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유로 세대]: 아이러니

“어떻게 먹고 살 건데?”라는 질문에, 루인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모두 막막한 반응을 보여. 취직자리도 마땅찮고(지원할 곳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뽑아줄 곳이 있을지 걱정이라는 의미에서), 활동가 살거나 공부를 계속 하고 싶은데,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을 하곤 해.

초중고등학생 시절, 학교 선생들은 한결같이, “우리”들은 빈곤을 모르고 자란 세대라고, 부족한 것 없이 잘 사는 세대라고 얘기했어(매도한 건가?). 그런 얘기들의 속뜻은, “우리”들은 별 고생 없이 계속해서 잘 살 거고 풍요로울 거라는 거였어. IMF도 금방 “졸업”했잖아. 그런 세대가 막상 취업을 하려고 하니, IMF의 여파는 여전하고 경기는 계속 어렵기만 하고, “이태백”이라고들 얘기해.

[천유로 세대]를 읽으면서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하루 생활비를 매순간 계산하면서 살아가는 삶이었어. 정말 그래. 요즘은 조금 덜 하지만, 예전엔 정말, 통장잔고와 지갑 속 금액을 계속해서 계산하며 살아가기도 했어. 요즘도 크게 달라진 건 없지. 생활비 계산을 조금만 느슨하게 해도, 금방 위태위태한 생활을 하게 돼. 그래서 가장 와 닿은 부분은, 병원비와 관련한 얘기야. “치과에라도 가야 할 때에는 정말 난리가 난다”고, 대출을 받아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막막하다는 구절에선 정말이지ㅠ_ㅠ 근 몇 년째 병원에 갈 일이 없어서 다행이지만, 병원비가 없어서 아프거나 다치면 안 되겠다는 고민을 한 적이 있어. 지금도 그래. 병원비가 얼마건 간에 막연한 걱정 때문에 그냥 약국에서 약을 사먹고 말지.

나중에 졸업하고 취직을 한다면, 많이도 말고 월급 100만 원인 일자리를 구할 수만 있어도 좋겠다고 중얼거려. 그런 와중에 글 기고를 할 기회가 생기거나 특강을 할 기회라도 생기면 무척 좋고. “가외수입”이란 의미가 아니라, 끊임없는 긴장과 자극을 받을 수 있으니까.

며칠 전, “그 일”이 생겼을 때, “가져갈 게 없을 건데”라고 중얼거렸어. 저축이 없으니 통장 하나 없고, 10원 한 장 없거든. 있는 거라곤 CD와 책과 약간의 DVD타이틀이 전부니까. 근데 있잖아, 곰곰이 계산을 해보니까, 만약에 지난 십 몇 년 동안 CD와 책을 안 사고 그 돈을 모두 저축을 했다면 얼마나 될까를 계산해봤어.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지만 어림짐작은 할 수 있으니까. 그랬더니 玄牝의 보증금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은 금액은 아니란 걸 깨달았지 -_-;; CD와 책이 이 만큼 많다는 의미인지 보증금이 그만큼 싸다는 의미인지는 알아서들 상상하시고;;; 아무튼 “아이러니”는 이거라는 거… *힐끔* 켁.

[영화] 샴

[샴] 2007.07.18. 20:00, 아트레온 7관 9층 D-2

※스포일러 없어요.

있잖아, 핌이 아니라 플로이에게 이입하고 있었어.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핌과 플로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핌이 아니라 플로이에게 이입하고 플로이의 심정을 이해하는 자신을 깨달았어. 왜, 그런 거 있잖아, 덜 사랑 받는다는 느낌. 이런 느낌이 들 때 생기는 억울함 혹은 어떤 분함.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는 플로이니까. 후반부에도 여전히 플로이에게 이입했고.

그래서 슬펐어. 이 영화, 공포영화라기보다는 좀 슬픈 영화라고 느꼈어. 슬픔이 어떻게 공포가 될 수 있는지를 그린 영화는 아닐까 했지. 내겐 슬픔인데 다른 사람에겐 나의 슬픔이 공포가 된다거나. 나의 슬픔이 너무 커져서 공포라는 형식으로 그 슬픔이 되돌아온다거나. 너무 무서워서 울거나, 너무 울어서 무섭거나.

현실과 환상이라는 경계, 이 모호한 경계가 이 영화에서도 계속 되더라고. 이런 영화가 좋아([열세 살, 수아]처럼). 내겐 현실인데 다른 사람들에겐 환상이거나 “정신착란”이라고 여겨지는 상황. 주인공에겐 귀신이 현실인데, 자꾸만 나타나서 괴롭히는 현실인데, 의사에겐 뇌에 문제가 있거나 강박에 따른 착각으로 간주되는 상황. 사실, 많은 일들이 이렇잖아. 나는 경험했는데, 남들은, “착각한 거 아냐?”, “뭐, 잘 못 본 거 아냐?”라고 반응하는 일들 참 많잖아. 그리고 이 순간, 나의 경험은 공포가 되거나 슬픔이 되고.

근데, 위는 참 재수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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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왜 공포영화를 극장에서 읽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근까 본격적으로 공포가 시작될 즈음이면, 마구마구 후회하기 시작하는데, 도대체 왜 이 영화를 읽겠다고 했는지, 자책하는데, 막상 영화가 끝나고 나면, 또 다른 공포영화라는 장르를 찾고 있는 루인이라니. 흐흐. 마구마구 후회하는 이 감정이 공포영화를 찾게 하는 힘인 것 같아. 이 감정을 못 잊어 다시 찾는 거 같아.

02. 별 군더더기 없이 충실하게 잘 만든 영화란 느낌. 영화를 읽으면서, 이 영화 참 착하다고 느꼈는데, 이쯤에서 뭔가 나오겠다 싶으면 어김없이 나오고, 뭔가 나오기 전엔 배경음악으로 적절히 알려 주기 때문에 미리 준비할 수 있달까. 근데, 미리 준비를 하고 예상을 하고 있음에도, 무섭게 만든다는 거, 그게 이 영화를 공포영화로 분류했을 때의 힘인 거 같아.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란 없다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줄거리를 어떻게 풀어 가는가가 중요한데, [샴]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진행임에도 불구하고, 공포를 조성하고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는 점에서, 괜찮았다.

네임밸류라는 거, 학벌이라는 거, 학력이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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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의 시즌2(-_-;;;)를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을 때, 지렁이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모 단체의 한 활동가는 이번 기회에 단체 이름을 바꾸라고, “지렁이”를 빼라는 얘길 했다. 사실 그 활동가가 단체 이름에 “지렁이”를 빼라고 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단체 발족을 준비하던 시기에도 비슷한 말을 자주 했다.

이렇게만 적으면 그 활동가의 이런 말이, 지렁이가 발족하기 전부터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간섭하려는 행동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아니다. 그 활동가 역시, 자신들의 단체이름으로 인한 “곤란함”을 겪었기에 해주는, 조언이었다. 그럼에도 지렁이는 여전히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로 발족했다.

만약 활동가 단체들이 모인 포럼이 아니라, 소위 학교의 이름을 통해 “학술포럼”이라고 불리는 곳에 루인이 초대받았다고 치자. 그때 루인을 소개하는 소속을 어떻게 기재할 것인가는 루인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아주 중요한 지표가 된다. 대학원생으로 소개할 때와 단체 활동가로 소개할 때 루인의 말은 동일한 의미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대학이냐에 따라서, 단체명이 어떤가에 따라서도 상당히 다르고. 루인을 소개할 때, 한국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명문대 “한국대학교” 대학원생이라고 소개하는 것과 영화에서조차 이름이 없는 “3류 대학교” 대학원생이라고 소개하는 것 사이엔 상당히 다른 반응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을 대학원생 혹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연구자로 소개하는 것과 단체 활동가로 소개하는 것 역시 많이 다르다(라디오를 듣고 있으면, 단체 활동도 하는 교수들도 단체이름보다는 모 대학 교수라고 먼저 소개하거나 대학교수란 직함에 방점을 더 찍는다). [루인에게 이런 고민이 가능한 건, 어쨌거나 루인에겐 대학원생이란 학력자본이 있기 때문이다. 즉, 선택할 학력자본이 있기에 이런 갈등을 하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이 고민은 “학력과시”로 읽힐 수 있음을 안다.]

단체 활동가로 소개할 때에도 단체 이름은 그 사람의 말에 다른 무게를 준다. 루인을 소개하면서, “성전환자인권연대” 활동가로 소개하는 것과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 활동가로 소개하는 건 전혀 다른 의미이다. “지렁이”가 붙는 순간, 학술포럼에선 “격이 떨어진다”는 것. 즉, 루인을 “성전환자인권연대 산하 젠더이론및정책연구소 연구원”(낄낄낄 -_-;;)이란 식으로 소개한다면 사람들이 루인의 말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

“지렁이”란 이름을 빼라고 말한 그 활동가는 바로 이런 이유였다. 그 단체 활동가들 역시 이런 문제를 너무도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같은 얘기를 해도 단체이름으로 소개할 때와 어느 대학의 박사과정으로 소개할 때,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한다고 분개하곤 했다. 포럼에서 단체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발표를 하면, 소위 교수나 학교의 연구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네가 아직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거야”란 식으로 반응한다며. 학교가 아니라 단체이름으로 소개할 때에도, “○○정책개발연구소”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의 말에 더 집중하고.

어쩌다보니 지렁이 활동가 중, 루인의 명함에만 “학술정책팀장”이란 직함이 적혀있는데(*부들부들* 하지만 루인의 잘못이었다는 거-_-;;), 다른 누군가와 한참 이야기를 하고 나서, 루인의 명함을 주면, 바로 이 직함 때문에 반응이나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걸 느낄 때가 있다. 그러니 단체 이름이나 소속에 따라 사람들이 얼마나 다르게 반응할 지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최근 신정아씨에 이어, 위에 링크한 기사를 읽으며 심란한 몸이다. 비록 학력을 거짓으로 얘기한 것이 잘못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비난 받을 일인지,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에서 중도하차를 운운할 만큼의 큰일인가 싶기도 하다. 이지영씨가 처음부터 자신을 고졸이라고 얘기했다면 “연세대 외국어학당과 이익훈 어학원”에서 영어강의를 할 수 있었고 “‘굿모닝 팝스’의 진행자”로 발탁될 수 있었을까? 글쎄.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학벌과 학력이 중요한 판단기준인 한국사회에서, 이른바 네임밸류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사회적인 맥락에서, 학력을 허위기재하는 일이 발생하는 건데. 그래서 “청취자들에게 거짓말을 했다”라고 말하며 분개하는 반응은, “단순히 거짓말”해서가 아니라, 다른 무엇도 아닌 “학력”을 허위조작해서 분개한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정치권력의 정점이라고 일컫는 대통령도 고졸이란 이유로 무시 받으니 오죽하랴. 그래서 이번 일련의 일들은, 단지 허위기재라는 “거짓말”이라기보다는, 한국사회에서 학력과 학벌이 실력에 선행한다는 걸 드러내는 일로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