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시절 강준만 선생의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은 실명비판이었다. 한국은 두루뭉실 비판하지 실명으로 구체적 비판 작업을 진행하지 않고 그래서 학문의 발전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을 읽으며 ‘그래, 실명 비판을 해야지!’라고 어쩐지 결연했지만, 돌이켜 고민하면 그땐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그냥 잘못된 관행을 비판했기에 분연했을 뿐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 어쨌거나 공부를 한다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지금 실명비판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한다. 혹은 그 말이 조금은 와닿는다. 물론 나는 여전히 그 말의 충분한 의미를 잘 모르며 아마도 내가 아는 수준 이상으로 더 복잡한 의미를 지닐 것이라 짐작한다. 그저, 실명비판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누군가를 콕 찝어서 비판하는 풍조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의 글을 읽고 정확하게 비판하는 풍조가 없다는 뜻에 더 가까우리라. 즉, 한국 지식인은 한국에서 생산된 지식을 읽지 않는다는 비판이기도 하고, 읽어도 제대로 깊이 있게 살피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글의 결을 따라가며 읽었다고 해도 이를 비판적으로 논하는 글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그리하여 각자의 주장만 떠돌고 이런 주장을 엮고 서로의 약점을 신랄하게 드러내고 자신의 약점을 뼈아프게 인식하며 함께 더 좋은 논의를 생산하는 분위기가 없다는 뜻이리라.
실명비판이 없다는 구절을 지금은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
실명비판을 조금 더 넓게 독해하면, 이것은 이른바 ‘내부’ 비판일 것이다. LGBT/퀴어 공동체에서 바이섹슈얼/양성애나 트랜스젠더퀴어, BDSM, 무성애, 인터섹스, 혹은 다른 퀴어 범주를 비난하는 태도가 있다. 호모포비아가 어떤 전선을 구축하기가 상당히 수월하다면 BT/퀴어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런 지점을 비판하는 작업을 할 때면 착각하기 쉬운 지점이 있다. ‘나는 옳다’, ‘이런 비판을 할 수 있는 나(의 위치)는 무결하다’와 같은 믿음, 착각이다. 정말 위험한 위치다. 나 역시 이런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니, 나는 이런 위험에 가장 취약하게 노출되어 있다. 사실 많이 두렵다. ‘우리’로 주변에서 가정하는 집단을 비판해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나를 재판관으로 내가 착각하지는 않을까 싶어 두렵다. 두렵지만 비판을 포기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런 비판을 통해 다른 누군가가 나를 비판할 수 있는 환경에 노출시키겠다는 의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명비판은 단순히 다른 누군가를 분명하게 비판한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그런 비판 문화에 노출시키겠다는 의미다. 나 자신을 어떻게든 상대화하겠다는 노력이라면 노력이다. 물론 나는 이런 노력이 많이 부족하지만 아무려나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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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작년에 출판한 글에서 임옥희 쌤을 비판하는 구절을 실은 뒤로 임옥희 쌤과 마주칠 기회를 피하고 있다… 하하… 내가 잘못한 것은 없지만… 하하… ;ㅅ;
물론 이유는 안다. 글로 비판했으면 글로 답을 듣고 싶다. 면대면으로 마주하면 그냥 대충,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어갈 수 있다. 글로 시작했으면 글로 마무리하고 싶다. 그래서 피하는 거라고 주절거려본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