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

조금 전, 다시 [밀양]을 읽고 왔다. 며칠 전에 읽은 영화인데, 전혀 다른 내용처럼 낯선 장면들 혹은 느낌들도 있었다. 아주 당연한 현상이지만.

기말 논문으로 사용할 텍스트를 결정했다. [트랜스아메리카]와 [미녀는 괴로워] 두 편. 영화를 읽는 도중에 한 가지 질문이 불쑥 튀어 올랐다. “[밀양]을 서사로 분석할 때, 페미니즘이나 젠더논의에 ‘기여’하는 측면은?” 이 질문에 막막함을 느꼈다. 만약 [밀양]을 분석한다면 이건 순전히 루인을 설명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할 뿐이다. 더군다나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하는 이론적인 틀에서 더 적절한 텍스트는 [밀양]이 아니라 [트랜스아메리카]와 [미녀는 괴로워]이고. 다행인 건, 둘 다 좋아하고 한 번 분석하고 싶은 텍스트라는 점. 다만 이 두 텍스트를 피하고 싶은 바람이 컸는데…. 루인이 트랜스(젠더) 이론을 전공으로 하고 있다는 걸 선생님이 알고 있는 상황에서, 만약 기말논문을 이 주제로 쓸 때, “그럴 줄 알았어”라는 반응 혹은 “당연히” 이 주제로 글을 쓰겠지라는 예측을 배신하고 싶은 바람. 언제나 이런 바람과 어떻게 협상할 것인가가, 루인의 관건이다.

[밀양]을 읽으며, 이신애가 나오는 장면마다 모두 소유하고 싶다는 바람이 들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절실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금 이 영화를 “분석”하는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이신애에게 너무 붙어서 거리두기를 할 수가 없었다. 건조한 거리두기가 필요한데, 지금으로선 넋두리로 끝날 것 같다. 넋두리가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단 게 아니라, 제출해야하는 글의 형식 때문에. 아무튼 다시 읽은 [밀양]은 내일.

낮은 그늘을 따라

길은 두 갈래였다. 어느 쪽으로 가도 거리는 비슷했다. 그래도 자주 가는 길은 있기 마련. 왜 그 길로 다녔을까? 다른 길도 있는데 왜 그 길로 다녔을까. 한참 지난 지금에야 묻는다, 왜? 그렇게 항상 다니던 길이 있지만, 태양볕이 뜨거운 여름이면 다른 길로 다녔다. 주택가 낮은 그늘을 따라 걸었다. 낮은 그늘을 따라 무더운 태양볕을 피해 걸었다. 그러니 여름뿐이었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꽤 오랫동안 그곳에 서 있곤 했다. 태양볕을 좋아한다. 그때도, 지금도. 눈을 뜨고 태양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한다. 눈이 아파도, 그래서 눈물이 날 때에도 자꾸만 태양을 바라봤다. 종점이기도 한 정류장에서 버스가 오길 기다렸지만, 정말 기다린 건 버스가 아니었다. 여름이었고 태양볕이 따갑다고 느껴지면, 나무 아래에 서 있기도 했다. 태양을 보면서도 그 길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니, 그 몇 번은 모두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의 일이었다.

10년도 더 지난날들. 몇 해 전부터인가, 태양볕을 맞으며 걷기 좋아하는데도, 이렇게 여름이 오면 낮은 그늘을 따라 걷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넓은 그늘이 아니라 태양볕을 간신히 피할 수 있을 것 같은 낮은 그늘로 걷기 시작했다, 그때, 손으로 태양볕을 가리며 낮은 그늘로 걷던 너처럼. 그리고 몇 년을 기다리며, 그 버스정류장에서 태양과 골목 사이를 어슬렁거리다 나무 아래 숨어 숨막혀하던….

준, 그리고 신애가 코고는 소리를 내는 장면들. 그리고 태양볕의 서늘함 혹은 스산함.

낮은 그늘을 따라 걸으면 나오는 기억들.

영화: 기말레폿과 읽고 싶은 영화

01
바야흐로 기말논문을 제출할 시간이 다가왔다. 뭐, 요즘의 루인이야 개별연구로 읽고 있는 몇 권의 책 덕분에 정신이 없지만 이런 와중에도 기말논문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정해진 주제는 없으며 조건은 텍스트 분석. 원하는 텍스트를 수업시간에 배운 이론이나 수업시간에 배우지 않았더라도 원하는 이론으로 분석하는 글. 분량은 A4지로 7장정도.

이렇게 선택의 폭이 넓으면 욕심이 마구마구 생긴다. 학기 초만 하더라도 배수아 소설을 분석해볼까, 했다. 채식과 섹슈얼리티로 분석하면 재밌겠다 싶었거든. 영화 [300]을 분석하는 쪽글을 썼을 땐, [300]과 [음란서생]을 분석하는 글을 쓸까 했다. 상당히 진부하긴 해도, 게일 러빈(Gayle Rubin)과 버틀러(Judith Butler)를 정리한다는 기분으로 한다면, 깔끔한 논문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최근 히치콕의 [새]를 분석하는 쪽글을 썼을 땐, 이 영화를 분석하는 글을 써도 재밌겠다 싶었다. 버틀러와 프로이트, 리비에르, 에델만을 끌어들이면 무난한 기말논문을 구성할 수 있겠다 싶다. 특히나 초기 아이디어를 수업시간에 얘기했을 때 선생님이 “기발하다”란 얘길 했으니, 한 번 해봐도 재밌을 듯.

하지만 루인은 이미 한 번 언급한 텍스트를 다시 분석하는 걸 무척 지루해 한다는 거. 그래서 요즘의 관심은 [밀양]이다. 우울증과 서사(변형)구성(trans/forming)으로 [경우에 따라 언어사용과 공간에서의 위치도 함께] 분석하면 정말 재밌겠다 싶다.

아, 얼른 정해야 할 텐데. 아무래도 [새]와 [밀양] 중에서 결정할 것 같은데, 어떤 텍스트를 해야 무척 신날까?

02
요즘 읽고 싶은 영화는 네 편.

영화잡지에서 접할 수 있는 [트랜스포머]. 자동차가 로봇으로 변신해서 우주로봇과 싸운다는 얘기. 이런 영화에 관심이 없어 개봉예정인 줄도 몰랐고 영화잡지에서 제목을 접했을 때도 무시했는데, 문득 이 영화를 읽어야지 한 건 제목 때문. 트랜스포머transformers. 첨엔 이 영화에 심드렁했는데, transform(er)이 트랜스젠더 이론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이기도 하단 걸 깨달았을 때, 운 좋으면 의외로 재밌는 지점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생겼다. 어이없겠지만 이런 이유로 [트랜스포머]를 읽기로 했다. 개봉예정일은 6월 28일.

[뜨거운 녀석들]도 극장홍보영상을 읽으며 “볼까?”하는 바람이 생겼달까. 아직은 모르겠지만 의외로 재밌는 지점이 있을 것 같다는 어떤 예감. 의외로 재밌는 지점이 없더라도 가끔은 이런 영화를 읽고 싶은 바람이 생기기도 한다. 실제 읽을지 안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개봉예정일은 6월 21일.

[열세살, 수아]는 상당히 끌리는데, 상영중인 극장이 멀다. ㅠ_ㅠ 더군다나 [열세살, 수아]를 상영하는 프리머스의 홈페이지가 바이러스와 스파이웨어를 유포하는 것 같아 접속하기가 상당히 꺼려져서 극장 위치를 찾기도 힘들고. 아, 그러고 보니 스폰지하우스에서 상영하는구나. 우후후. (근데 언제가지? -_-;;) 지금 상영 중.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스파이더 릴리]가 다음 주에 개봉한다! 오랜만에 씨네큐브에 가야겠다! 유후! 개봉예정일은 6월 21일.

한동안 영화관에 안 갔더니 갑자기 영화관에 가고 싶은 바람이 마구마구 생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