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등: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 지원한 반인권 영화

E와 함께 영화 정지우 감독의 [4등]을 봤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 지원을 했음은 극장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수영을 좋아하는 준호(유재상 분)는 어머니 정애(이항나 분)의 닥달로 늘 스트레스를 받으며 수영 대회에만 나가면 4등을 한다. 이에 정애는, 과거 수영 천재란 소리를 들었던 국가대표 출신이며 태능선수촌에서 구타에 항의하며 튀쳐나온 광수(박해준 분)에게 준호의 코치를 부탁한다. 광수는 준호에게 수영을 가르치지만 구타와 폭력이 반복되고 준호는 이런 상황에 결국 수영을 그만둔다. 모두가 준호의 수영을 포기했을 때 준호는 다시 수영을 시작하고 정애의 닥달도 없고, 광수의 폭력적 코칭도 없이 혼자 수영을 연습했을 때 결국 수영대회에서 1등을 한다. 그러니까 그냥 주인공 준호의 성장담, 흔한 소년의 성장담을 담은 영화다. 소년의 성장담에 특별한 관심이 있지 않다면 굳이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나는 이 영화가 인권위에서 주장하는 투명한 인권 개념엔 부합할지 몰라도 내가 사유하는 인권 개념과는 무척 동떨어진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가장 단적인 예는 젠더 감수성의 상실이자 성역할 고정관념의 지독한 반복이다.
어머니 역의 정애는 영화 내내 아들의 성공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준호가 수영을 하겠다고 할 땐 준호가 어떻게든 메달을 따기만을 바라고, 그래서 대회에 나갈 때마다 4등을 하는 준호에게 화를 내고 준호가 수영을 더 잘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한다. 그래서 광수란 코치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조언을 들었음에도 감당하겠다며 광수를 코치로 받아들인다. 준호가 수영을 포기한 뒤에 며칠을 앓아 누운 정애는 준호의 동생 기호에게 관심을 돌린다. 기호를 각종 학원에 보내고 사랑을 확인받고, 기호에게 “엄마의 희망”이란 점을 반복 확인시킨다. 헬리콥터맘이란 말로 몇 년 전부터 널리 회자된 모습이다. 그런데 정애가 왜 그렇게 자식의 성공에 집착 혹은 매달릴 수밖에 없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가정 밖의 경력이 단절된 ‘전업주부’에게 자식의 성공이 무슨 의미인지, 사회나 이성애규범적 가족이 어머니-여성에게 자식 양육에 있어 무엇을 요구/강압하는지 조금도 설명하지 않는다. 이것은 구구절절한 설명도 필요없다. 한두 장면만으로도 충분한 내용임에도 이를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식을 억압하고 독점하고 소유하고 조정하는 어머니/괴물로 재현된다. 인권영화를 표명하는 영화에서 어머니 역의 정애는 여타 많은 영화에서 어머니/여성을 재현하듯 똑같이, 가장 태만하고 나쁜 방식인 어머니/괴물로 등장한다.
여기서 무슨 인권이 존재하는가? 억압적 교육 제도, 1등만 강요하는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서 여성 젠더는 여전히 괴물로 그려져도 괜찮은 것인가?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정애의 사회적 맥락을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자식을 공부 혹은 성공의 도구로 만드는 현재의 상황, 10대에게 대학만을 강압하는 현재 상황이 마치 어머니/여성의 잘못으로 발생한 것처럼 이해하는데 동조하고 그런 이해를 재생산한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영화에서 정애는 그 이름이 제대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머니로 등장하거나 준호엄마로 등장할 뿐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어머니/여성을 이해하는 감독과 인권위의 태도인지도 모른다.
그럼 아버지는 언제 등장하는가? 영훈(최무성 분)이 기자가 아니라 아버지로 제대로 등장하는 장면은 준호가 광수 감독을 만난 뒤 참가한 대회에서 2등을 하여 축하 파티를 할 때다. 물론 영화 초반에 영훈은 비중있게 등장한다. 하지만 그때 영훈은 아버지가 아니라 기자로 등장한다. 축하 파티를 하기 전에도 아버지 역으로 영훈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때 영훈은 자식의 교육에 별 관심이 없는, 그저 정애에게 영훈을 너무 닥달하지 말라고 짜증내는 모습 정도다. 사실 이건 전형적 아버지 역할의 모습이며 아버지 역할에 충실한 모습이다. 그리하여 준호가 2등으로 은메달을 따기 전까지 영훈은 사실상 집에서 부재한다. 그렇게 등장한 영훈은 준호가 구타 당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때 해결 방법은 코치 광수를 계약해지하는 것이 아니라 웃돈을 주며 뒷거래를 하는 방식이다. 한 번만 더 구타를 하면 기사로 싣겠다고. 이것은 사실 준호의 어려움을 조금도 해결하지 않는 방식이지만 마치 해결한 것만 같은 착시를 야기한다. 영화에서 나름 예리한 장면인데 아버지는 가정에서 발생하는 일을 해결하지 않는다. 해결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뿐. 영훈은 언제든 이렇게 할 수 있다. 영훈은 준호가 취미로 수영을 하라고 말할 수 있고, 정애에게 준호를 닥달하지 말하고 말할 수 있다. 영훈은 준호에 의해 평가받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준호가 잘 되면 그것은 영훈의 덕으로 칭찬받을 수 있다. 준호가 잘못되면 그것은 정애/어머니의 잘못으로 회자되지 영훈의 경력이나 삶에 결정적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이렇게 영훈은 준호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준호가 모든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아버지 역할의 전형과 신화를 반복한다. 영화가 태만하고 진부한 또 하나의 이유며, 이 영화가 인권영화인지 의심하도록 하는 장면이다.
비록 이런 문제(내 입장에선 치명적 문제)가 있다고 해도 ‘4등’이라는 기획에 잘 부합한다면 이 영화는 그 나름의 가치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한계만 존재하는 텍스트는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그런 가치를 지키지 않는다. 이 영화가 가장 반인권적이라고 판단한 지점, 아니 반인권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 영화가 자신의 주제 자체를 배신하는 지점은 결말에 있다.
준호는 어머니 정애와 코치 광수에게 벗어나기 위해 수영을 그만둔다. 하지만 다시 수영이 하고 싶은 준호는 결국 혼자 수영을 하게 된다. 광수에게 찾아가 다시 코치를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광수가 준호에게 혼자 하면 금메달도 딸 수 있다는 조언을 줬기 때문이기도 하다. 폭력 코치 없이 수영 연습을 한 준호는 수영대회에 출전한다. 그때부터 영상 자체는 무척 예쁘다. 영화 내내 준호가 수영할 때면, 특히나 즐겁게 수영할 때면 라인을 넘나드는 모습으로 재현하는데 마지막 수영 역시 라인을 넘나드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준호가 수영을 즐기고 있음을 표현한 장면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영 대회가 끝나고 결과가 나온다. 결과는 총 세 번에 걸쳐 나온다. 준호를 비롯한 선수들이 결승라인에 도착하는 장면이 첫 번째. 여기선 누가 몇 등인지 알 수 없다. 두 번째는 준호가 수경을 쓴 상태로 경기안내판을 바라보는 모습. 하지만 수경을 쓰고 있어서 알 수가 없다. 세 번째는 수영장에서 나와 걸어가는데 옆에 있던 다른 아이가 ‘형 1등하면 무슨 기분이에요?’라고 묻고, 곧이어 전광판을 확인하는 모습이다. 그곳에서 압도적인 시간차로 1등을 했다고 나온다. 그리고 억압과 폭력이 점철된 수영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는 표정이 등장한다.
나는 이 영화가 정말로 자신의 주제 의식에 투철했다면 1등했다는 장면은 빼야 했다고 믿는다. 수경을 써서 결과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이 원하는 수영을 했다며 자신감을 갖는 표정이 나와야 했다고 믿는다. 어머니 정애의 닥달, 1등을 하고 싶으면 체벌도 정당하다는 광수의 체벌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열심히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1등의 결과일 필요는 없다. 사실 영화 후반부터 문제는 발생한다. 준호가 마지막으로 광수를 찾아갔을 때 준호는 자신이 1등을 해야만 수영을 지속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운동을 하는데 그것이 왜 1등이어야 하는가? 1등만이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 지속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근거인가? 이것은 여전히 1등주의 혹은 어떻게든 메달을 획득해야 한다는 사회적 강박/요청에 부합하고 동조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1등을 못 했고, 1등을 하고 싶기에 1등을 하고 싶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1등만이 수영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아니다. 여기서 영화의 결론은 예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재능, 하고 싶은 일은 1등이란 성과로 납득되지 않는다. 부모 혹은 어머니의 닥달, 코치의 폭력(사랑의 매로 포장된다)으로 상징하는 성과지상주의, 성과를 위해 무엇이든 해도 정당하다는 사회적 태도가 없으면 사람들은 더 잘 할 것이다. 나 역시 이런 인식엔 일정 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그 결과가 1등일 필요는 없다. E와 이야기했듯 차라리 결과가 나오려면 4등이 나았을 것이다. 4등이고 준호가 만족하는 표정을 짓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내버려두면, 알아서 하게 두면 결국 1등한다는 결과는 1등을 못 하거나 그런 등수를 원하지 않는 이들에겐 결코 유쾌하지 않은 결론이다. 메달을 강요하는 정애나 1등만 강압하는 광수와 영화의 결론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영화 자체는 별로였지만 영화 관람 내내 즐거웠다. 내가 이제까지 영화를 관람하며 이보다 관람 경험이 즐거웠던 적이 없었던 듯하다. 영화관이 특별히 더 좋았던 건 아니다. 종종 이용하는 시설인데 그럴리가. 그저 영화관에 나와 E 둘 뿐이었다. 영화를 보내는 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면서 관람할 수 있었다. 영화관에서 금지하는 태도, 발을 앞의자에 올리는 자세도 취할 수 있었다. 정말 편하게 이 장면 좋다, 저 장면 별로다와 같은 이야기를 부담없이 마구 떠들면서 관람 했더니 영화 내용과 별개로 만족도가 무척 높았다. 다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

세계트랜스젠더보건의료전문가협회(WPATH) 건강관리실무표준(SOC) 한국어판 발간기념 발표회 [트랜스젠더와 의료]

세계트랜스젠더보건의료전문가협회(WPATH) 건강관리실무표준(SOC) 한국어판 발간기념 발표회
<트랜스젠더와 의료>
지난 1년간 비온뒤무지개재단은 트랜스젠더의 의료/진료 쳬계이 아직은 미비한 한국 보건의료계에 더 많은 정보를 알리고자, 트랜스젠더와 관련된 세계적 전문기관인 세계트랜스젠더보건의료전문가협회가 제작하여 트랜스젠더 의료 보건 가이드를 제공하고 있는 건강관리실무표준(SOC)를 번역해왔습니다
1년여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한국어판이 발간되어 이를 기념하며, 전문가들을 모시고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와 의료를 이야기 하는 발표회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일시 : 2016년 5월 1일 오후 2시
장소 : 순천향대학교병원 서울병원 신관 1층 청원홀
발표자
▶ 최인광 원장, 정신과 전문의 – 영국의 젠더 클리닉과 트랜스젠더 진료
▶ 이은실 교수, 순천향대학교병원 산부인과 – 건강관리실무표준 제7판 개괄
▶ 이승현 박사, 법학박사, 트랜스젠더인권활동가 – 트랜스젠더, 의료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 한국적 상황의 맥락에서
참가비 : 10,000원(건강관리실무표준 한국어판 인쇄본과 발표 자료 제공)
참가비 입금 : 우리은행 1005-502-576259 (예금주 : 비온뒤무지개)
참가신청 : http://me2.do/G2qvdVvF
문의 : rainbowfoundation.co.kr@gmail.com / 02-322-9374
주최 : 비온뒤무지개재단

죽음과 애도

죽음을 애도하는데 적당한 시간은 없다. 나는 아직도 내 첫 고양이 리카의 죽음이 애통하다. 이제 얼추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몸 한 곳이 강하게 아린다. 정확한 원인을 모른체 떠나보냈지만, 함께 산 시간이 1년 조금 더 되었지만 그렇다. 떠나보내고 그 죽음을 직접 수습했지만서도 그렇다. 사랑과 정을 쏟은 관계를 애도하는 데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 나는 많이 웃고 바람, 보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리카는 여전히 내게 아프고 슬픈 시간이다. 하물며 그 원인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상대를 떠나보냈다면 그 애통함이 더 클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객사가 가장 안 좋은 죽음이라고 했다. 나의 아버지 역시 객사하셨지만 그래도 사고의 원인은 알았다. 그래서 어떤 형태로건 수습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객사인데 그 원인을 제대로 알 수 없다면? 객사한 고인의 육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가늠할 수 있는데 그 육신을 타인에 의해 수습할 수 없다면? 혹은 특정 누군가에게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면서 죽음에 어떤 위계가 발생함을 깨닫고 체득한다면? 사랑하거나 애정을 쏟은 존재의 죽음 자체가 애통한 일이다. 하지만 그 이후의 과정은 그 슬픔을 다양한 방향으로 이끈다. 잘 추스릴 수 있는 애통함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애통함이 될 수도 있다. 애통함에서 원통함이 될 수도 있다.

조선시대 양반 남성의 문화겠지만, 3년상은 꽤나 괜찮은 형식이라고 고민한다. 애정을 쏟은 존재의 죽음을 애도하는데 적어도 3년은 필요하다. 그래서 요즘의 기업이나 단체의 관례는 당혹스럽다. 많은 곳이 부모님 장례식에 사흘, 많아야 닷새 정도의 시간을 준다. 그 사이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껏해야 장례 절차만 치르면 끝나는 시간이다. 애도는 장례식에서 진행되고 끝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장례식이 끝난 다음부터 시작한다. 그런데도 장례식이 끝나면 곧바로 출근할 것을 요구하는 관례는 한국 사회가 죽음을, 애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그나마 출근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 어떤 기업은 책상을 뺀다). 3년 조사 휴가를 줘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3년상을 치뤄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애도할 수 있는 좀 더 긴 시간을 줬으면 한다. 죽음을 애도하는데 충분히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인식했으면 할 뿐이다. 죽음과 슬픔, 애도를 좀 더 내게 가까운 것으로 고민했으면 좋겠다. 휴가 일수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 슬픔, 그리고 애도를 덜 고민하는 혹은 고민하지 않는 현재의 어떤 태도를 재고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현실적으로도 3~5일은 무척 부족한 시간인데 가족이나 동반자가 생을 마감하고 나면 이후 다양한 법적 절차를 겪어야 한다.)
얼추 한 달 전부터 세월호 관련 영상, 그 원인을 추적하는 영상을 찾아보고 있다. 이런저런 추정이 있고 주장이 있지만 여전히 제대로 밝혀진 사실은 없다. 시신 인양조차 정치적 이해에 따라 판단되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후안무치하고 나쁠까 싶다가도, 이제는 정말 죽음과 슬픔도 이윤의 영역으로 바뀐 시대인건가 싶기도 하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귀족정에서 계급정으로 바뀐건가 싶기도 하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면서 애도와 애통함, 그리고 죽음을 대하는 태도마저 그 논리에서 사유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또 한편, 언제나 죽음과 애도는 위계질서에 따른 행위였고 자격을 요하는 감정이란 점을 감안하면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계급정으로 바뀌는 사회에서 발생한 위계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계급만이 아니라, 단순한 정치적 이해만이 아니라 더 복잡한 무언가가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언젠가 세월호 참사, 에이즈, 퀴어의 감정 정치학으로 글을 쓸 수 있을까? 아직도 고민이 짧고 또 짧아 뭐라고 쓰기가 망설여지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서라도 세월호 참사를 퀴어의 감정 정치학으로 설명하며,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싶다.
물론 나는 리카의 죽음을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실패했기에 어떻게 가능할까 싶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