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트랜스젠더보건의료전문가협회(WPATH) 건강관리실무표준(SOC) 한국어판 발간기념 발표회 [트랜스젠더와 의료]

세계트랜스젠더보건의료전문가협회(WPATH) 건강관리실무표준(SOC) 한국어판 발간기념 발표회
<트랜스젠더와 의료>
지난 1년간 비온뒤무지개재단은 트랜스젠더의 의료/진료 쳬계이 아직은 미비한 한국 보건의료계에 더 많은 정보를 알리고자, 트랜스젠더와 관련된 세계적 전문기관인 세계트랜스젠더보건의료전문가협회가 제작하여 트랜스젠더 의료 보건 가이드를 제공하고 있는 건강관리실무표준(SOC)를 번역해왔습니다
1년여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한국어판이 발간되어 이를 기념하며, 전문가들을 모시고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와 의료를 이야기 하는 발표회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일시 : 2016년 5월 1일 오후 2시
장소 : 순천향대학교병원 서울병원 신관 1층 청원홀
발표자
▶ 최인광 원장, 정신과 전문의 – 영국의 젠더 클리닉과 트랜스젠더 진료
▶ 이은실 교수, 순천향대학교병원 산부인과 – 건강관리실무표준 제7판 개괄
▶ 이승현 박사, 법학박사, 트랜스젠더인권활동가 – 트랜스젠더, 의료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 한국적 상황의 맥락에서
참가비 : 10,000원(건강관리실무표준 한국어판 인쇄본과 발표 자료 제공)
참가비 입금 : 우리은행 1005-502-576259 (예금주 : 비온뒤무지개)
참가신청 : http://me2.do/G2qvdVvF
문의 : rainbowfoundation.co.kr@gmail.com / 02-322-9374
주최 : 비온뒤무지개재단

죽음과 애도

죽음을 애도하는데 적당한 시간은 없다. 나는 아직도 내 첫 고양이 리카의 죽음이 애통하다. 이제 얼추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몸 한 곳이 강하게 아린다. 정확한 원인을 모른체 떠나보냈지만, 함께 산 시간이 1년 조금 더 되었지만 그렇다. 떠나보내고 그 죽음을 직접 수습했지만서도 그렇다. 사랑과 정을 쏟은 관계를 애도하는 데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 나는 많이 웃고 바람, 보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리카는 여전히 내게 아프고 슬픈 시간이다. 하물며 그 원인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상대를 떠나보냈다면 그 애통함이 더 클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객사가 가장 안 좋은 죽음이라고 했다. 나의 아버지 역시 객사하셨지만 그래도 사고의 원인은 알았다. 그래서 어떤 형태로건 수습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객사인데 그 원인을 제대로 알 수 없다면? 객사한 고인의 육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가늠할 수 있는데 그 육신을 타인에 의해 수습할 수 없다면? 혹은 특정 누군가에게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면서 죽음에 어떤 위계가 발생함을 깨닫고 체득한다면? 사랑하거나 애정을 쏟은 존재의 죽음 자체가 애통한 일이다. 하지만 그 이후의 과정은 그 슬픔을 다양한 방향으로 이끈다. 잘 추스릴 수 있는 애통함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애통함이 될 수도 있다. 애통함에서 원통함이 될 수도 있다.

조선시대 양반 남성의 문화겠지만, 3년상은 꽤나 괜찮은 형식이라고 고민한다. 애정을 쏟은 존재의 죽음을 애도하는데 적어도 3년은 필요하다. 그래서 요즘의 기업이나 단체의 관례는 당혹스럽다. 많은 곳이 부모님 장례식에 사흘, 많아야 닷새 정도의 시간을 준다. 그 사이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껏해야 장례 절차만 치르면 끝나는 시간이다. 애도는 장례식에서 진행되고 끝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장례식이 끝난 다음부터 시작한다. 그런데도 장례식이 끝나면 곧바로 출근할 것을 요구하는 관례는 한국 사회가 죽음을, 애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그나마 출근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 어떤 기업은 책상을 뺀다). 3년 조사 휴가를 줘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3년상을 치뤄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애도할 수 있는 좀 더 긴 시간을 줬으면 한다. 죽음을 애도하는데 충분히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인식했으면 할 뿐이다. 죽음과 슬픔, 애도를 좀 더 내게 가까운 것으로 고민했으면 좋겠다. 휴가 일수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 슬픔, 그리고 애도를 덜 고민하는 혹은 고민하지 않는 현재의 어떤 태도를 재고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현실적으로도 3~5일은 무척 부족한 시간인데 가족이나 동반자가 생을 마감하고 나면 이후 다양한 법적 절차를 겪어야 한다.)
얼추 한 달 전부터 세월호 관련 영상, 그 원인을 추적하는 영상을 찾아보고 있다. 이런저런 추정이 있고 주장이 있지만 여전히 제대로 밝혀진 사실은 없다. 시신 인양조차 정치적 이해에 따라 판단되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후안무치하고 나쁠까 싶다가도, 이제는 정말 죽음과 슬픔도 이윤의 영역으로 바뀐 시대인건가 싶기도 하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귀족정에서 계급정으로 바뀐건가 싶기도 하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면서 애도와 애통함, 그리고 죽음을 대하는 태도마저 그 논리에서 사유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또 한편, 언제나 죽음과 애도는 위계질서에 따른 행위였고 자격을 요하는 감정이란 점을 감안하면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계급정으로 바뀌는 사회에서 발생한 위계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계급만이 아니라, 단순한 정치적 이해만이 아니라 더 복잡한 무언가가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언젠가 세월호 참사, 에이즈, 퀴어의 감정 정치학으로 글을 쓸 수 있을까? 아직도 고민이 짧고 또 짧아 뭐라고 쓰기가 망설여지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서라도 세월호 참사를 퀴어의 감정 정치학으로 설명하며,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싶다.
물론 나는 리카의 죽음을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실패했기에 어떻게 가능할까 싶지만…

강숙자의 참 레즈비언, 정치적 레즈비언 논의 관련

며칠 전 퀴어락에 강숙자의 “레즈비언 여성주의의 비판적 검토 – 한국여성경험과의 대비”란 논문을 등록하고(http://queerarchive.org/bbs/185730) 이를 홍보했다. 하지만 아마도 이 논문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사람 자체가 이제는 매우 적겠다는 고민도 했다. 한때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지만 이후 별달리 언급이 안 되는 논문이기 때문이다.

2001년 11월, 한국여성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이 논문은 발표 이후 상당한 논란을 야기했다. 논란은 이 논문의 기획에서 출발한다. 강숙자는 이 논문에서 “레즈비언 여성이론이 한국여성을 위한 보편의 이론이 아님을 심도 있게 논증하려한다”고 그 의도를 밝히고 있다. 이 기획은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강숙자의 중요한 기획이기도 하다. 레즈비언 여성이론/페미니즘이 단 한 번도 자신을 보편 이론으로 주장하지 않았음에도 강숙자는 보편 이론이 아님을 논증하겠다며 논의를 전개한다. 주요 논리 중 하나는 한국의 유교문화, 전통문화에서 레즈비언 정치학이 맞지 않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참 레즈비언과 정치적 레즈비언의 구분이다. 이런 구분은 논문 발표 이후 논란의 한 축이었다. 강숙자는 참 레즈비언과 정치적 레즈비언을 구분하면서 그 척도가 “에로티시즘의 수용여부”라고 주장한다. “어떤 방법으로든 성관계를 갖는 이들은 그들의 성적 선호가 자연적이고 생물학적임을 고백하고 성역할에서도 기존의 이성애적 모델을 따라서 펨과 부치로 나눈다. 이들과는 달리 정치적 레즈비언들은 성관계는 없어도 이론상으로 레즈비언이즘을 주장하며 더욱 급진적으로 남성 타도에 앞장선다.” 이것이 강숙자가 참 레즈비언과 정치적 레즈비언을 구분하는 공식이다. 그러며 “참 레즈비언들은 동성간의 제도로서의 결혼이 인정되기를 원한다”거나 음양 논리에 따라 “음과 음, 양과 양끼리 조화할 수 없고 이성애가 원칙”이라고 논하거나, 정치적 레즈비언은 분리주의니까 외딴 섬에 가서 실현하라거나, “참 동성애자들이란 대개 남성은 여성적 기질을, 여성은 남성적 기질을 지닌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이 논문이 학회에서 발표되고, 마침 그 자리에 끼리끼리 회원 혹은 비이성애자가 있었기에 즉각 문제가 되었다. 한국여성 성적소수자 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는 며칠 안 지나 [여성신문]의 ‘발언대’에 항의 성명을 발표한다. 정치적 레즈비언과 참 레즈비언 구분 자체, 여성 범주를 비판하는 내용의 성명이었다. 이에 강숙자 역시 [여성신문] ‘발언대’에 “정정당당하게 실명으로” “이론으로” 반박하라며 반박글을 게재한다. 여기에 한국여성학회는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엔 누구나 비판, 지지 등을 할 수 있으며 “‘끼리끼리’ 회원 중 여성학 전공자들은 학회에 등록해서 학회라는 공식적인 채널을 이용하여” 논의를 게진하다는 입장서를 발표하였다. 여성학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끼리끼리는 강숙자의 반박에 재반박하는 글을 2002년 1월 [여성신문]에 게재했다. 아울러 같은 지면에 조순경 교수는 한국여성학회와 강숙자의 반성 없음, 성적소수자에 무지함 등을 비판하는 글을 게재했다. 끼리끼리의 한 회원은 별도로 강숙자를 비판하는 별도의 글을 공개했고, 부산경남 여성이반 인권모임 안전지대 역시 강숙자 등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http://queerarchive.org/bbs/185760)
사건은 대충 이런 식으로 전개되었고 여기까지는 익히 회자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나는 강숙자의 발표문을 등록하며 문득 다른 기록물이 떠올랐다. 얼추 10년 전 헌책방에서 알바를 할 때 강숙자가 쓴 단행본의 서문을 읽은 기억이 났다. 그 책 서문에서 강숙자는 자신은 부당하게 인신공격을 당했고, 학술적 논쟁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해당 서문을 다시 확인하고, 그 단행본에 관련 논의가 있을까 하여 단행본을 확인했다(이 단행본은 며칠 뒤 퀴어락에 등록될 예정이다). 그러다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01년 11월 한국여성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은 그해 6월에 이미 출판한 논문과 관련 있다는 점이었다. 그 논문이 실린 단행본을 다시 찾았고 그 책엔 “민족 공동체 여성이론을 위한 시론: 레즈비언 여성주의의 비판을 통하여”란 강숙자의 글이 실려 있었다(http://queerarchive.org/bbs/185753). 한국여성학회 학술대회 발표문은 이 글의 축약본이었다. 시론엔 훨씬 긴 논의가 포함되어 있었고 무엇보다도 작은 챕터가 빠져있었다. 빠진 내용 중 일부엔 군가산점제와 관련한 논의가 포함되어 있다. 군가산점제와 관련하여 강숙자는 “평등권 실현을 위해 가산점을 폐지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남이 가진 권리, 그것도 그들의 희생의 대가로 얻은 권리를, 그들의 희생의 결과 안녕을 누릴 수 있었던 자들이 시비를 걸어 빼앗아 가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가산점 폐지를 요구하기 이전에 자신들도 가산점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했어야 옳다.”(674) 주장했다.
나는 군가산점제와 관련한 강숙자의 주장을 읽는 순간 ‘아…’하고 깨달았다. 이것이 강숙자의 입장이고 위치였다. 강숙자가 한국 군대 제도가 어떤 맥락에서 등장했는지, 군가산점제가 어떤 이유로 등장했고 이것이 어떤 복잡한 차별을 야기하는지에 무지한 문제가 아니다. 기존의 권력, 권리는 유지한 상태에서 그것의 구조적 문제를 제기하기보다는 그것을 ‘나에게도 달라’고 요구하는 것, ‘나도 그 특권에 끼워달라’ 주장하는 것이 강숙자의 입장이었다. (로즈마리 통 식으로 구분하자면 자유주의 페미니즘 입장일 것이다.) 정확하게 그 입장에서, 이성애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인식하는 상황에서 레즈비언 페미니즘은 한국에 안 맞는 이론일 수밖에 없다. 강숙자 입장에서 ‘레즈비언’이 주장할 수 있는 것, 유일하게 정당한 것은 ‘우리를 이 사회에 끼워달라’다. 이성애주의, 애성애규범으로 구축된 사회를 재구성하자는 주장은 가당찮은 것이다.
강숙자의 글을 더 찾으며 확인한 건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강숙자가 급진주의 페미니즘 혹은 레즈비언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작업은 2000년대 들어, 2001년에 쓴 논문이 시작이 아니었다. 강숙자는 1980년대 후반 즈음부터 급진주의 페미니즘 혹은 레즈비언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작업을 했다. 강숙자가 2004년에 쓴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한국 여성운동 이념정립을 위한 시론”인데 이 제목은 강숙자가 1980년대 중반 어느 여성단체의 공모 논문에서 가작으로 선정된 논문과 동일하다. 이때부터 강숙자는 한국의 여성주의 이론을 정립하려 했고 그래서 강숙자의 글을 보면 언제나 조선 유교 문화, 음양논리가 거의 항상 등장한다. 1995년에 출판한 단행본에서 강숙자는 파이어스톤을 중심으로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하고 레즈비언 페미니즘이 한국 여성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글을 썼다(이 단행본 역시 며칠 뒤 퀴어락에 등록될 예정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2001년의 논문과 발표문이 나왔고, 이후의 박사학위논문과 단행본에서도 이런 논의가 이어진다. 이런 어맹뿌 같은 성실함이라니.
그리고 이런 일련의 작업을 보며 깨달은 것은 ‘보편 이론’은 강숙자 자신의 욕망이란 점이다. 강숙자는 한국여성학회 발표문에서 “레즈비언 여성이론이 한국여성을 위한 보편의 이론이 아님” 입증하겠다고 밝혔다. 이 말이 함의하는바, 그리고 강숙자가 1980년대부터 욕망했던 것은 ‘한국 여성’을 위한 한국만의 어떤 보편 이론을 만드는 것이다. 그 한국 여성이 누가 속하는지는 물론 사유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레즈비언은 한국 여성이란 망상적 범주에서 별 문제 없이 배제된다. 누구도 레즈비언 페미니즘이 어떤 집단을 위한 보편이론이라고 주장하지 않음에도 강숙자에겐 그것이 중요했기에 ‘보편 이론이 아님’을 입증하겠다는 기획이 가능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강숙자의 글을 추적하며 한 가지 궁금했다. 2001년 6월에 출판된 글은 한 교수의 정년퇴임 기념논문집에 실린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엔 한국여성학회 회원도 있고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학자도 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와 상관없이 강숙자의 글은 걸러지지 않고 단행본에 실렸다. 개별 필자는 서로의 글을 사전 검토 안 했을 수 있다. 많은 연구자가 참가했으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편집위원은 검토를 했을 것이다. 편집위원엔 분명 여성학과 교수가 있음에도 그 글은 걸러지지 않았다. 그 글의 주장에 어느 정도는 동조했다고 의심해도 괜찮을까? 마찬가지로 한국여성학회는 자신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입장서를 발표했다. 그렇다면 학술대회를 조직하는 연구위원회에서는 그 글에 아무런 문제 의식이 없었던 것일까? 만약 레즈비언 ‘여성’이 아니라 비트랜스-이성애여성을 그렇게 비판하는 글, 한국 상황에 맞지 않다고 주장하는 글을 썼어도 그냥 발표시켰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최소한 발표 전에는 거르지 못 했다고 해도 발표 이후엔 어떤 강력한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강숙자 사건에서 한국여성학회는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는 말만 했다.
참고로 강숙자 발표문 논쟁은 논쟁으로만 끝나진 않았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2004년 한국여성학회는 분과 세션 중 하나로 “성적 소수자와 차이의 정치학”에서 동성애, 레즈비언 혹은 여성 성적소수자 이슈를 다루기 시작한다. 이후론 꾸준히 관련 이슈를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강숙자 발표문을 둘러싼 논쟁은 좀 더 의미있게 살펴볼만한 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