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꼭 숨기

원래 계획이라면 아침 6시에 일어나 7시까지는 학교에 와야 했다. 바닥청소를 하는 날이라, 7시 30분에는 연구실 문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바닥청소를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가급적 하는 게 좋다). 근데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라디오에서 오늘 무척 춥다라는 말을 듣곤, 그냥 잤다. -_-;;;

지금 학교 사무실인데 불도 안 켜고 있다. 아무도 없는 척 하려고. 아침에 문을 열지 않은 것도 죄송하고 늦게 온 것도 죄송해서. 안에서 문을 잠그고 불도 끄고 아무도 없는 것처럼 있다. ;;;

수학놀이

01
어릴 때 읽은 책 중에, “과학자들은 셰익스피어도 모른다.”고 과학자들의 무식함과 교양 없음을 비웃는 인문사회학자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분기탱천. 다른 어떤 책에선 이런 비웃음을 조롱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인문사회학자들은 열역학 법칙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식의 반응들 모두 좀 웃기다. 그럼에도 확실히 영화나 소설의 내용을 얘기하는 것과 미적분학을 얘기하는 건, 다른 무게와 느낌을 지닌다.

일테면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쉽게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최근 개봉한 영화나 인기 소설의 내용을 얘기하면 적잖은 호응을 유발할 수 있다. 내용을 몰라도 어느 정도 흥미를 유발할 수도 있고. 하지만 예를 든답시고 미적분학이나 좌표를 그리고 그래프를 그리며 설명한다면? 차라리 예를 들지 않는 것이 낫다.

이건, 그 사회에서 어떤 지식을 교양이나 상식으로 간주하고 어떤 지식을 전문지식이나 쓸데없이 어려워서 몰라도 되는 것으로 간주하는가를 알려준다. 수학 뿐 아니라 철학 같은 이야기들도, 아는 게 이상한 상황이고. ‘무언가는 필수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논쟁적인데도 교양이나 상식이란 말은 이런 논쟁을 피해가기 마련이다. 트랜스젠더 이슈와 관련해서도, 대충 하리수란 이름을 알고 적당히 “쿨”한 태도만 유지할 수 있으면 되지, 그 이상 얘기하지 않는 것 역시 이 사회에서 트랜스젠더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처럼.

02
중고등학생시절, 무한의 세계를 배웠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유한의 세계에서 수를 배운 것 같다. 유한을 기본 토대로 가정하고 얘기할 때, 자연수 전체에서 자연수 전체의 개수(엄밀하게는 계수 혹은 농도)와 짝수의 개수는 다르다. 예를 들어 {1, 2, 3, 4, 5, 6, 7, 8, 9, 10}의 자연수 집합을 가정하면, 즉, 자연수가 10개인 유한집합을 가정할 때, 짝수 {2, 4, 6, 8, 10}의 개수는 자연수 개수와 동일할 수 없다. 간단하게 세어만 봐도, 자연수 전체는 10갠데 짝수인 자연수는 5개니까.

아는 사람들에겐 ‘진부한’ 내용이지만, 무한의 세계에서 짝수인 자연수와 자연수 전체의 개수는 동일하다. 이건 함수(혹은 일대일 대응)를 통해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f(n)=2n이라고 하면,
n=1일 때, f(1)=2
n=2일 때, f(2)=4
란 식으로 나타난다.
위에서 예로 든 {1, 2, …, 10}인 유한집합을 가정하면 짝수인 자연수의 개수와 자연수 전체의 개수가 동일할 수 없다. 하지만 무한집합을 가정하면
1 → 2
2 → 4

100 → 200

즉, 모든 자연수는 짝수인 자연수와 일대일 대응이 가능하단 점에서 둘의 ‘개수’는 동일하다. 홀수인 자연수의 개수 역시 일대일 대응을 통해, 자연수의 개수(계수, 농도)와 동일하다.

그럼 홀수인 자연수의 농도 N1과 짝수인 자연수의 농도 N2를 더하면 자연수 전체의 농도 N의 두 배일까? N1 + N2 > N 일까? 당연히 아니다. 홀수인 자연수의 농도를 1, 짝수인 자연수의 농도를 1이라고 하면, 1+1=1이다.

어느 하나가 틀리고 어느 하나가 맞다는 게 아니라, 어떤 가정과 전제에서 출발하느냐에 따라 접근하는 방식과 상상 자체를 바꿀 필요가 있다는 걸 알려주는 간단한 예 중에 하나다. 모든 수학 수업은 첫 시간에 공리와 정의를 설명하는데서 출발한다. 이는 현재 설명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을 가정하고 어떤 토대에서 출발하는지를 명확하게 밝히는 작업이기도 하다. 적어도 내게, 수학은 현재의 논의가 정확하게 어떤 가정과 전제에서만 가능한지를 명확하게 밝히면서 전개하는 것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수학을 좋아했고, 수학을 듣는 과정에서 철학적인 의미를 캐고 싶었다. 하지만(혹은, 바로 이런 이유로)수학도 철학도 공부하지 않고 4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살짝 아쉽지만, 나중에, 한참 세월이 지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03
[수학의 약점]은 이런 이유로 재밌는 책이다. 비록 저자들이 드는 예시나 어떤 관점은 상당한 짜증을 유발하지만, “수학은 스스로의 약점을 먹고 자란다.”란 관점에서 기술하는 내용은 상당히 재밌다(아마, 이런 관점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할지도… 흐흐). 수학은 그 자체로 완결하고 모순 없는 체계가 아니며, 한 사회의 관습적은 인식과 무관한 것도 아니다. 수학은 언제나 모순투성이고 이런 모순을 인정하며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방향으로 발달한다. 지금은 무한이란 말이 빈번하게 사용하는 개념이지만, 수학에서, 과학에서 무한은 오랫동안 논해선 안 되는 금기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같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인 조건, 즉 “값, 무게, 종류… 등을 지목해서 그 단위 내용이 같다는 것”일 때에 한해서라는 단서가 숨어 있다. 가령, 수박 하나에 사과 하나를 더하여 둘이라고 할 때, 크기는 다르지만 “값은 같다”라든가 하는 것을 그 예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값은 같아도 무게나 길이는 다를 수 있다. 그러니, ‘같다’라는 말에는 어떤 하나의 조건만 같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그 이외의 것은 무시한다. 즉, ‘같다’에 대한 약속이 다르면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15)

무한의 문제에 유한의 계산법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차원이 서로 다른 세계에 ‘같다’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말라는 교훈을 얻었다.(141)

“부분은 전체보다 작다.”라는 사실은 유클리드 이래 수학의 상식, 아니 공리이다. 물론, 유한의 집합에서는 이 명제는 언제나 참이지만, 이것이 무한집합으로 옮겨지면 “부분은 전체와 같을 수도 있다.”라는 역설로 변한다.(209)

수학의 기초적인 개념에 숨어 있는 여러 가지 모순은 집합론의 대담한 연역의 확장으로 점차 그것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논리가 정밀해지고, 기호화시킴으로써 더욱 엄밀하게 따져 가면 이런 모순은 없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모순이 더욱 명확하게 나타난다.(236)

“‘언젠가 결말이 지어진다’라는 주장은 무엇에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인가? 도대체 당신의 이 말을 보증하는 것은 무엇인가? 만일, 본질적으로 참과 거짓을 판가름할 수 없는 명제가 있다고 할 때, 무슨 권리로 참 아니면,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브로워, 258)

꿈틀거리는

2005년 8월 처음 [Run To 루인]을 시작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그땐 상상도 안 했던 그런 방식으로 살고 있다. 얼마간의 실험 기간을 거치고 [Run To 루인]을 시작한 2005년 8월, 그 시기엔 아마도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책을 읽거나 논문을 읽는 삶이었고 다른 무언가가 내 삶에 있을 거란 상상은 하지 않았다.

운동? 이랑 활동은 일종의 운동이었지만 세미나와 매체 발간을 중심으로 진행했고, 그래서 의견을 제시할 필요가 있는 일이 생겼다고 해서 성명서를 내는 식의 무언가를 하진 않았다. 그때 내가 상상한 운동은 이 정도였다. 글쓰기 혹은 글이라는 매체를 통한 방식.

2006년 6월 3일. 한 수다회에 참가하며 인생이 바뀌긴 확실히 바뀌었다. 회비 회원 이상의 무언가는 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삶이 꼭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에 접근했다. 그리고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조금 애매한 위치였지만, 아무려나 성전환자인권실태조사기획단에 뒤늦게 참가했고, 지렁이 발족을 준비했다. 그렇게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일 년 조금 더 되는 시간이 흘러, 2007년 10월의 마지막 날. 긴급행동에 참가했다. 또 한 번 삶이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어제, 돌아오는 버스에서, 좀 더 성장하고 싶다는 욕심을 품었다. 일 년의 계획을 짜면서, 적어도 7월부터는 논문에만 붙어야 하겠지만, 그리고 그 전에도 상당한 준비를 해야겠지만, 활동에서 좀 더 욕심을 내고 싶다는 바람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활동을 시작한 이후의 지난 시간이 알에서 부화를 기다리는 시간 같다고 느꼈다. 소속은 있고, 그곳에서 뭔가를 하는 거 같은데, 그 시기가 알에서 부화를 기다리던 시기는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이렇게 성급한 평가가 무척 우습지만, 지금의 느낌으로 지난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은 그런 거 같다. 막무가내로 참가해서 배우고 싶다는 욕심, 성장하고 싶다는 욕심. 능력은 안 되지만, 안 되는 능력이라도 열심히 하면 부족한 재능을 만회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들.

아니다. 아니다. 이런 말들 다 필요 없다. 그냥 배우고 싶다. 성장하고 싶다. 무작정 물어보고 가르쳐 달라고 생떼를 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