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폭력의 역사

[폭력의 역사] 2007.08.01.수, 18:20, 미로스페이스. 1관 I-7

※특별한 스포일러는 없지만 내용 설명은 조금 있음.

01
미로스페이스는 엄청 먼 곳에 있는 줄 알았다. 근데, 극장 근처에 도착했을 즈음 씨네큐브 맞은편에 있단 걸 깨닫고, 왠지 허무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다니. 영화관에 도착해선, 이렇게 멋진 영화관이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이렇게 멋진 영화관에 지금까지 한 번도 안 와봤단 사실에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왠지 영화관이 좋아서 자주 찾을 것만 같다. 흐흐.

02
과거 조폭이었던 조이는 톰이란 이름으로 바꾸고, 조폭으로서의 자신의 과거를 숨긴 채 “선량한 미국시민”이자 “미국이 낳은 영웅”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미국의 영웅”이 되면서, 신문을 통해 얼굴과 사는 지역이 알려져, 과거 조폭시절의 사람들과 다시 만난다. 톰이 사는 마을 경찰은, 조폭들을 평화로운 마을에 침입한 자들로 간주하고 다시는 오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경찰의 경고에 순순히 따르면 조폭이 아니고 영화의 서사진행이 안 되지-_-;;; 그렇게 조폭들은 계속해서 톰/조이를 찾아오고 끝까지 자신의 과거를 숨기다 결국 자신의 과거를 드러낸다. 이에 충격 받은 가족들과 불화를 경험하고.

이런 장면들은, 현재의 미국이 다른 지역에서 행하고 있는 폭력을 재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9.11″테러” 이후, 아무 잘못 없는 미국에 “악의 축”들이 공격하고 있기에, 미국은 피해자고 중동지역의 국가들은 선한 미국을 공격하는 악이라는 식의 말들. 부시정부의 이런 태도는, 조폭으로서의 과거를 숨기고 부정하고, 자신은 아무런 잘못 없는 선량한 시민인데 외부의 폭력조직이 들어와서 마을을 어수선하게 한다는 경찰의 말과 정확하게 겹친다. 마치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너네가 나를 공격하니 나도 어쩔 수 없이 공격한다는 식이다. 차이라면, 영화에선 자신의 과거를 드러낸다는 점이랄까. 물론 이후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해서 이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03
이 영화를 읽으며, [눈먼 자들의 도시]가 떠올랐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그만두기가 힘들 정도의 흡입력을 지녔으니 소설로서 이 만한 미덕도 없다. 하지만 [눈먼 자들의 도시]는 결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다. 중간에 “전시성폭력”을 연상케 하는 장면에선, 한 번에 다 못 읽고 몇 번 쉬어가며 읽었으니까. 이 영화 역시 비슷하다. 영화로서, 그리고 이야기 전개에 있어선 정말 빼어나서, 근래에 이 만큼 이야기 구조가 탄탄한 영화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아내폭력”이 나오는 장면에선, 역시나 불편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차라리 영화관을 나가고 싶기고 했다.

04
제목이 계속 걸린다. 폭력의 “역사”라니. 근 20년 가까이 부인한 경험들이고 그래서 20년 가까이 조폭으로서의 활동을 안 했음에도,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몸은 20년 전의 경험을 고스란히 불러들인다. 그래서 능숙하게 총을 쏘고, 상대가 꼼짝도 못 하게 될 부위를 정확하게 압박한다. 02에서 적은 것처럼 이 영화를 읽을 수도 있겠지만, 제목으로 인해, 역사와 체현으로 이 영화를 읽는 게 더 재밌겠다 싶기도 했다. “조폭은 어쩔 수 없어”란 식으로, 과거의 어떤 경험으로 그 사람의 현재를 환원하지 않으면서, 과거에 경험했기에 몸이 기억하고 있는 그 일들을 지금 다시 경험하고 있다는 점에서의 “역사”. 그래서 제목과 함께 이 영화를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를 고심 중이다. 아직 정리가 안 되고 있지만.

문상

어제 오후였죠, ㄱ선생님에게서 연락이 왔고, ㄴ선생님의 가족 중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알려 줬어요. ㄴ선생님과 그렇게까지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에요. 루인은 ㄴ선생님에게 찍혀있다는 말도 할 정도의 감정. 물론 그렇다고 무척 사이가 나쁘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그저 사이가 그다지 좋은 건 아니다고 말하는 것보다 조금 더 안 좋은 정도랄까요. 전화를통해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조금은 무덤덤했죠. 그렇다고 사이가 안 좋아서 별 감정이 안 생긴 건 아니에요. 아마 실감이 안 나서 그렇겠죠.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파악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필요했으니까요. ㄴ선생님에게 아직 그 분이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기에, 그 분의 죽음을 실감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죠.

루인이 아는 선생님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어찌하여 (어제의 내일인)오늘, ㄷ선생님과 같이 문상을 가기로 했죠. 사실, 망설였어요. 무엇보다 입고갈 옷이 없었거든요. 관혼상제와 관련한 일이 있을 때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은 옷인 거 같아요. 입고 갈 만한 적당한 옷이 없다는 거. 玄牝의 옷장에 정장이 없으니, 누가 결혼한다거나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를 상상하면, 옷이 참 난감하죠.

그나마 결혼식은, 이제 더 이상 갈 일이 없을 것 같아 다행이긴 해요. 친구도 별로 없거니와, 결혼하겠다는 친구는 이미 결혼을 했고, 그 외엔 결혼을 안 하거나, 결혼을 해도 제도적인 결혼은 안 할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누군가의 장례식에 가야할 땐 어떻게 해야 할지…. 장례식이나 결혼식엔 정장을 입고 가야 한다는 어떤 강박이 있기 때문에 이런 갈등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아무려나 긴 청바지를 입고 검은색 티(긴 걸로-_-;;)를 입고 찾아갔는데, 문득 그 곳이 무척 낯설다고 느꼈다. 장례식장이면 어릴 때부터 경험한 곳이라 익숙할 줄 알았다. 그래서 능숙하게 행동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경험했으니까. 근데 왜 그리도 당황스럽고 낯설까, 하는 느낌 속에서, 문득 친족관계가 아닌 사람의 장례식장에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란 걸 깨달았다. 지금까지 경험한 장례식장은 모두 “이성애”혈연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그래서 손님이 아니라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오늘 오전에 찾은 장례식장은 손님이란 입장으로선 처음으로 찾아가는 곳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이런 낯설음을 반복하며 익숙해지겠지.

ㄴ선생님은 얼이 빠진 모습이었고, “얼굴이 반쪽이다”란 말이 딱 어울렸다. ㄴ선생님에게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었으니까. 루인이 들어서자 선생님은 “의외”란 표정이었지만, 그런 만큼이나 많이 챙겨 주셨고.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잘 왔다’고 중얼거렸다. 응, 가길 잘 했어…. 괜히 선생님에게 죄송했다.

[영화] 만덜레이

[만덜레이] 2007.07.30.월, 20:30, 스폰지하우스(시네코아), 6층 B-118

※스포일러 없음.

몇 해 전, [도그빌]을 읽었을 때, 두 가지 감정을 느꼈어. 영화를 이렇게 만들 수도 있구나, 하는 놀람은 꽤나 컸어. 연극을 하는 것만 같은 세팅도 놀랍고 감독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풀어갈 수도 있구나, 하는 감탄. 하지만 이 영화는 결코 유쾌하진 않았고,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어. 그땐 설명하지 못한 씁쓸함을, 지금 다시 읽는다면 설명할 수 있을까 궁금하지만, [도그빌]은 다시 읽고 싶은 영화는 아닌 것 같아.

그리고 시간이 지나, [도그빌]과 함께 3부작의 2편인 셈인 [만덜레이]를 어제 읽었지. 연극무대 같은 느낌은 이번에도 여전해. 인종차별주의를 다루고 있는 솜씨도 그럴 듯 하고.

책을 읽다보면, 종종 놀라운 사실을 깨닫곤 해. 일테면 1800년대 중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던 여권론자들 혹은 여성해방운동을 했던 이들이 보여준 인종차별적인 태도들. 루인은 편견이 없다고 믿었음에도, 페미니스트는 당연히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계급차별에 반대하고 등등의 공식을 루인 역시 가지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어. 이런 공식 자체가 페미니즘을 아주 단순하고 고정된 무언가로 만드는 효과를 낳음에도 그 책을 읽기까지 미처 깨닫지를 못 했어.

영화 주인공, 그레이스의 행동을 읽으며 문득 이런 일화들이 떠올랐어. 그레이스는 마치 자신의 모든 백인을 대표하는 듯,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했던 잘못을 자신이 대신 사과한다는 말도 해. 다들 기억하겠지만, 몇 해 전 부시가 대통령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을 때, 일부 미국인들이 “죄송합니다”란 글을 쓴 종이를 들고 찍은 사진이 나돌았고, 그 사진을 보며 솔직히 웃기다고 느꼈어. 영화를 읽다가 그레이스의 행동에, 이러 사진을 올린 일부 미국인들이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겠지. 그리고 바로 이런 태도가 일종의 비극을 만들고.

근데, 이 영화를 읽으며, 이 감독이 그려가고 있는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 속에 젠더는 없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 인종과 관련한 이 영화에서, “같은” 인종이라 일컫는 집단이라고 해서 젠더가 작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젠더와 인종은 언제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작동하는데, 이 영화는 이런 지점은 전혀 다루고 있질 않아. [도그빌]에 이어 [만덜레이]도 읽고 나면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는데, 이런 이유에서인 걸까 싶기도 해. 한 번 쯤 읽을 만한 영화긴 하지만, 씁쓸해서 다시 읽고 싶지는 않은 영화. 물론 3부작의 세 번째 영화라는 [워싱턴]도 나오면 읽겠지만, 두 번 읽고 싶지는 않아.

+
사실 이 영화를 읽는 내내 몰입을 할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주인공 때문에. [도그빌]에서 주인공인 그레이스 역할을, 니콜 키드만이 했는데, 그때 무척 인상적이었어. 문제는 그때만 인상적이면 되는데, [만덜레이]를 읽는 내내,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와 비교를 하더라는. 영화를 읽는 내내, ‘니콜 키드만이었으면 더 멋졌을 텐데’라거나 ‘니콜 키드만이었으면 저 장면에서 엄청난 카리스마를 발휘했을 텐데’란 식으로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