥 살아가고,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어떻게든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다. 이런 이들에게 영화 [4등]의 결론은 무엇을 의미할까? 부모 혹은 어머니의 닥달이 없으니, 폭력 코치/교사가 없으니, 스스로 학습을 하니 1등을 한다는 그 결론은 1등 지상주의 한국사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읽힌다. 이런 나의 반응이 1등은커녕 10등, 100등, 100만등도 못 해본 나의 열폭일 수도 있지만 영화의 메시지, 그리고 결론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아니 불쾌하다. 성적 지상주의, 성적을 위해 닥달을 애정으로, 폭력을 사랑으로 치장하는 사회를 비판하겠다는 의도는 알겠다. 하지만 그 결론이 1등일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국가인원위원회의 제작 지원을 통해 인권 영화를 표방한다면 결코 그래선 안 되었다.
가급적 이 영화를 피하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각자가 선택할 일이지만.

부끄러운 일

여행 관련 글을 읽다보면 외국 여행지에서 겪은 인종차별 경험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나도 그런 글을 적었지만, 유럽에 갔는데 유럽 백인이 했다는 인종차별 발언, 동남아 어느 식당엘 갔는데 백인에겐 잘 해주는데 동아시아인 혹은 한국인인 자신에겐 불친절했다는 경험. 이런 경험에 분개하는 글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런 식의 인종차별을 비롯한 다양한 차별에 분개하고 비판하는 작업은 무척 중요하다. 때로 집단적으로 항의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아니 필요한 수준이 아니라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 각종 게시판이나 댓글을 살펴보면 외국인 노동자를(물론 여기서 외국인은 백인이 아니라 비백인, 동남아시아인, 조선족일 때가 절대적이다) 추방해야 한다거나 입국을 제한해야 한다는 말을 무척 빈번하게 찾을 수 있다. 외국인 노동자로 인해 한국인이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 그래서 그들이 한국인에게 해악이란 식의 인식이 빈번하다. 혹은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많은 미/등록 이주민은 일상에서 다양한 차별을 겪고 있다.
외국 여행에서 겪는 인종차별 경험엔 분개하는 사람이 많은데 정작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인종차별엔 공모하거나 동조하거나 선동하는 목소리가 많다.
나 자신부터 반성할 일인데 내가 차별 받은 경험에 민감하고 분개하는 만큼이나 내가 공모하고나 방조하는 차별 구조에 민감할 수는 없을까? 내가 혹은 나와 동질적 집단으로 여기는 이들이 겪는 차별에 분개하는 수준으로 내가 알게 모르게 이득을 보고 있는 특권적 위치와 그 위치로 인해 차별 받는 집단의 경험에 민감할 수는 없을까? 사실 가장 어려운 일은 이런 점이다.
나는 트랜스젠더퀴어 이슈는 언제나 민감하려 애쓰지만 장애 이슈엔 덜 민감하고 인종 이슈엔 더더욱 덜 민감하게 고민하다. 학력이나 학벌 이슈엔 민감하려 애쓰지만 별다른 성찰이 없으며 계급이슈에선 매우 민감해야 함에도 별 말을 안 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많은 이슈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거나 그 특권의 지속을 방조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이런 복잡성을 어떻게 하면 더 고민할 수 있을까…
참 부끄러운 일이다.

4등: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 지원한 반인권 영화

E와 함께 영화 정지우 감독의 [4등]을 봤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 지원을 했음은 극장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수영을 좋아하는 준호(유재상 분)는 어머니 정애(이항나 분)의 닥달로 늘 스트레스를 받으며 수영 대회에만 나가면 4등을 한다. 이에 정애는, 과거 수영 천재란 소리를 들었던 국가대표 출신이며 태능선수촌에서 구타에 항의하며 튀쳐나온 광수(박해준 분)에게 준호의 코치를 부탁한다. 광수는 준호에게 수영을 가르치지만 구타와 폭력이 반복되고 준호는 이런 상황에 결국 수영을 그만둔다. 모두가 준호의 수영을 포기했을 때 준호는 다시 수영을 시작하고 정애의 닥달도 없고, 광수의 폭력적 코칭도 없이 혼자 수영을 연습했을 때 결국 수영대회에서 1등을 한다. 그러니까 그냥 주인공 준호의 성장담, 흔한 소년의 성장담을 담은 영화다. 소년의 성장담에 특별한 관심이 있지 않다면 굳이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나는 이 영화가 인권위에서 주장하는 투명한 인권 개념엔 부합할지 몰라도 내가 사유하는 인권 개념과는 무척 동떨어진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가장 단적인 예는 젠더 감수성의 상실이자 성역할 고정관념의 지독한 반복이다.
어머니 역의 정애는 영화 내내 아들의 성공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준호가 수영을 하겠다고 할 땐 준호가 어떻게든 메달을 따기만을 바라고, 그래서 대회에 나갈 때마다 4등을 하는 준호에게 화를 내고 준호가 수영을 더 잘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한다. 그래서 광수란 코치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조언을 들었음에도 감당하겠다며 광수를 코치로 받아들인다. 준호가 수영을 포기한 뒤에 며칠을 앓아 누운 정애는 준호의 동생 기호에게 관심을 돌린다. 기호를 각종 학원에 보내고 사랑을 확인받고, 기호에게 “엄마의 희망”이란 점을 반복 확인시킨다. 헬리콥터맘이란 말로 몇 년 전부터 널리 회자된 모습이다. 그런데 정애가 왜 그렇게 자식의 성공에 집착 혹은 매달릴 수밖에 없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가정 밖의 경력이 단절된 ‘전업주부’에게 자식의 성공이 무슨 의미인지, 사회나 이성애규범적 가족이 어머니-여성에게 자식 양육에 있어 무엇을 요구/강압하는지 조금도 설명하지 않는다. 이것은 구구절절한 설명도 필요없다. 한두 장면만으로도 충분한 내용임에도 이를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식을 억압하고 독점하고 소유하고 조정하는 어머니/괴물로 재현된다. 인권영화를 표명하는 영화에서 어머니 역의 정애는 여타 많은 영화에서 어머니/여성을 재현하듯 똑같이, 가장 태만하고 나쁜 방식인 어머니/괴물로 등장한다.
여기서 무슨 인권이 존재하는가? 억압적 교육 제도, 1등만 강요하는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서 여성 젠더는 여전히 괴물로 그려져도 괜찮은 것인가?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정애의 사회적 맥락을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자식을 공부 혹은 성공의 도구로 만드는 현재의 상황, 10대에게 대학만을 강압하는 현재 상황이 마치 어머니/여성의 잘못으로 발생한 것처럼 이해하는데 동조하고 그런 이해를 재생산한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영화에서 정애는 그 이름이 제대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머니로 등장하거나 준호엄마로 등장할 뿐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어머니/여성을 이해하는 감독과 인권위의 태도인지도 모른다.
그럼 아버지는 언제 등장하는가? 영훈(최무성 분)이 기자가 아니라 아버지로 제대로 등장하는 장면은 준호가 광수 감독을 만난 뒤 참가한 대회에서 2등을 하여 축하 파티를 할 때다. 물론 영화 초반에 영훈은 비중있게 등장한다. 하지만 그때 영훈은 아버지가 아니라 기자로 등장한다. 축하 파티를 하기 전에도 아버지 역으로 영훈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때 영훈은 자식의 교육에 별 관심이 없는, 그저 정애에게 영훈을 너무 닥달하지 말라고 짜증내는 모습 정도다. 사실 이건 전형적 아버지 역할의 모습이며 아버지 역할에 충실한 모습이다. 그리하여 준호가 2등으로 은메달을 따기 전까지 영훈은 사실상 집에서 부재한다. 그렇게 등장한 영훈은 준호가 구타 당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때 해결 방법은 코치 광수를 계약해지하는 것이 아니라 웃돈을 주며 뒷거래를 하는 방식이다. 한 번만 더 구타를 하면 기사로 싣겠다고. 이것은 사실 준호의 어려움을 조금도 해결하지 않는 방식이지만 마치 해결한 것만 같은 착시를 야기한다. 영화에서 나름 예리한 장면인데 아버지는 가정에서 발생하는 일을 해결하지 않는다. 해결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뿐. 영훈은 언제든 이렇게 할 수 있다. 영훈은 준호가 취미로 수영을 하라고 말할 수 있고, 정애에게 준호를 닥달하지 말하고 말할 수 있다. 영훈은 준호에 의해 평가받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준호가 잘 되면 그것은 영훈의 덕으로 칭찬받을 수 있다. 준호가 잘못되면 그것은 정애/어머니의 잘못으로 회자되지 영훈의 경력이나 삶에 결정적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이렇게 영훈은 준호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준호가 모든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아버지 역할의 전형과 신화를 반복한다. 영화가 태만하고 진부한 또 하나의 이유며, 이 영화가 인권영화인지 의심하도록 하는 장면이다.
비록 이런 문제(내 입장에선 치명적 문제)가 있다고 해도 ‘4등’이라는 기획에 잘 부합한다면 이 영화는 그 나름의 가치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한계만 존재하는 텍스트는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그런 가치를 지키지 않는다. 이 영화가 가장 반인권적이라고 판단한 지점, 아니 반인권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 영화가 자신의 주제 자체를 배신하는 지점은 결말에 있다.
준호는 어머니 정애와 코치 광수에게 벗어나기 위해 수영을 그만둔다. 하지만 다시 수영이 하고 싶은 준호는 결국 혼자 수영을 하게 된다. 광수에게 찾아가 다시 코치를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광수가 준호에게 혼자 하면 금메달도 딸 수 있다는 조언을 줬기 때문이기도 하다. 폭력 코치 없이 수영 연습을 한 준호는 수영대회에 출전한다. 그때부터 영상 자체는 무척 예쁘다. 영화 내내 준호가 수영할 때면, 특히나 즐겁게 수영할 때면 라인을 넘나드는 모습으로 재현하는데 마지막 수영 역시 라인을 넘나드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준호가 수영을 즐기고 있음을 표현한 장면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영 대회가 끝나고 결과가 나온다. 결과는 총 세 번에 걸쳐 나온다. 준호를 비롯한 선수들이 결승라인에 도착하는 장면이 첫 번째. 여기선 누가 몇 등인지 알 수 없다. 두 번째는 준호가 수경을 쓴 상태로 경기안내판을 바라보는 모습. 하지만 수경을 쓰고 있어서 알 수가 없다. 세 번째는 수영장에서 나와 걸어가는데 옆에 있던 다른 아이가 ‘형 1등하면 무슨 기분이에요?’라고 묻고, 곧이어 전광판을 확인하는 모습이다. 그곳에서 압도적인 시간차로 1등을 했다고 나온다. 그리고 억압과 폭력이 점철된 수영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는 표정이 등장한다.
나는 이 영화가 정말로 자신의 주제 의식에 투철했다면 1등했다는 장면은 빼야 했다고 믿는다. 수경을 써서 결과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이 원하는 수영을 했다며 자신감을 갖는 표정이 나와야 했다고 믿는다. 어머니 정애의 닥달, 1등을 하고 싶으면 체벌도 정당하다는 광수의 체벌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열심히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1등의 결과일 필요는 없다. 사실 영화 후반부터 문제는 발생한다. 준호가 마지막으로 광수를 찾아갔을 때 준호는 자신이 1등을 해야만 수영을 지속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운동을 하는데 그것이 왜 1등이어야 하는가? 1등만이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 지속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근거인가? 이것은 여전히 1등주의 혹은 어떻게든 메달을 획득해야 한다는 사회적 강박/요청에 부합하고 동조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1등을 못 했고, 1등을 하고 싶기에 1등을 하고 싶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1등만이 수영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아니다. 여기서 영화의 결론은 예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재능, 하고 싶은 일은 1등이란 성과로 납득되지 않는다. 부모 혹은 어머니의 닥달, 코치의 폭력(사랑의 매로 포장된다)으로 상징하는 성과지상주의, 성과를 위해 무엇이든 해도 정당하다는 사회적 태도가 없으면 사람들은 더 잘 할 것이다. 나 역시 이런 인식엔 일정 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그 결과가 1등일 필요는 없다. E와 이야기했듯 차라리 결과가 나오려면 4등이 나았을 것이다. 4등이고 준호가 만족하는 표정을 짓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내버려두면, 알아서 하게 두면 결국 1등한다는 결과는 1등을 못 하거나 그런 등수를 원하지 않는 이들에겐 결코 유쾌하지 않은 결론이다. 메달을 강요하는 정애나 1등만 강압하는 광수와 영화의 결론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영화 자체는 별로였지만 영화 관람 내내 즐거웠다. 내가 이제까지 영화를 관람하며 이보다 관람 경험이 즐거웠던 적이 없었던 듯하다. 영화관이 특별히 더 좋았던 건 아니다. 종종 이용하는 시설인데 그럴리가. 그저 영화관에 나와 E 둘 뿐이었다. 영화를 보내는 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면서 관람할 수 있었다. 영화관에서 금지하는 태도, 발을 앞의자에 올리는 자세도 취할 수 있었다. 정말 편하게 이 장면 좋다, 저 장면 별로다와 같은 이야기를 부담없이 마구 떠들면서 관람 했더니 영화 내용과 별개로 만족도가 무척 높았다. 다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