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DSM과 고양이

바람은 매일 스팽킹을 요구한다. 아침에 해주면 또 금방 요구하고 또 얼마 안 지나 요구한다. 잠잘 때, 밥 먹을 때를 제외하면 거의 항상 스팽킹을 요구한다. 응할 때도 있고 응하지 않을 때도 있다. 응할 땐 꽤나 강한 강도로 스팽킹을 한다. 강도가 강할 수록 바람은 좋아한다. 동일한 강도로 내 몸을 때리면 상당히 아픈데 바람은 더 흥분하고 더 좋아한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중얼거린다. 나는 고양이와 BDSM을 하고 있은 것일까,라고. 때론 헷갈린다. 내게 있는 BDSM과 관련한 어떤 욕망을 어쩌다보니 고양이와 실천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고양이와 BDSM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나는 무엇을 실천하고 있고 욕망하는 것일까?

다 무슨 소용인가

번역 작업을 한 책이 새롭게 나왔다. 하지만 다 무슨 소용인가. 당장 생활비가 빠듯하거나 없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이런 작업이 나온다고 다 무슨 소용인가.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큰 일인데 공부를 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 최근 몇 달째 식비를 살 돈이 없어서 곤란을 겪고(다행히 E느님이 도와줬지만)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논의를 고민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란 고민을 한다. 그래서 기본소득이니 뭐니 여러 논의가 등장하지만 그런 논의에 동의하고 지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당장 먹고 살 일이 문제인데 다 무슨 소용인가.

이론적 논의가 현실과 상관없는 소리란 뜻이 아니다. 어떤 이론적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선 당장 내 생활 자체가 유지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다면 어떻게 현실을 설명할 이론적 작업, 언어 모색 작업을 진행할 수 있을까?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매달 갚아야 하는 빚이 상당하고 공과금에 교통비가 상당하다. 그런데 그런 비용을 지급하고 나면 먹고 사는 문제가 위태로워진다.
[트랜스젠더의 역사: 현대 미국 트랜스젠더 운동의 이론, 역사, 정치]란 책이 다른 트랜스젠더퀴어에게 어떤 상상력을 제공하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하지만 당장 내가 먹고 사는 일엔 어떤 도움이 안 되는 상황에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다. 적잖은 예술가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고집하다가 죽음을 선택하거나 죽음으로 이끌렸다. 나는 죽음이 삶에서 중요하고 가치 있는 선택지 중 하나라고 고민하지만, 만약 지금은 죽음을 선택지로 염두에 두지 않겠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더 많은 급여를 주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나은 걸까? 때로 진지하게 이런 고민을 한다.

수잔 스트라이커, [트랜스젠더의 역사: 현대 미국 트랜스젠더 운동의 이론, 역사, 정치] 출간

‘트랜스젠더’라는 단어는 널리 사용된 지 20년 밖에 안 된 탓에 지금도 그 의미가 구성되고 있다. 이 책에서 나는 ‘트랜스젠더’를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를 떠나는 사람, 그 젠더를 규정하고 억제하기 위해 자기들의 문화가 구성한 경계를 가로지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데 쓴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사실은 다른 젠더에 속하고 그 젠더로 살아가는 쪽이 더 낫다고 강하게 느끼기 때문에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에서 벗어난다. 또 다른 사람은 어떤 새로운 위치, 아직 명확하게 규정되거나 구체적으로 점유되지 않은 어떤 공간을 향해 나아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단지 태어날 때 주어진 젠더와 결부된 전통적 기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낀다. 어떤 경우건 내가 이 글에서 진전시키고 싶은 ‘트랜스젠더’의 개념을 가장 잘 특징짓는 것은 특정한 목적지나 이행 방식이라기보다는 선택하지 않은 출발 지점에서 떨어져 나와 사회가 부여한 경계를 가로지르는 운동이다.
-스트라이커, [트랜스젠더의 역사: 현대 미국 트랜스젠더 운동의 이론, 역사, 정치] (이매진, 2016), 제이, 루인 옮김. 19쪽

스트라이커가 트랜스젠더를 정의하는 구절입니다. 상당히 인상적인 구절이기도 합니다.

드디어 이 책이 나왔습니다. 많이 부끄럽지만요.
옮긴이 후기엔 한국 트랜스젠더퀴어 운동을 간결하게 정리한 글이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