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숙자의 참 레즈비언, 정치적 레즈비언 논의 관련

며칠 전 퀴어락에 강숙자의 “레즈비언 여성주의의 비판적 검토 – 한국여성경험과의 대비”란 논문을 등록하고(http://queerarchive.org/bbs/185730) 이를 홍보했다. 하지만 아마도 이 논문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사람 자체가 이제는 매우 적겠다는 고민도 했다. 한때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지만 이후 별달리 언급이 안 되는 논문이기 때문이다.

2001년 11월, 한국여성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이 논문은 발표 이후 상당한 논란을 야기했다. 논란은 이 논문의 기획에서 출발한다. 강숙자는 이 논문에서 “레즈비언 여성이론이 한국여성을 위한 보편의 이론이 아님을 심도 있게 논증하려한다”고 그 의도를 밝히고 있다. 이 기획은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강숙자의 중요한 기획이기도 하다. 레즈비언 여성이론/페미니즘이 단 한 번도 자신을 보편 이론으로 주장하지 않았음에도 강숙자는 보편 이론이 아님을 논증하겠다며 논의를 전개한다. 주요 논리 중 하나는 한국의 유교문화, 전통문화에서 레즈비언 정치학이 맞지 않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참 레즈비언과 정치적 레즈비언의 구분이다. 이런 구분은 논문 발표 이후 논란의 한 축이었다. 강숙자는 참 레즈비언과 정치적 레즈비언을 구분하면서 그 척도가 “에로티시즘의 수용여부”라고 주장한다. “어떤 방법으로든 성관계를 갖는 이들은 그들의 성적 선호가 자연적이고 생물학적임을 고백하고 성역할에서도 기존의 이성애적 모델을 따라서 펨과 부치로 나눈다. 이들과는 달리 정치적 레즈비언들은 성관계는 없어도 이론상으로 레즈비언이즘을 주장하며 더욱 급진적으로 남성 타도에 앞장선다.” 이것이 강숙자가 참 레즈비언과 정치적 레즈비언을 구분하는 공식이다. 그러며 “참 레즈비언들은 동성간의 제도로서의 결혼이 인정되기를 원한다”거나 음양 논리에 따라 “음과 음, 양과 양끼리 조화할 수 없고 이성애가 원칙”이라고 논하거나, 정치적 레즈비언은 분리주의니까 외딴 섬에 가서 실현하라거나, “참 동성애자들이란 대개 남성은 여성적 기질을, 여성은 남성적 기질을 지닌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이 논문이 학회에서 발표되고, 마침 그 자리에 끼리끼리 회원 혹은 비이성애자가 있었기에 즉각 문제가 되었다. 한국여성 성적소수자 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는 며칠 안 지나 [여성신문]의 ‘발언대’에 항의 성명을 발표한다. 정치적 레즈비언과 참 레즈비언 구분 자체, 여성 범주를 비판하는 내용의 성명이었다. 이에 강숙자 역시 [여성신문] ‘발언대’에 “정정당당하게 실명으로” “이론으로” 반박하라며 반박글을 게재한다. 여기에 한국여성학회는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엔 누구나 비판, 지지 등을 할 수 있으며 “‘끼리끼리’ 회원 중 여성학 전공자들은 학회에 등록해서 학회라는 공식적인 채널을 이용하여” 논의를 게진하다는 입장서를 발표하였다. 여성학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끼리끼리는 강숙자의 반박에 재반박하는 글을 2002년 1월 [여성신문]에 게재했다. 아울러 같은 지면에 조순경 교수는 한국여성학회와 강숙자의 반성 없음, 성적소수자에 무지함 등을 비판하는 글을 게재했다. 끼리끼리의 한 회원은 별도로 강숙자를 비판하는 별도의 글을 공개했고, 부산경남 여성이반 인권모임 안전지대 역시 강숙자 등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http://queerarchive.org/bbs/185760)
사건은 대충 이런 식으로 전개되었고 여기까지는 익히 회자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나는 강숙자의 발표문을 등록하며 문득 다른 기록물이 떠올랐다. 얼추 10년 전 헌책방에서 알바를 할 때 강숙자가 쓴 단행본의 서문을 읽은 기억이 났다. 그 책 서문에서 강숙자는 자신은 부당하게 인신공격을 당했고, 학술적 논쟁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해당 서문을 다시 확인하고, 그 단행본에 관련 논의가 있을까 하여 단행본을 확인했다(이 단행본은 며칠 뒤 퀴어락에 등록될 예정이다). 그러다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01년 11월 한국여성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은 그해 6월에 이미 출판한 논문과 관련 있다는 점이었다. 그 논문이 실린 단행본을 다시 찾았고 그 책엔 “민족 공동체 여성이론을 위한 시론: 레즈비언 여성주의의 비판을 통하여”란 강숙자의 글이 실려 있었다(http://queerarchive.org/bbs/185753). 한국여성학회 학술대회 발표문은 이 글의 축약본이었다. 시론엔 훨씬 긴 논의가 포함되어 있었고 무엇보다도 작은 챕터가 빠져있었다. 빠진 내용 중 일부엔 군가산점제와 관련한 논의가 포함되어 있다. 군가산점제와 관련하여 강숙자는 “평등권 실현을 위해 가산점을 폐지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남이 가진 권리, 그것도 그들의 희생의 대가로 얻은 권리를, 그들의 희생의 결과 안녕을 누릴 수 있었던 자들이 시비를 걸어 빼앗아 가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가산점 폐지를 요구하기 이전에 자신들도 가산점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했어야 옳다.”(674) 주장했다.
나는 군가산점제와 관련한 강숙자의 주장을 읽는 순간 ‘아…’하고 깨달았다. 이것이 강숙자의 입장이고 위치였다. 강숙자가 한국 군대 제도가 어떤 맥락에서 등장했는지, 군가산점제가 어떤 이유로 등장했고 이것이 어떤 복잡한 차별을 야기하는지에 무지한 문제가 아니다. 기존의 권력, 권리는 유지한 상태에서 그것의 구조적 문제를 제기하기보다는 그것을 ‘나에게도 달라’고 요구하는 것, ‘나도 그 특권에 끼워달라’ 주장하는 것이 강숙자의 입장이었다. (로즈마리 통 식으로 구분하자면 자유주의 페미니즘 입장일 것이다.) 정확하게 그 입장에서, 이성애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인식하는 상황에서 레즈비언 페미니즘은 한국에 안 맞는 이론일 수밖에 없다. 강숙자 입장에서 ‘레즈비언’이 주장할 수 있는 것, 유일하게 정당한 것은 ‘우리를 이 사회에 끼워달라’다. 이성애주의, 애성애규범으로 구축된 사회를 재구성하자는 주장은 가당찮은 것이다.
강숙자의 글을 더 찾으며 확인한 건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강숙자가 급진주의 페미니즘 혹은 레즈비언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작업은 2000년대 들어, 2001년에 쓴 논문이 시작이 아니었다. 강숙자는 1980년대 후반 즈음부터 급진주의 페미니즘 혹은 레즈비언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작업을 했다. 강숙자가 2004년에 쓴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한국 여성운동 이념정립을 위한 시론”인데 이 제목은 강숙자가 1980년대 중반 어느 여성단체의 공모 논문에서 가작으로 선정된 논문과 동일하다. 이때부터 강숙자는 한국의 여성주의 이론을 정립하려 했고 그래서 강숙자의 글을 보면 언제나 조선 유교 문화, 음양논리가 거의 항상 등장한다. 1995년에 출판한 단행본에서 강숙자는 파이어스톤을 중심으로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하고 레즈비언 페미니즘이 한국 여성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글을 썼다(이 단행본 역시 며칠 뒤 퀴어락에 등록될 예정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2001년의 논문과 발표문이 나왔고, 이후의 박사학위논문과 단행본에서도 이런 논의가 이어진다. 이런 어맹뿌 같은 성실함이라니.
그리고 이런 일련의 작업을 보며 깨달은 것은 ‘보편 이론’은 강숙자 자신의 욕망이란 점이다. 강숙자는 한국여성학회 발표문에서 “레즈비언 여성이론이 한국여성을 위한 보편의 이론이 아님” 입증하겠다고 밝혔다. 이 말이 함의하는바, 그리고 강숙자가 1980년대부터 욕망했던 것은 ‘한국 여성’을 위한 한국만의 어떤 보편 이론을 만드는 것이다. 그 한국 여성이 누가 속하는지는 물론 사유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레즈비언은 한국 여성이란 망상적 범주에서 별 문제 없이 배제된다. 누구도 레즈비언 페미니즘이 어떤 집단을 위한 보편이론이라고 주장하지 않음에도 강숙자에겐 그것이 중요했기에 ‘보편 이론이 아님’을 입증하겠다는 기획이 가능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강숙자의 글을 추적하며 한 가지 궁금했다. 2001년 6월에 출판된 글은 한 교수의 정년퇴임 기념논문집에 실린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엔 한국여성학회 회원도 있고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학자도 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와 상관없이 강숙자의 글은 걸러지지 않고 단행본에 실렸다. 개별 필자는 서로의 글을 사전 검토 안 했을 수 있다. 많은 연구자가 참가했으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편집위원은 검토를 했을 것이다. 편집위원엔 분명 여성학과 교수가 있음에도 그 글은 걸러지지 않았다. 그 글의 주장에 어느 정도는 동조했다고 의심해도 괜찮을까? 마찬가지로 한국여성학회는 자신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입장서를 발표했다. 그렇다면 학술대회를 조직하는 연구위원회에서는 그 글에 아무런 문제 의식이 없었던 것일까? 만약 레즈비언 ‘여성’이 아니라 비트랜스-이성애여성을 그렇게 비판하는 글, 한국 상황에 맞지 않다고 주장하는 글을 썼어도 그냥 발표시켰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최소한 발표 전에는 거르지 못 했다고 해도 발표 이후엔 어떤 강력한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강숙자 사건에서 한국여성학회는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는 말만 했다.
참고로 강숙자 발표문 논쟁은 논쟁으로만 끝나진 않았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2004년 한국여성학회는 분과 세션 중 하나로 “성적 소수자와 차이의 정치학”에서 동성애, 레즈비언 혹은 여성 성적소수자 이슈를 다루기 시작한다. 이후론 꾸준히 관련 이슈를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강숙자 발표문을 둘러싼 논쟁은 좀 더 의미있게 살펴볼만한 주제다.

잡담

ㄱ.

지난 주말 부산에 갔다왔다. 어쩐지 4월엔 부산에 총 세번을 가는구나.
ㄴ.
지난주 화요일부터 계속 두통이다. 극심하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통증이다. 어쩐지 약도 별무소요이라 그냥 약도 안 먹고 있다.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화요일 약 타러 병원 갔다가 혈압을 쟀을 때 가장 낮은 혈압이 54였다. 원래 기립성저혈압이긴 하지만 이렇게 떨어진 적은 없는데… 근 1~2년 만에 어머니는 내게 얼굴에 핏기가 없다고 하셨다. 이유를 모르겠다.
ㄷ.
이성애 연구는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아닌 사람이 가장 잘 할 수 있다는 고민을 한다. 비이성애자-비동성애자라면 무조건 잘 한다가 아니라 인식론적 위치, 범주 상의 위치가 어떤 첨예한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즉 인식론적 첨예한 성찰과 고민을 한다면 그렇다는 뜻이다. 어차피 그냥 얻어지는 성찰이나 앎은 없으니까.
ㄹ.
할 일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했는데, 두어 시간을 투자해서 했는데 모두 날라갔다. 허허허… 쀼익…
ㅁ.
3주 넘게 덕질을 못 하고 있다. 어쩐지 분주하고 바쁘니 덕질할 시간도 안 난다.
ㅂ.
여름과 추석 지나서 함께 기획한 강좌(두 가지 다른 종류의 것)를 진행할 듯하다. 기대해도 좋을 듯 하지만 아직 최종 확정이 안 되어서 그냥 이 정도의 언질만… (하기는 한다.)

조지 워싱턴의 벚나무 사건은 교훈담이 아니다

아마 초등학생 때로 기억한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짐작은 가지만) 미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어린 시절 일화를 배웠다. 조지는 아버지에게 도끼를 선믈 받고 나서 그 도끼를 사용하고 싶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어린 벚나무(혹은 체리나무)를 시험삼아 모두 베었다. 나중에 벚나무가 잘려나간 모습을 조지의 아버지는 그것을 다른 어디서도 없는 귀한 것이라며 대노했다. 조지는 망설이다 아버지에게 자신이 그랬다고 고백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언제 화를 냈냐는 닷 표정이 바뀌더니 거짓말을 하지 않아 잘 했다며 칭찬을 한다. 이 이야기의 규정된/의도된 교훈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 사실/진실을 말하면 잘못을 용서받는다는 것이다.

일단 규정된 교훈은 현실 경험을 통해 실패한다. 싸닥션과 함께 얻어맞고 집에서 쫓겨나겠지. 이게 내가 아는 현실이다. 한국 법치 현실은 이것보다 더 가혹하다. 그런데 E와 함께 나눈 이야기는 이런 측면이 아니다. 조지 워싱턴의 벚나무 절단 사건은 인종 정치와 젠더 정치가 얽힌 이야기다.
만약 그 벚나무를 흑인노예가 절단하고서 사실대로 말했다면 그래도 조지의 아버지는 칭찬했을까? 혹은 인디언이 그랬다고 했을 때도 관대하게 용서하고 칭찬했을까?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고민한다. 즉각 죽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조지는 어쨌거나 그 아버지와 같은 백인이었다.
다른 한편, 만약 부인이 그랬다고 해도 무사했을까? 딸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랬어도 그 딸을 칭찬했을까? 절대 아니라고 고민한다. 죽이거나 죽이진 않더라도 사단이 났을 것이다.
그러니까 조지는 그 아버지와 같은 인종의 아들이었기에 칭찬받았지 그렇지 않았다면 성립하기 힘든, 아마도 성립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냥 “오구, 내 아들 우쭈쭈”하는 이야기다. 교훈담이 아니라 섬뜩한 이야기다. 차별로 점철된 시대사를 암시하는 에피소드에 더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