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호명하지 않기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말은 나의 어떤 정치적 지향, 입장 등을 지칭한다. 나는 트랜스페미니스트란 말은 앞의 말과 겹치는 듯 겹치지 않는 듯하면서도 나의 정치적 입장을 밝힌다. 하지만 나는 트랜스젠더퀴어란 말은 나의 정치적 입장을 말해주지 않는다. 나의 위치성은 말해줄 수 있을지 몰라도 나의 정치학이나 지향하는 바는 말해주지 않는다. 트랜스젠더퀴어란 말은 ‘나는 (비트랜스)여성이다’라고 말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다르고 그래서 나의 위치를 드러내는 언설일 수 있지만 내 정치학을 말해주진 않는다.

그런데 나의 정치학은 내가 나를 트랜스페미니스트다, 퀴어페미니스트다라고 말한다고 해도 표현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란 말 자체가 다종다양한 정치학을 포괄하는 언어다. 페미니즘의 역사는 다양한 입장이 경합한 역사고 여성 혹은 페미니스트가 결코 단일 집단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래서 많은 수식어가 등잔했다. 하지만 트랜스페미니스트란 말은 내 정치학의 일부만을 나타낼 뿐이다. 예를 들어 나는 이 블로그에서 특정 정당 지지를 거의 표현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아마도 누구도 내가 최소한 새누리당을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어떻게 보장되는가? 내가 트랜스젠더퀴어란 점, 내가 트랜스페미니스트란 점, 내가 비판연구자란 점이 나의 정당 지지나 정당정치 성향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종종 나는 무엇이다란 선언을 피하려는 편이다. 트랜스페미니즘이 입장론이자 세계를 이해/해석하는 입장이라면 나는 나를 트랜스페미니스트로 어떻게 선언할 수 있는가란 어떤 곤란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종종 “나는 ##주의자다”와 같은 말은 본인이 직접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타인의 평가여야 하지 않을까란 고민을 한다. 나의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동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언제나 두렵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지향하는 정치학을 충분히 실천하고 사유하는가란 의심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하는 말이, 아니 내가 평가하기에 나는 늘 나 자신을 새롭게 하는데 게으른 보수주의자가 아닐까 정도다.
물론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때로 나는 트랜스페미니스트라고 밝히는 것이 매우 중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언설 자체를 회의하진 않는다. 그저 나를 회의할 뿐이다.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고 쪼렙에 불과하고 잘 모르겠다.

스톤월이란 신화 : 역사를 가정하기

작년 퀴어문화축제의 부스행사 및 퍼레이드 행사가 6월 28일에 진행된다고 발표되자, 스톤월 항쟁이 발생한 날과 같은 날이라며 기뻐하는 반응을 몇 사람에게서 접했다. 왜 그 둘을 연결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그것이 왜 기쁜 일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한국의 적잖은 LGBT/퀴어 구성원이 스톤월 항쟁을 마치 한국 LGBT/퀴어 운동의 신화적 기원이자 직접적 기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듣곤 한다. 답답하다. 한국에서 탈식민 LGBT/퀴어 운동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반드시 한국의 역사를 팔 이유는 없으며 한국의 역사를 조사하는 작업이 반드시 탈식민은 아니지만 왜 상상력과 지식의 기원이 미국 뉴욕에 가 있는 것일까?

얼마전 1990년대 중반 자료를 살피다가 스톤월 항쟁을 언급하는 글을 읽었다. 그러며 스톤월 항쟁의 의미를 살피는 토론회 자리도 만들었음을 확인했다. 내가 읽은 자료에선 스톤월 항쟁을 알고서 정말 기뻐하는 어떤 감정이 느껴졌다.
나는 이 두 상황이 전혀 다른 상황이라고 고민한다. 1990년대,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자료 찾기가 수월하지 않던 시대, 미국 등 외국 자료를 구하기 위해선 해당 국가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과 연결이 되어서 편지로 정보를 주고 받던 시대에 스톤월 항쟁의 의미는 지금과 다르다. 물론 몇몇 활동가가 미국의 퀴어 이론을 열심히 소개했으니 정보가 부족했다고 믿지는 않지만,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원한다면 아마존에서 도서를 바로 주문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으니까). 아울러 LGBT/퀴어 운동을 이제 시작했다고 믿는 당시에 외국의 항쟁 소식은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시대의 스톤월 항쟁 소식 및 의미와 2010년대에도 여전히 스톤월 항쟁을 마치 자신의 신화적 기원이자 힘으로 삼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래서 가정하고 싶다.
만약 1990년대 초중반 운동을 시작했던 활동가가 스톤월 항쟁 소식에 기뻐하고 그 의미를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동시에 1990년대 이전의 역사를 살피는 작업을 진행했다면 어땠을까? 물론 그때도 지금도 1990년대 이전의 자료에 접근하기 어려웠겠지만 누군가 한 명이라도 그 작업을 진행해서 한국 LGBT/퀴어의 역사를 탐문하는 작업을 진행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크지는 않지만 뭔가 조금은 달랐을 수도 있다고 기대한다. 한국 LGBT/퀴어의 운동과 그 기원(언제나 신화적이고 망상적인 그 기원)을 조금은 다르게 생각했을 테니까. 물론 하지 않았다고 아쉬워할 일은 아니다. 역사 연구를 비롯한 어떤 연구 작업 자체가 임계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0년 전만 해도 지금처럼 많은 퀴어 연구자가 등장하리라 생각 못 했다. (사실 더 많은 연구자가 등장할 거라고 망상했다… 호호호) 그러니 그때 왜 그러지 않았냐고 물을 수는 없다. 그저 그때 바로 한국 퀴어 역사를 연구하는 작업을 했다면 어땠을까 싶을 뿐이다.

정말 번역책이 나오는 걸까

아는 사람은 알지만 나는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번역을 정말 못 한다. 한국어로 글을 쓸 때의 그 문장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 영어를 한국어로 우선 번역을 해줘야 뭔가 작업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영어에 짓눌릴 때가 많지만. 이런 이유로 나는 내가 어떤 책을 번역할 수 있을 거라고 고민하지 않았다. 엄두를 못 냈다. 그런데 기회가 왔다. 좋은 공동 번역자를 만났고 그래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물론 한국어로 표현하는 과정에선 서로의 의견 차이가 분명 존재했지만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쩌면 거의 마지막일 교정 작업을 했다. 출판사에서 얼추 디자인이 끝난 교정지를 받았고 거기서 수정할 다양한 사항을 체크해서 조금 전 넘겼다. 조금 무섭기도 하고 염려가 되기도 한다.
조금의 위로라면 역주를 열심히 썼다는 점이다. 2~3년 전 작성한 역주를 지금 다시 확인하며 ‘뭘 이렇게까지 역자주를 달았나’란 말이 나오기도 했다. 스트라이커의 책은 분명 입문서고 쉬운 내용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맥락과 설명이 누락되곤 했다. 그래서 그 공백을 채울 필요가 있었다. 물론 공백을 채우는 과정에서 많은 오류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 나의 착각이 있을까봐 염려도 된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노력은 했다.
그럼에도 정말 괜찮을까란 고민을 했다.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고 얼추 2~3년이 지났으니 내가 먼저 출판사에 연락했을 법도 하다. 그런데 어지간하면 그러지 않았다. 그냥 기다렸다. 어쩐지 두렵기도 했다. 번역 작업 자체가 내겐 크나큰 부담이라 생기는 두려움도 있었다. 다른 사람의 번역을 읽으며 구시렁거리곤 했는데 공동 번역이지만 어쨌거나 내가 책임을 진 번역 판본을 읽으며 다른 누군가가 구시렁거릴 것이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번역 작업을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대단하다고 고민한다. 번역 작업을 좋아하는 E를 존경한다. 내겐 가장 두렵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빠르면 이번 주, 늦어도 다음 주 초에는 책이 나올 것 같다. 걱정이다.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