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을 가면/가장으로 읽기

지난 주 수업시간의 주제는 대중 문화 속에서 가면 혹은 가장masquerade하고 있는 텍스트들을 분석해서 각자 발표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메종 드 히미코]를 분석할까 했지만, 안 본 사람이 많을 것 같아, [300]과 [음란서생]을 텍스트로 선택했다(결과적으론, 이 영화를 다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래에 있는 글은 이 두 텍스트 분석 중에서 [300]을 분석한 부분. 물론 전쟁영화가 “남성동성욕망”을 너무도 공공연히 드러낸다는 지적은 너무도 진부하지만, 그래도 이런 지점들을 분석해서 얘기하는 작업이 재밌긴 하다. 사실 이번 글은 쪽글로 쓰면 된다는 점에서 일부러 부담없는 텍스트를 고른 것이기도 하고, 부담이 없다는 점에서 뭔가 상상력을 맘껏 펼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상상력 역시 기존의 앎 혹은 지식에 토대를 둔 것이긴 하지만. 아무려나, 몇몇 지점들이 재밌어서 이렇게 올리지만, 솔직히 뒷감당할 자신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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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으로서의-여성woman-as-object”을 통해 “남성동성애” 욕망을 드러내는 텍스트는 실로 넘치는데, 거의 모든 전쟁영화는 “남성동성애”를 “이성애”로 가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개봉해서 많은 논란을 일으킨 영화, <300>은 이런 지점이 너무도 노골적이어서 가장masquerade을 하고 있다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게이”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스파르타의 왕이 페르시아에 조공하길 거부하며 하는 말은 “남색자”들의 아테네도 조공하길 거부했는데, 스파르타가 조공할 수 있겠느냐, 이다. 그러며 스파르타 “남성”들의 우월성, 이성reason을 엄청 강조한다. 하지만 왕의 모든 행동은 실제 여왕의 승인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페르시아 사신들을 죽이는 것도, 페르시아 군대를 막기 위해 출전하는 것도 여왕의 승인 하에 이루어진다. 이 지점은 이중적인데 한 편으론 “남성은 이성적이고 독립적이다”란 언설이 작동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지점이며, 다른 한편으론 “왕 혹은 페르시아 남성은 이성애자다”(왕을 부르며 사용하는 영어와 스파르타 “남성”을 부르며 사용하는 영어는 모두 스파르탄Spartan이다)라는 항변이자, 연막을 치는 부분이다. 전자는, 모든 행동은 “여성”의 승인을 통해 이루어고 그리하여 사실상 “남성”이 “수동”적인 존재이지만 “남성들은 독립적이란 환상”을 통해 “전사”가 되는 과정을 드러낸다. 후자의 경우엔, 왕(혹은 스파르타 “남성”)은 “이성애자”란 식의 가장을 반복함으로서 “남성”들 간의 애정을 우정으로 치환하고자 한다(물론 애정과 우정의 경계가 명확한 건 아니지만).

실제 이 영화에선 세 쌍의 “게이”커플이 등장한다. 왕과 왕의 가장 절친한 친구로 나오는 장군, 장군의 아들과 그 아들의 파트너, 전쟁 결과를 알려주기 위해 마지못해 스파르타로 가는 군인과 왕. 이들의 노골적인 욕망은 전쟁이라는 위기상황과 “우리는 결혼을 했고 자식이 있으니 이성애자다”라는 가정을 통해 가리고자 할 뿐이다.

다른 한편, 이 영화의 “남성동성욕망”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른바 체육관게이와 ‘끼순이’ 사이의 애증관계랄까. 스파르타 군인 300명이, 우람한(징그러운?) 근육을 통해 게이의 “남성성”을 과시하고 있다면(근육질은 “이성애 남성”의 전유물인 것처럼 그린다는 점에서 리비에르의 지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는 끼순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해도, “게이는 여성스럽다”는 언설을 재현한다. (물론 이런 구조는 서구와 동양이라는 젠더배치를 따르는 측면도 있다.) 크세르크세스가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에게 최후의 경고로서 조공을 요구함에도 레오니다스가 거절할 때의 크세르크세스의 표정은 단순히 조공요구가 거절되었을 때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애정고백을 거절당했을 때의 표정에 가깝다. 레오니다스의 거절은, 단지 “스파르타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취향은 네가 아니라 근육질의 체육관게이거든”으로도 읽힌다. 또한 레오니다스의 (조공/고백) 거절은 단순히 “여성스러운 게이”, 크세르크세스를 거절한 것은 아니다. 왕은 모든 결정을 왕비의 승인에 따른다는 점에서, (소위 “여성성”이라고 불리는) “수동성”을 행하는데, 조공/애정의 승인은 표면적으로나마 부정하고 있는 자신의 “여성성”을 인정하는 격이 되고, 바로 이 지점이 두려워 끝까지 싸우려는 것으로 다가온다. 즉 “남성성”을 과시하려는 욕망(이 욕망은 왕비에게 인정받으려는 것도 있지만, 크세르크세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기도 하다)인 동시에 “여성성”을 이중부정하려는 욕망의 반영이다.

<300>이 “이성애자”[異性/理性, heterosexual/reason-phile/reason-philia]라는 가면을 통한 “동성”욕망을 공공연히 드러낸다면, <음란서생>은 읽기에 따라선 게일 러빈과 버틀러 논의의 표본으로 삼아도 좋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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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과 6월 3일

며칠 동안 적지 않은 글을 썼다. “새글쓰기” 버튼을 클릭해서 새 글을 쓰고 쓰는 족족 공개하고 그러고 나면 또 할 말이 생겨 글을 쓰고 공개하길 반복했다. 인터넷의 웹페이지로 떠다닐 글들. 그리고 허공에서 사라지거나 몸 속 어딘가에서 사라질 말들. 음악을 들으며 걷는 길에서 마른 눈물을 흘리다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몸이 바르르 떨리면서, 울음이 났다. 하지만 숨을 곳도 많고 숨 쉴 곳도 많다. 한 번 꼬인 몸은 모든 반응을 제멋대로 해석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그것이 “오해”란 걸 알아도 이미 소용이 없는 상태로 빠질 때가 있다. 루인의 몸에서 배배꼬인 상황을 다시 풀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 하지만, 감정을 흘려 보내는 연습이 필요하다. 지금의 루인에겐.

작년 6월 3일은 각별한 하루였다. [너 TG? 나 TG!]라고 퀴어문화축제의 일환으로 진행한 수다회에 참가했으니까. 그날은 루인이 아닌, 자신을 트랜스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을 만난 첫 자리였다. 그 모임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지금 이렇게 인생이 변했다. 글 기고도 하고, 책 준비도 하고, 단체활동을 하며 활동가로 자라고 있고, 무엇보다 그 자리에 가지 않았다면 결코 만나지 못 했을 사람들을 만나고…

어젠, 퍼레이드에 처음 참가했다. 살면서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에 참가한 건, 어제가 처음이다. 그 신나던 시간. 한 시간 동안의 감정이 그렇게 클 줄이야. 바람소리 공연도 정말 멋졌다. (긴가민가했지만 결국… ㅠ_ㅠ) 저녁엔 치유의 시간. 퍼레이드 뒷풀이엔 안 가고 지렁이와 연분홍치마 사람들과 간단한 뒷풀이 후 학교에 돌아왔다가, 치유의 시간을 가졌다. 고마워요…

그리고 오늘은, 부천에 갔다가 밤엔 회의가 있다. 나름 바쁜 하루. 얼추 10년도 더 되는 시간 만에 생일 미역국을 먹으러 간다. 작년 [너 TG? 나 TG!] 행사의 날짜를 잊지 못 하는 건, 사실 이런 이유에서다. 여러 의미로 생일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