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한 곳에 오래 머물면, 원치 않을 때에도 그곳 사람들의 권력관계부터 내부 사정까지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나 그곳 사람들 사이에서, 권력이 누구에게 집중되어 있는지 혹은 누구의 발언권이 가장 센지를 알게 된다는 건 결코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발언권이 가장 세고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사람에게 붙게 되어서가 아니다(알면서도 찍힐 행동을 했다는… -_-;; 크크크).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알게 되고, 행여 말을 했고 그리하여 당장은 효과가 발생했다 해도 결국 나중에 어떤 형태로건 후폭풍을 경험한다는 걸 알기에, 애초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이 가장 슬프다.

예전에 한 수업시간에, 같은 수업을 듣던 사람이 “박사를 취득하고 모교에서 교수가 되는 로망이 있다”고 했다. 그러자 그 수업의 선생님은, 말린다고, 모교에서 교수가 안 되는 게 가장 좋다고 얘기했다. 요즘 들어, 어렴풋이 선생님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짐작하고 있다.

낄낄

버틀러고 해러웨이고 간에,

玄牝에 도둑 들었대요. ㅋㅋㅋ

농담 아니고 진짜요. 풋.

[#M_ +.. | -.. |
해러웨이 글을 다 썼을 때, 전화가 와서 받으니 집주인. 아주 다급한 목소리로 도둑이 들었다고 얼른 오라고 하더라고요. 컴퓨터는 그대로 있는데 없어진 것이 있는지 확인하라고 하더라고요. 玄牝으로 돌아오며, 허허, 웃었어요. 책이랑 CD랑 몇 안 되지만 DVD 밖에 없는 방인데, 괜히 들어 오셨구나, 했죠. 정말 도둑맞은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저축이 없으니 도둑맞을 통장이 있을 리 없고, 당연히 꿍쳐둔 현금도 없거든요. 크크크. 근데 웃긴 건, 루인에겐 나름 꽤나 비싼 귀걸이가 몇 있는데, 모조와 같이 보관했더니 모두 모조로 취급한 것 같더라고요. 이건 왠지 씁쓸… (응?)

도둑 들었다는 집주인의 전화를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게 먼지 아세요? 크크크. 믿거나 말거나, “앗싸, 블로그에 글 쓸 거리 생겼다!” 낄낄 -_-;; 아무려나 지금은 오랜 만에 대청소 중이랍니다. 지금은 잠깐 쉬는 중이고요. 흐흐흐._M#]

해러웨이, [한 장의 잎사귀처럼]

다나 J. 해러웨이 & 사이어자 N. 구디브 [한 장의 잎사귀처럼] 민경숙 옮김, 서울: 갈무리, 2005 [Donna J. Haraway, How Like a Leaf: An Interview with Thyrza Nichols Goodeve, New York & London: Routledge, 2000]

해러웨이 글은 읽기 수월한 편은 아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미국 학자들 중 읽기 쉽지 않은 사람들이 몇 명 있긴 하다. 버틀러가 그렇고 해러웨이가 그렇다. 하지만 버틀러는 인식론이 낯설어서 어렵다고 느낄 수는 있어도 문장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니다. 반면 해러웨이는, 아직은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루인에겐, 좀 많이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해러웨이를 읽다보면 문장의 어려움 보다는, 용어의 낯설음으로 인해 어렵다고 느끼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곤 한다. 학문 간의 구분이 분명하고, 고등학생 시절 문과를 나오면 과학이나 수학을 모르는 게 당연한 것 같고, 이과를 나오면 문학을 모른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맥락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해러웨이가 어렵다면, 생물학을 비롯한 다양한 과학 분야의 언어들을 같이 사용하기 때문일 것 같다는 고민을 잠깐 했다. 사람들과 어떤 얘기를 나눌 때면 가끔씩 수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이나 상상력으로 설명할 때가 있는데(일테면 미적분이나 위상수학 등등), 이럴 때면 내용 자체는 무척 쉬운데 수학용어를 사용해서 사람들이 당황하고, 그래서 어렵다고 반응하는 걸 몇 번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반응이 낯설어서 어느 순간부터 수학을 매개로 하는 설명을 하지 않는다.) 사실 해러웨이를 읽다보면 *의외로* 안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장의 잎사귀처럼]은 어렵다. 근데 이 책이 어려운 건, 내용의 어려움보다는 번역으로 인한 것 같다. 이 책은 해러웨이를 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좋은 입문서가 될 수도 있을 책인데, 번역서를 읽고 있으면 영어본을 찾아서 대조하면서 읽고 싶은 충동이 든달까. -_-;;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은 예전에 해러웨이의 다른 책,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를 번역한 사람인데, 수업발제로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에 실린 “사이보그 선언문”을 읽으며, 처음엔 번역문을 읽다가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어 번역본을 포기하고 눈물을 머금으며 영문을 꺼냈던 적이 있다. 근데 영문을 읽으니 무슨 소린지 알겠더라는 슬픈 전설이… ;; 그래도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에 비해 [한 장의 잎사귀처럼]은 어느 정도는 읽힌다. 하지만 마냥 번역자를 탓하기가 어려운 건, 해러웨이 자신의 문장이 번역하기 쉬운 문장이 아닌 이유도 있고, 번역 자체가 쉬운 일도 아니니까.
수업발제를 위해 번역을 몇 번 하면서, 번역자를 탓하거나 번역이 별로라는 말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번역에 문제제기를 하려고 할 때마다, 루인의 번역문이 떠올라서-_-;;; 흐흐흐.

루인에겐 해러웨이가 각별한데, 비단 루인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미국 트랜스 연구에서도 해러웨이는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할 수 있다. 트랜스 연구의 중요한 출발점이랄 수 있는 샌디 스톤(Sandy Stone)의 논문 “제국의 역습”이이 해러웨이의 글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고(스톤은 해러웨이의 제자이기도 하다), 해러웨이의 “괴물”이 트랜스에서 해석하는 괴물에 영향을 주기도 했고 겹치기도 한다. 처음 “사이보그 선언문”을 읽었을 때, “이건 거의 트랜스연구이기도 하잖아”라고 맥락 없이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트랜스와 관련해서 루인이 처음으로 쓴 논문 역시 “사이보그 선언문”에 상당히 빚지고 있고.

하이데거가 구영어인 thencan, 즉 “to think”와 thancian, 즉 “to thank”가 같은 어원에서 나왔음을 밝히고, “사유”와 “감사”가 공유하고 있는 어원이 가장 깊은 의미의 사우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전개시킨 곳이 바로 이 부분이지요.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사유를 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사유를 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언제나 그가 읽었거나 그에게 영향을 준 사상들과 다른 것을 발전시키고 있는 거니까요.
그러므로 최고의 감사는 사유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심오한 배은망덕은 사유하지 않음이 아닐까?
– 54~55:구디브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면 감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관계도 없는 거지요. 질병은 관계입니다.
– 131: 해러웨이

그리고 나서 카피(the copy)와 실물(the original)의 문제라는 견지에서 코드화되지요. 어떤 것을 본다는 과정은 언제나 보는 것을 잘못 본다는 문제를 수반해요. 그것은 똑같은 것인가? 혹은 다른 곳에 옮겨진 똑같은 것인가? 그 카피는 정말로 실물의 카피인가?
-170~171: 해러웨이

[회절을 설명하며] 빛이 작은 틈새를 통과하면, 통과한 광선들은 분산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실히 알기 위해 한 끝에 스크린을 놓으면, 그 스크린 위에 광선이 지나가는 길의 기록을 얻게 되지요. 이 “기록”은 틈새를 통과하는 그 광선들의 길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반사를 얻는 게 아니라 길의 기록을 얻는 거지요.
(…)
저는 그녀가 착용하고 있던 핀을 그 컨텍스트로부터 옮긴 게 아녜요. 그 안전핀에 훨씬 더 많은 의미와 컨텍스트들이 있으며, 일단 당신이 그것들에 주목하면 그냥 누락시킬 수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말하자면, 단지 회절 시킨 거지요. 당신은 그 “간섭”을 등록해야 해요. 이것이 나의 작업방식이며, 내가 즐기는 방식이라고 느낍니다. 그것은 하나의 물건 속에서 그동안 잃어버린 것들을 보이게 만드는 단순한 일이지요. 다른 의미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게 아니라, 결론이 단 하나의 진술이 되는 걸 불가능하게 만드는 겁니다.
-172, 174: 해러웨이

먼저 그런 비판을 하지 않으면 바보처럼 보일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저는 정말로 고약한 인종정치가 이와 똑같은 원칙에서 작용한다고 생각해요. 자신들이 인종차별주의로 비난받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먼저 고의적으로 인종주의자라고 부르는 거지요. 그것은 마치 인종차별주의가 몇 가지 진술로 쉽게 물리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아요. 다양한 진언(眞言)으로는 인종차별주의를 없앨 수 없어요. 혹은 이 논문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인종을 다루지 않았다고 지적한 후 다시 앉아서 그런 주의를 해주었으니까 이제 나는 자유다 라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인종차별주의를 없앨 수 없지요. 달리 말하자면, 나는 거기에 있지 않으니까 나는 자유다 라는 식으로는 안 된다는 겁니다.
-184~185: 해러웨이

목격은 보는 것이고; 증언하는 것이며; 서서 공공연하게 자신이 본 것과 묘사한 것을 해명하는 것이며, 자신이 본 것과 묘사한 것에 심적으로 상처받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245~246: 해러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