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왜 하는 것일까?

그냥 잡스런 상념.

무척 단편적이지만 이성애로 가정하는 결혼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을 우연히 볼 때면 종종 저 두 사람은 왜 결혼 관계를 유지할까 진심으로 궁금하다. 여성으로 드랙하는 사람은 많은 대화를 시도하지만 남성으로 드랙하는 사람은 대꾸 한두 마디를 겨우 한다. 대화가 없는 관계. 물론 결혼 관계에 있는 여성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는 “우리 대화 좀 해”라고 하고 남성이 가장 무서워 하는 말 중 하나가 “우리 대화 좀 해”라고 들었지만 정말 어떤 소통이나 감정적 연대가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니까 결혼을 통한 가족의 구성은 감정적 연대, 정서를 공유하는 집단, 대화하는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란 뜻이다. 그것은 결혼이라는 긴밀한 관계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결혼을 유지하는 조건이 아니다.
물론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가 지적하듯 한국에서 결혼 관계는 외도를 통해 유지되고 있다. 외도가 결혼과 이성애-가족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니 결혼에서 기대하는 것은 ‘따뜻한 나의 집’이 아니다. 물론 남성으로 드랙하는 사람 다수는 결혼을 통해 가사 노동을 무임으로 해줄 사람을 찾는 거겠지만. 그렇다면 여성으로 드랙하는 사람은 왜 결혼을 하는 거지?
언젠가 한 수업에서 이와 관련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땐 경제 문제로 얽혀 있는 관계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이미 결혼을 한 상황에서 얽혀 있는 경제 문제가 아니라면 결혼 관계를 유지할 이유도, 결혼 자체를 할 이유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덧붙이면 이성애 규범성의 수행이다. 결혼을 해야 한다는 강력한 규범을 실천하며 무언가를 증명하고 생애주기를 수행하는 것이다. 즉 결혼은 이성애 규범적 시간성을 수행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것을 다시 동성결혼으로 연결시켜보자. 나는 도대체 왜 결혼을 하려는지 이해를 못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이 동성결혼이 가능해지면 할 의사가 있음을 알고 놀랬다. 왜 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있어 왜 결혼이 필요한지, 결혼이란 형식을 거치고 싶은지 그 욕망을 이해할 수 없고 그 필요성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도적 혜택이 문제라면 결혼이 독점하는 제도적 혜택을 재구성할 문제이지 동성결혼으로 획득할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이해하지 못 한다. 무엇보다 동성결혼을 가장 중요한 의제로 삼는 사람들의 이기적 태도를 이해하지 못 한다. 그렇게 해서 무엇이 더욱 가치 있어지는지 알 수 없다. 결혼만으로 가치를 가지는 것이 무엇인가? 왜 그 가치를 유지시키는 방식으로 삶을 구축하고 운동의 전망을 설정하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이것은 내가 어떤 식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며 내가 한 번도 욕망한 적 없는 일이다. 그래서 궁금하다. 비판 정치학에서, 퀴어 정치학에서 결혼이 왜 가치 있는 의제인가가.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와서. 결혼을 지속시키는 힘/권력은 무엇일까? 결혼이 결코 둘 사이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행사가 아님에도 결혼 관계를 유지하는 동력은 무엇인가? 그 동력, 힘, 이득은 LGBT가 아니라 퀴어에게 어떤 의미와 규범성으로 작동하는가? 결혼 자체가 아니라 결혼을 통해 얻는 이득은 왜 퀴어를 어떻게 위태롭게 하는가?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이미 누군가가 했을 질문이다. 다양한 분석도 나와 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궁금하다.

나를 호명하지 않기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말은 나의 어떤 정치적 지향, 입장 등을 지칭한다. 나는 트랜스페미니스트란 말은 앞의 말과 겹치는 듯 겹치지 않는 듯하면서도 나의 정치적 입장을 밝힌다. 하지만 나는 트랜스젠더퀴어란 말은 나의 정치적 입장을 말해주지 않는다. 나의 위치성은 말해줄 수 있을지 몰라도 나의 정치학이나 지향하는 바는 말해주지 않는다. 트랜스젠더퀴어란 말은 ‘나는 (비트랜스)여성이다’라고 말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다르고 그래서 나의 위치를 드러내는 언설일 수 있지만 내 정치학을 말해주진 않는다.

그런데 나의 정치학은 내가 나를 트랜스페미니스트다, 퀴어페미니스트다라고 말한다고 해도 표현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란 말 자체가 다종다양한 정치학을 포괄하는 언어다. 페미니즘의 역사는 다양한 입장이 경합한 역사고 여성 혹은 페미니스트가 결코 단일 집단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래서 많은 수식어가 등잔했다. 하지만 트랜스페미니스트란 말은 내 정치학의 일부만을 나타낼 뿐이다. 예를 들어 나는 이 블로그에서 특정 정당 지지를 거의 표현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아마도 누구도 내가 최소한 새누리당을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어떻게 보장되는가? 내가 트랜스젠더퀴어란 점, 내가 트랜스페미니스트란 점, 내가 비판연구자란 점이 나의 정당 지지나 정당정치 성향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종종 나는 무엇이다란 선언을 피하려는 편이다. 트랜스페미니즘이 입장론이자 세계를 이해/해석하는 입장이라면 나는 나를 트랜스페미니스트로 어떻게 선언할 수 있는가란 어떤 곤란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종종 “나는 ##주의자다”와 같은 말은 본인이 직접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타인의 평가여야 하지 않을까란 고민을 한다. 나의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동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언제나 두렵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지향하는 정치학을 충분히 실천하고 사유하는가란 의심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하는 말이, 아니 내가 평가하기에 나는 늘 나 자신을 새롭게 하는데 게으른 보수주의자가 아닐까 정도다.
물론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때로 나는 트랜스페미니스트라고 밝히는 것이 매우 중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언설 자체를 회의하진 않는다. 그저 나를 회의할 뿐이다.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고 쪼렙에 불과하고 잘 모르겠다.

스톤월이란 신화 : 역사를 가정하기

작년 퀴어문화축제의 부스행사 및 퍼레이드 행사가 6월 28일에 진행된다고 발표되자, 스톤월 항쟁이 발생한 날과 같은 날이라며 기뻐하는 반응을 몇 사람에게서 접했다. 왜 그 둘을 연결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그것이 왜 기쁜 일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한국의 적잖은 LGBT/퀴어 구성원이 스톤월 항쟁을 마치 한국 LGBT/퀴어 운동의 신화적 기원이자 직접적 기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듣곤 한다. 답답하다. 한국에서 탈식민 LGBT/퀴어 운동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반드시 한국의 역사를 팔 이유는 없으며 한국의 역사를 조사하는 작업이 반드시 탈식민은 아니지만 왜 상상력과 지식의 기원이 미국 뉴욕에 가 있는 것일까?

얼마전 1990년대 중반 자료를 살피다가 스톤월 항쟁을 언급하는 글을 읽었다. 그러며 스톤월 항쟁의 의미를 살피는 토론회 자리도 만들었음을 확인했다. 내가 읽은 자료에선 스톤월 항쟁을 알고서 정말 기뻐하는 어떤 감정이 느껴졌다.
나는 이 두 상황이 전혀 다른 상황이라고 고민한다. 1990년대,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자료 찾기가 수월하지 않던 시대, 미국 등 외국 자료를 구하기 위해선 해당 국가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과 연결이 되어서 편지로 정보를 주고 받던 시대에 스톤월 항쟁의 의미는 지금과 다르다. 물론 몇몇 활동가가 미국의 퀴어 이론을 열심히 소개했으니 정보가 부족했다고 믿지는 않지만,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원한다면 아마존에서 도서를 바로 주문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으니까). 아울러 LGBT/퀴어 운동을 이제 시작했다고 믿는 당시에 외국의 항쟁 소식은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시대의 스톤월 항쟁 소식 및 의미와 2010년대에도 여전히 스톤월 항쟁을 마치 자신의 신화적 기원이자 힘으로 삼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래서 가정하고 싶다.
만약 1990년대 초중반 운동을 시작했던 활동가가 스톤월 항쟁 소식에 기뻐하고 그 의미를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동시에 1990년대 이전의 역사를 살피는 작업을 진행했다면 어땠을까? 물론 그때도 지금도 1990년대 이전의 자료에 접근하기 어려웠겠지만 누군가 한 명이라도 그 작업을 진행해서 한국 LGBT/퀴어의 역사를 탐문하는 작업을 진행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크지는 않지만 뭔가 조금은 달랐을 수도 있다고 기대한다. 한국 LGBT/퀴어의 운동과 그 기원(언제나 신화적이고 망상적인 그 기원)을 조금은 다르게 생각했을 테니까. 물론 하지 않았다고 아쉬워할 일은 아니다. 역사 연구를 비롯한 어떤 연구 작업 자체가 임계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0년 전만 해도 지금처럼 많은 퀴어 연구자가 등장하리라 생각 못 했다. (사실 더 많은 연구자가 등장할 거라고 망상했다… 호호호) 그러니 그때 왜 그러지 않았냐고 물을 수는 없다. 그저 그때 바로 한국 퀴어 역사를 연구하는 작업을 했다면 어땠을까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