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워싱턴의 벚나무 사건은 교훈담이 아니다

아마 초등학생 때로 기억한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짐작은 가지만) 미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어린 시절 일화를 배웠다. 조지는 아버지에게 도끼를 선믈 받고 나서 그 도끼를 사용하고 싶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어린 벚나무(혹은 체리나무)를 시험삼아 모두 베었다. 나중에 벚나무가 잘려나간 모습을 조지의 아버지는 그것을 다른 어디서도 없는 귀한 것이라며 대노했다. 조지는 망설이다 아버지에게 자신이 그랬다고 고백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언제 화를 냈냐는 닷 표정이 바뀌더니 거짓말을 하지 않아 잘 했다며 칭찬을 한다. 이 이야기의 규정된/의도된 교훈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 사실/진실을 말하면 잘못을 용서받는다는 것이다.

일단 규정된 교훈은 현실 경험을 통해 실패한다. 싸닥션과 함께 얻어맞고 집에서 쫓겨나겠지. 이게 내가 아는 현실이다. 한국 법치 현실은 이것보다 더 가혹하다. 그런데 E와 함께 나눈 이야기는 이런 측면이 아니다. 조지 워싱턴의 벚나무 절단 사건은 인종 정치와 젠더 정치가 얽힌 이야기다.
만약 그 벚나무를 흑인노예가 절단하고서 사실대로 말했다면 그래도 조지의 아버지는 칭찬했을까? 혹은 인디언이 그랬다고 했을 때도 관대하게 용서하고 칭찬했을까?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고민한다. 즉각 죽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조지는 어쨌거나 그 아버지와 같은 백인이었다.
다른 한편, 만약 부인이 그랬다고 해도 무사했을까? 딸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랬어도 그 딸을 칭찬했을까? 절대 아니라고 고민한다. 죽이거나 죽이진 않더라도 사단이 났을 것이다.
그러니까 조지는 그 아버지와 같은 인종의 아들이었기에 칭찬받았지 그렇지 않았다면 성립하기 힘든, 아마도 성립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냥 “오구, 내 아들 우쭈쭈”하는 이야기다. 교훈담이 아니라 섬뜩한 이야기다. 차별로 점철된 시대사를 암시하는 에피소드에 더 가깝다.

실명비판: 내가 누군가를 비판한다는 것

10대 시절 강준만 선생의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은 실명비판이었다. 한국은 두루뭉실 비판하지 실명으로 구체적 비판 작업을 진행하지 않고 그래서 학문의 발전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을 읽으며 ‘그래, 실명 비판을 해야지!’라고 어쩐지 결연했지만, 돌이켜 고민하면 그땐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그냥 잘못된 관행을 비판했기에 분연했을 뿐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 어쨌거나 공부를 한다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지금 실명비판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한다. 혹은 그 말이 조금은 와닿는다. 물론 나는 여전히 그 말의 충분한 의미를 잘 모르며 아마도 내가 아는 수준 이상으로 더 복잡한 의미를 지닐 것이라 짐작한다. 그저, 실명비판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누군가를 콕 찝어서 비판하는 풍조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의 글을 읽고 정확하게 비판하는 풍조가 없다는 뜻에 더 가까우리라. 즉, 한국 지식인은 한국에서 생산된 지식을 읽지 않는다는 비판이기도 하고, 읽어도 제대로 깊이 있게 살피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글의 결을 따라가며 읽었다고 해도 이를 비판적으로 논하는 글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그리하여 각자의 주장만 떠돌고 이런 주장을 엮고 서로의 약점을 신랄하게 드러내고 자신의 약점을 뼈아프게 인식하며 함께 더 좋은 논의를 생산하는 분위기가 없다는 뜻이리라.
실명비판이 없다는 구절을 지금은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
실명비판을 조금 더 넓게 독해하면, 이것은 이른바 ‘내부’ 비판일 것이다. LGBT/퀴어 공동체에서 바이섹슈얼/양성애나 트랜스젠더퀴어, BDSM, 무성애, 인터섹스, 혹은 다른 퀴어 범주를 비난하는 태도가 있다. 호모포비아가 어떤 전선을 구축하기가 상당히 수월하다면 BT/퀴어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런 지점을 비판하는 작업을 할 때면 착각하기 쉬운 지점이 있다. ‘나는 옳다’, ‘이런 비판을 할 수 있는 나(의 위치)는 무결하다’와 같은 믿음, 착각이다. 정말 위험한 위치다. 나 역시 이런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니, 나는 이런 위험에 가장 취약하게 노출되어 있다. 사실 많이 두렵다. ‘우리’로 주변에서 가정하는 집단을 비판해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나를 재판관으로 내가 착각하지는 않을까 싶어 두렵다. 두렵지만 비판을 포기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런 비판을 통해 다른 누군가가 나를 비판할 수 있는 환경에 노출시키겠다는 의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명비판은 단순히 다른 누군가를 분명하게 비판한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그런 비판 문화에 노출시키겠다는 의미다. 나 자신을 어떻게든 상대화하겠다는 노력이라면 노력이다. 물론 나는 이런 노력이 많이 부족하지만 아무려나 그렇다.
+
여담이지만 작년에 출판한 글에서 임옥희 쌤을 비판하는 구절을 실은 뒤로 임옥희 쌤과 마주칠 기회를 피하고 있다… 하하… 내가 잘못한 것은 없지만… 하하… ;ㅅ;
물론 이유는 안다. 글로 비판했으면 글로 답을 듣고 싶다. 면대면으로 마주하면 그냥 대충,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어갈 수 있다. 글로 시작했으면 글로 마무리하고 싶다. 그래서 피하는 거라고 주절거려본다… 하하…

총선 투표 잡상

오는 총선에서 녹색당에 비례투표를 할 예정이었다. 내가 사는 지역엔 지역의원 후보는 제한적이라 비례 투표는 그럴 예정이었다.별다른 일이 없다면 그럴 계획이었다. 그런데 녹색당에서 동성결혼 법제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마, 치아뿌라. 그리고 다른 몇 개의 당을 고민했다. 노동당일 수도 있고 정의당일 수도 있다. 뭐든 좀 더 살펴보리라 했다. 노동당에서도 동성결혼을 전재하는 공약을 내걸었다. 됐다. 치아뿌라. 뭐 이런 식이란 말이냐.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아니 화가 나는데 다른 많은 퀴어 이슈가 아니라 동성결혼이 이렇게 정당정치에서 홍보용 주요 정책으로 채택될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이 권력 역동, 특권적 이해가 LGBT/퀴어 정치의 대표 정치로 치환되는 지점을 납득할 수 없다.

정의당을 잠시 고민했지만 선거송을 부른 밴드 이력을 알고서… 마, 치아뿌라.
비례투표에서 뽑을 당이 없어 고민이다. 결국은 어딘가에 투표는 하겠지만 할만한 곳이 없다. 다시 나는 중얼거린다. 투표용지에 “이 중에서 지지하는/괜찮은 후보/정당 없음”이란 항목이 있어야 한다고. 이 항목이 필요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