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 성폭력, 그리고 정체성 구성

요즘 정신이 없긴 없나보다. 며칠 전엔 받은 걸 안 받았다고 해서 상대방을 당황하게 했고, 어제는 얼추 일주일 전부터 가겠다고 다짐하고 계획을 세운 공연에 못 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었다. 정말 가고 싶었는데… ㅠ_ㅠ

이제 열흘 정도 지난 것 같다. 그때 이후로, 컴퓨터 앞에 앉으면 어김없이 하는 검색어가 있고, 수시로 논문 검색 사이트에서 관련 검색을 하지만, 마땅한 자료를 못 찾고 있다. 자신을 대신할 만한 어떤 글을 찾고 있는데 딱히 몸에 드는 글을 못 찾고 있달까. 그날, 그 전화를 받는 순간, 떠오른 “루인”이라고 불리는 이의 13년 전 경험이나 7년 전 경험을 설명하려고 애쓰면서.

아마 여성학 수업을 듣고, 페미니즘 공부를 하면서 관심이 가장 많이 쏟은 분야는 성폭력이었다. 의도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수업시간에 발표를 하게 되면 선택하는 주제는 성폭력이었고, 기말시험으로 레포트를 제출할 때에도 주제는 성폭력이었다. 무언가를 설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면서도 모른 척 했거나, 정말 모르면서 아는 척 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려나 뭔가를 설명하고 싶었지만, 당시 읽은 자료의 상당수가, 당시 들은 수업의 상당수가 얘기하는 논의들로는 “루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의 경험을 설명할 수 없었던 건 분명했다. 하긴, 그 시절엔 설명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도대체 무얼 고민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지경이지만, 어쨌거나 그랬다.

얼추 2년 전부터 트랜스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그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고민의 방향을 모색하면서, 어떤 주제엔 집중했고 어떤 주제는 잊곤 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읽은 글의 상당수는 젠더이론이었고, 혐오범죄와 관련한 글일 때도 여러 혐오 범죄 중 하나로(일종의 사례로), 성폭력이나 구타 등을 얘기했지, 이런 폭력들이 정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이런 경험들과 트랜스 정체성이 어떤 식으로 상호 작용하는지에 대한 글은 읽은 적이 거의 없었다. 물론 자신이 트랜스라는 걸 말한 후 경험하는 혐오범죄로서 성폭력을 언급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긴 하지만, 거의 모든 글이 성폭력을 혐오범죄의 하나로*만* 다루는 경향들이 있다. 하지만 성폭력 경험을, 트랜스들이, 맥락이 다른 mtf/트랜스여성이나 ftm/트랜스남성들이 그저 혐오범죄로*만* 경험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갑갑했다.

지금까지 읽은 글들을 떠올리고, 새롭게 자료를 검색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폭력은 혐오범죄의 범주로만 설명하는 경향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희망을 걸었던, 홀리 데버의 [FTM]이란 책도, 거의 700페이지에 달해 FTM정체성 구성을 이야기 하지만, 성폭력과 관련해서 자세히 다루는 것 같지 않고(확실한 건 아님). 그러니까, 흔히 말하듯, 어릴 때 성폭력 경험이 트랜스젠더가 ‘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주제가 아니라, 트랜스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는 과정에서, 트랜스로 정체화하고 살아하는 과정에서(그래서 호르몬이나 수술을 했을 수도 있고 안 했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경험하는 성폭력은 정체성 구성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가 하는 고민이다. 비단 혐오범죄로서의 성폭력 뿐 아니라, 혐오범죄가 아닌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성폭력들도. (혐오범죄를 강조하다보니 혐오가 아닌 맥락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은 언급하지 않는 경향이 생긴 걸까.)

거의 처음인 거 같다. 어떤 고민을 시작할 때, 관련 문헌부터 이렇게 악착같이 찾기 시작한 건. 보통은, 어떤 고민을 시작하면 루인의 생애를 통해 한참을 고민한 후에야 문헌을 찾았는데. 이미 관련 논의를 조금이나마 읽었거나, 과거부터 했기 때문일까, 아님 당장 문헌부터 찾을 정도로 뭔가를 갈구하는 걸까. 그래서 한편으론 막막하고 먹먹하다. 흔히 얘기하는 “페미니즘 얘기하는 성폭력 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맥락들을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

저넷 윈터슨(자넷 윈터슨), [육체에 새겨지다]

Jeanette Wnterson, [Written on the Body]

거의 2년 만에 다시 읽은 이 소설은, 종시를 위한 텍스트임에도, 읽고 있는 순간만큼은 깔깔 웃으면서 그 어떤 부담감을 잊을 수 있었다. 이 소설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연애소설이다.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와 남자친구들과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현재의 애인과 관계를 맺는 과정과 엮어가며 전개하는, 무척 흥미로운 연애소설.

책을 홍보하는 리본엔 “보수적인 영국문단을 뒤흔든 레즈비언 작가!”라고 적혀 있는데, 이 소설에선 화자의 섹슈얼리티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런 분명하지 않은 부분들이 이 소설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게 하는 힘이지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읽어보면 안다. “읽어보면 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이 소설이 재밌고 흥미롭다고 말할 자신이 있다는 의미기도 하고, 영문으로 찬찬히 읽어볼까 고민을 할 정도로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고. 흐흐. 물론 *사소한*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말했다. “르누아르가 자기는 페니스로 그림을 그린다고 주장했던 사실을 알아?”
“물론이지.” 내가 말했다. “그 사람은 정말 그랬으니까. 그 사람이 죽었을 때, 양쪽 고환 사이에서 낡은 붓자루가 하나 나왔다니까.”
“네가 지어 낸 얘기겠지.” (24)

최근 들어 나는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두 눈을 가린 채 널빤지 위를 걸어가다가 ‘바다에 빠져 죽는 일’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30)

사람은 결코 남에게 마음을 내주는 법이 없다 – 그저 가끔씩 빌려 줄 뿐이다. (47)

나는 곧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 안이 잘 들여다보이는 곳에 숨어 옷깃을 세운 채 망을 보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만일 그녀가 경찰을 부른다면, 그래, 나는 그런 꼴을 당해도 싸지. 하지만 그녀는 경찰을 부르는 대신 손잡이에 진주알이 박힌 권총을 한 자루 꺼내어 내 심장을 겨눌 것이다. 검시를 하는 사람들은 잔뜩 부풀어 오른 심장과 더불어 내겐 밸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리라. (61)

주인이 없는 방에 우두커니 서 있으면 정말 묘한 기분이 든다. 특히나 당신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경우라면, 모든 물건들이 저마다의 의미를 지닌 채 다가온다. (62)

“헨리 밀러가 ‘나는 페니스로 글을 쓴다’고 했다는데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알아?”
“자기가 그랬으니까 그랬겠지. 그 남자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가랑이를 벌려 보니까 볼펜이 한 자루 나왔다는군.”
“네가 지어 낸 얘기겠지.” 그녀가 말했다. (77)

그러나 분자들이나 우리 인간들은 결국에는 확률의 지배를 받는 우주의 일부분으로서 존재한다. 우리는 불가해한 자장 속에서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결합하고, 헤어지고, 표류한다. 내가 지금 이곳에서 루이즈를 만났다는 것은 상처 입은 가슴의 치료를 의미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파멸을 의미할 수도 있다. (79)

버지니아 울프, [올란도]

모로코였던가. 카사블랑카와 함께 떠올리면 되니, 맞는 것 같기도 하나. 1970년대 즈음의 미국 트랜스젠더들은 성전환 수술을 하기 위해 모로코로 갔다고 한다. 1950년대와 60년대엔 덴마크로 갔다고 했다. 그래서 그 시절의 “Go to Denmark”(덴마크에 가다)는 성전환수술을 하러 간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덴마크의 법이, 외국인은 덴마크에서 성전환수술을 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바뀌면서, 모로코로 가서 수술을 했다고 한다. 그때 그들은 며칠 정도 입원했을까.

하지만 굳이 미국의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들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상관없다. 지금의 한국에 살고 있는 트랜스들은 태국에 가서 수술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까. 태국영화, [샴]엔 한국의 의학기술이 상당해서 태국에선 고칠 수 없는 병은 한국에 가면 고칠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정작 한국의 재벌들이나, 돈이나 권력이 있는 이들은 미국으로 가던가.) 영화 초반의 공간이 한국이니 이런 식으로 말했을 지도 모르지만(다른 한 편, 한국에 있을 땐 “귀신”이 안 나왔으니까), 적어도 성전환수술에 있어서만은 태국의 기술이 더 뛰어나다는 평가가 중론이다. 한국에서 성전환수술의 “권위자”(혹은 자처하기를 “트랜스젠더들의 아버지”)들이 아무리 수술을 잘 한다고 광고를 해도, 현재로선 태국의 몇몇 병원들이 더 잘 한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대충 일주일 정도 입원을 한다고 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올란도]를 읽으면서 엄청난 작품이라고 느꼈다. 아는 사람은 대충 내용을 알겠지만, 대략 400년이란 시간을 36살이란 나이로 살아가며,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change of sex”)을 경험한 올란도란 사람의 전기소설이다. 근데 이 소설에서 성을 전환하는 장면이 재밌다. 러시아 공주에게 퇴짜 맞고 앓다가, 올란도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사로 간다. 그곳에서 여러 날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일주일간의 깊은 잠에 빠지고 그 사이에 “여성”으로 바뀐다. 이 장면, 올란도가 살았던 영국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에서, 그것도 일주일간의 잠에서 깨어나자 성이 바뀌어 있는 장면에서, 지금 한국에서 살아가는 트랜스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우연이지만, 단지 우연의 일치지만(일주일간의 입원과 일주일간의 잠이라니!), 이 장면에서 만큼은 이 소설을 트랜스젠더 소설로 읽고 싶었다.

물론 울프가 이 소설이 나왔을 즈음, 화제였던 성전환에 대해 몰랐을 리 없다고 상상한다. 울프부부가 세운 출판사에서 프로이트의 책들이 번역되었고, 프로이트와 만난 적도 있다고 하니, 그 심증은 굳어진다. 물론 울프는 전혀 몰랐을 수도 있지만, 성전환수술이 가능하고, 실제 이루어졌음을 알리는 기사로 떠들썩했던 시대에 울프가 산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상상하기도 했다, 어쩌면 울프는 이런 성전환수술과 관련한 정보를 들었던 건 아닐까 하고, 이런 정보가 이 소설을 구성하는데 어떤 영향을 끼친 건 아닐까 하고.

울프가 쓴 작품의 맥락에서 [올란도]를 통해 말하려한 내용은 “양성성”이지만 때로 작품의 맥락을 무시하는 상상은 재밌으니까. “여성”으로 변한 올란도가 “남장”을 하고 다니는 장면도 자주 나오고, 결혼한 파트너 쉘과는, 서로의 성별을 바꿔 부르기도 한다(쉘은 올란도에게 “남성”이라고, 올란도는 쉘에게 “여성”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더구나 소설의 마지막 즈음에 이르면 2,000개 정도의 자아들을 하나로 환원하지 않으면서 불러들이는 멋진 장면도 있고.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게 2000년인가 2001년 즈음이니, 정말 오래 되었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 내용들이, 너무도 짜릿하고 흥미로운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소문만큼 그렇게 어려운 작가도 아니고, [올란도]는 그 중에서도 무척 수월하게 읽을 수 있으니, 퀴어와 관련해서 관심 있는 분이라면(이미 레즈비언 소설로도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고) 더더욱, 한 번 정도 읽으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