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무슨 소용인가

번역 작업을 한 책이 새롭게 나왔다. 하지만 다 무슨 소용인가. 당장 생활비가 빠듯하거나 없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이런 작업이 나온다고 다 무슨 소용인가.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큰 일인데 공부를 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 최근 몇 달째 식비를 살 돈이 없어서 곤란을 겪고(다행히 E느님이 도와줬지만)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논의를 고민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란 고민을 한다. 그래서 기본소득이니 뭐니 여러 논의가 등장하지만 그런 논의에 동의하고 지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당장 먹고 살 일이 문제인데 다 무슨 소용인가.

이론적 논의가 현실과 상관없는 소리란 뜻이 아니다. 어떤 이론적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선 당장 내 생활 자체가 유지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다면 어떻게 현실을 설명할 이론적 작업, 언어 모색 작업을 진행할 수 있을까?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매달 갚아야 하는 빚이 상당하고 공과금에 교통비가 상당하다. 그런데 그런 비용을 지급하고 나면 먹고 사는 문제가 위태로워진다.
[트랜스젠더의 역사: 현대 미국 트랜스젠더 운동의 이론, 역사, 정치]란 책이 다른 트랜스젠더퀴어에게 어떤 상상력을 제공하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하지만 당장 내가 먹고 사는 일엔 어떤 도움이 안 되는 상황에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다. 적잖은 예술가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고집하다가 죽음을 선택하거나 죽음으로 이끌렸다. 나는 죽음이 삶에서 중요하고 가치 있는 선택지 중 하나라고 고민하지만, 만약 지금은 죽음을 선택지로 염두에 두지 않겠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더 많은 급여를 주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나은 걸까? 때로 진지하게 이런 고민을 한다.

수잔 스트라이커, [트랜스젠더의 역사: 현대 미국 트랜스젠더 운동의 이론, 역사, 정치] 출간

‘트랜스젠더’라는 단어는 널리 사용된 지 20년 밖에 안 된 탓에 지금도 그 의미가 구성되고 있다. 이 책에서 나는 ‘트랜스젠더’를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를 떠나는 사람, 그 젠더를 규정하고 억제하기 위해 자기들의 문화가 구성한 경계를 가로지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데 쓴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사실은 다른 젠더에 속하고 그 젠더로 살아가는 쪽이 더 낫다고 강하게 느끼기 때문에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에서 벗어난다. 또 다른 사람은 어떤 새로운 위치, 아직 명확하게 규정되거나 구체적으로 점유되지 않은 어떤 공간을 향해 나아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단지 태어날 때 주어진 젠더와 결부된 전통적 기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낀다. 어떤 경우건 내가 이 글에서 진전시키고 싶은 ‘트랜스젠더’의 개념을 가장 잘 특징짓는 것은 특정한 목적지나 이행 방식이라기보다는 선택하지 않은 출발 지점에서 떨어져 나와 사회가 부여한 경계를 가로지르는 운동이다.
-스트라이커, [트랜스젠더의 역사: 현대 미국 트랜스젠더 운동의 이론, 역사, 정치] (이매진, 2016), 제이, 루인 옮김. 19쪽

스트라이커가 트랜스젠더를 정의하는 구절입니다. 상당히 인상적인 구절이기도 합니다.

드디어 이 책이 나왔습니다. 많이 부끄럽지만요.
옮긴이 후기엔 한국 트랜스젠더퀴어 운동을 간결하게 정리한 글이 실려 있습니다.

악플러에 대처하는 방법

E가 [Korea Skeptic]란 잡지 5호를 건네주며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잡지에 실린 캐롤 타브리스의 칼럼이 무척 재밌다고.

보통 자신의 분노를 억누르기보다 표출하고 발현함으로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이것이 정신 건강에 더 좋다는 논의가 있다. 그래서 많은 심리 치료사가 욕설, 큰소리, 인형을 향해 방망이질 등을 권한다. 그러고 보면 일전에 본 어느 영상에서도 분노를 표출하라며 있는 힘껏 방석을 방망이로 내리치도록 처방하는 장면을 봤다. 이를 통해 감정을 표출하고 분노를 억누르기보다 표출하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사람에게 더 좋다는 주장이다. 타브리스에 따르면 이것은 프로이트의 논의에서 출발하지만 프로이트 논의의 일부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분노 등을 배출할 때 예술의 창조와 같은 건설적 활동으로 승화할 것을 권했다. 방망이질이나 욕설, 큰소리가 아니라.
그러나 현실에서 많은 사람이 분노를 욕설로 표출한다. 그것은 특히 인터넷 시대에 악플이나 키보드 워리어의 형태로 자주 나타난다. 프로이트의 논의 일부를 놓친 카타르시스 이론에 따르면 이것은 어쨌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에겐 좋은 일이다. 그 욕설을 듣는 입장에선 스트레스겠지만. 그리고 타브리스는 어떤 악플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고민하다 선물과도 같은 논문을 찾았다. 그 제목은 “트위터에 나타난 심리적 언어와 지역별 심장병 치사율의 상관관계”다.
논문의 연구 방법은 생략하고 결과만 말하면 “부정적인 사회관계, 이탈, 특히 분노, 증오, 공격성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언어 패턴은 심장질환의 가장 강력한 위험 요인으로 트러났다”고 한다. “일반적인 인구 통계학이나 사회경제적 요인, 흡연, 당뇨, 고혈압, 비만을 포함하는 건강 위험 요인을 통합한 전통적인 모델보다 언어가 죽상동맥경화성 심장질환 위험도를 더 정확하게 예측했다”고.
타브리스가 전하는 이 논의의 교훈이 뭐냐고? “인터넷에서 멍청한 욕쟁이 악플러 때문에 분노하게 되거든 그냥 내버려둬라. 그 트롤들은 어느 날 심장병으로 쓰러지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러셀 베이커가 남긴 교훈을 따라 아름답고 교양 있는 댓글을 추구하면 될 일이다.” 이렇다고 한다.
타브리스의 어떤 표현이나 어떤 순간순간은 비판하고 싶지만(“병으로 죽어버렷”, “쟤는 심장병으로 죽을 거야”와 같은 언설은 질병을 혐오하는 사회적 인식을 재생산한다), 그 결론엔 동의한다. 어그로꾼이나 악플러엔 그냥 무시하는 게 가장 좋다. 애당초 논의가 가능한 집단도 아니니까. 물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내가 멘탈갑이라고 하는 것이겠지만. 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