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

어제 오후였죠, ㄱ선생님에게서 연락이 왔고, ㄴ선생님의 가족 중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알려 줬어요. ㄴ선생님과 그렇게까지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에요. 루인은 ㄴ선생님에게 찍혀있다는 말도 할 정도의 감정. 물론 그렇다고 무척 사이가 나쁘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그저 사이가 그다지 좋은 건 아니다고 말하는 것보다 조금 더 안 좋은 정도랄까요. 전화를통해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조금은 무덤덤했죠. 그렇다고 사이가 안 좋아서 별 감정이 안 생긴 건 아니에요. 아마 실감이 안 나서 그렇겠죠.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파악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필요했으니까요. ㄴ선생님에게 아직 그 분이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기에, 그 분의 죽음을 실감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죠.

루인이 아는 선생님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어찌하여 (어제의 내일인)오늘, ㄷ선생님과 같이 문상을 가기로 했죠. 사실, 망설였어요. 무엇보다 입고갈 옷이 없었거든요. 관혼상제와 관련한 일이 있을 때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은 옷인 거 같아요. 입고 갈 만한 적당한 옷이 없다는 거. 玄牝의 옷장에 정장이 없으니, 누가 결혼한다거나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를 상상하면, 옷이 참 난감하죠.

그나마 결혼식은, 이제 더 이상 갈 일이 없을 것 같아 다행이긴 해요. 친구도 별로 없거니와, 결혼하겠다는 친구는 이미 결혼을 했고, 그 외엔 결혼을 안 하거나, 결혼을 해도 제도적인 결혼은 안 할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누군가의 장례식에 가야할 땐 어떻게 해야 할지…. 장례식이나 결혼식엔 정장을 입고 가야 한다는 어떤 강박이 있기 때문에 이런 갈등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아무려나 긴 청바지를 입고 검은색 티(긴 걸로-_-;;)를 입고 찾아갔는데, 문득 그 곳이 무척 낯설다고 느꼈다. 장례식장이면 어릴 때부터 경험한 곳이라 익숙할 줄 알았다. 그래서 능숙하게 행동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경험했으니까. 근데 왜 그리도 당황스럽고 낯설까, 하는 느낌 속에서, 문득 친족관계가 아닌 사람의 장례식장에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란 걸 깨달았다. 지금까지 경험한 장례식장은 모두 “이성애”혈연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그래서 손님이 아니라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오늘 오전에 찾은 장례식장은 손님이란 입장으로선 처음으로 찾아가는 곳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이런 낯설음을 반복하며 익숙해지겠지.

ㄴ선생님은 얼이 빠진 모습이었고, “얼굴이 반쪽이다”란 말이 딱 어울렸다. ㄴ선생님에게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었으니까. 루인이 들어서자 선생님은 “의외”란 표정이었지만, 그런 만큼이나 많이 챙겨 주셨고.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잘 왔다’고 중얼거렸다. 응, 가길 잘 했어…. 괜히 선생님에게 죄송했다.

[영화] 만덜레이

[만덜레이] 2007.07.30.월, 20:30, 스폰지하우스(시네코아), 6층 B-118

※스포일러 없음.

몇 해 전, [도그빌]을 읽었을 때, 두 가지 감정을 느꼈어. 영화를 이렇게 만들 수도 있구나, 하는 놀람은 꽤나 컸어. 연극을 하는 것만 같은 세팅도 놀랍고 감독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풀어갈 수도 있구나, 하는 감탄. 하지만 이 영화는 결코 유쾌하진 않았고,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어. 그땐 설명하지 못한 씁쓸함을, 지금 다시 읽는다면 설명할 수 있을까 궁금하지만, [도그빌]은 다시 읽고 싶은 영화는 아닌 것 같아.

그리고 시간이 지나, [도그빌]과 함께 3부작의 2편인 셈인 [만덜레이]를 어제 읽었지. 연극무대 같은 느낌은 이번에도 여전해. 인종차별주의를 다루고 있는 솜씨도 그럴 듯 하고.

책을 읽다보면, 종종 놀라운 사실을 깨닫곤 해. 일테면 1800년대 중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던 여권론자들 혹은 여성해방운동을 했던 이들이 보여준 인종차별적인 태도들. 루인은 편견이 없다고 믿었음에도, 페미니스트는 당연히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계급차별에 반대하고 등등의 공식을 루인 역시 가지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어. 이런 공식 자체가 페미니즘을 아주 단순하고 고정된 무언가로 만드는 효과를 낳음에도 그 책을 읽기까지 미처 깨닫지를 못 했어.

영화 주인공, 그레이스의 행동을 읽으며 문득 이런 일화들이 떠올랐어. 그레이스는 마치 자신의 모든 백인을 대표하는 듯,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했던 잘못을 자신이 대신 사과한다는 말도 해. 다들 기억하겠지만, 몇 해 전 부시가 대통령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을 때, 일부 미국인들이 “죄송합니다”란 글을 쓴 종이를 들고 찍은 사진이 나돌았고, 그 사진을 보며 솔직히 웃기다고 느꼈어. 영화를 읽다가 그레이스의 행동에, 이러 사진을 올린 일부 미국인들이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겠지. 그리고 바로 이런 태도가 일종의 비극을 만들고.

근데, 이 영화를 읽으며, 이 감독이 그려가고 있는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 속에 젠더는 없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 인종과 관련한 이 영화에서, “같은” 인종이라 일컫는 집단이라고 해서 젠더가 작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젠더와 인종은 언제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작동하는데, 이 영화는 이런 지점은 전혀 다루고 있질 않아. [도그빌]에 이어 [만덜레이]도 읽고 나면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는데, 이런 이유에서인 걸까 싶기도 해. 한 번 쯤 읽을 만한 영화긴 하지만, 씁쓸해서 다시 읽고 싶지는 않은 영화. 물론 3부작의 세 번째 영화라는 [워싱턴]도 나오면 읽겠지만, 두 번 읽고 싶지는 않아.

+
사실 이 영화를 읽는 내내 몰입을 할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주인공 때문에. [도그빌]에서 주인공인 그레이스 역할을, 니콜 키드만이 했는데, 그때 무척 인상적이었어. 문제는 그때만 인상적이면 되는데, [만덜레이]를 읽는 내내,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와 비교를 하더라는. 영화를 읽는 내내, ‘니콜 키드만이었으면 더 멋졌을 텐데’라거나 ‘니콜 키드만이었으면 저 장면에서 엄청난 카리스마를 발휘했을 텐데’란 식으로 -_-;;

[영화] 철콘 근크리트 (일본인디필름페스티벌-리턴즈)

[철콘 근크리트] 2007.07.30.월, 17:55, 스폰지하우스(시네코아) 4층 A-107

※스포일러 없음.

왜, 그런 영화가 있잖아. 그냥 너무 읽고 싶어서 어찌할 수 없는. 이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이 그랬어. 예전에 스폰지하우스에 갔다가, 홍보영상으로 읽으며 무척 끌렸지만, 귀찮아서 안 갔는데, 어젠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읽고 싶어졌어. 그래, 이 어찌할 수 없음….

판타지란 장르에 있어 중요한 점 중 하나는, 세계관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있는 거 같아. 얼마나 탄탄하면서도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하느냐 하는 건 판타지란 장르에 있어 필수가 아닐까 싶어. 동시에 이런 세계관을 어떻게 전개하느냐가 중요하고. 그렇지만 요즘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어디 있겠어. 적지 않은 영화들이 비슷비슷한 이야기 구조란 점에서 “스포일러”란 말이 무색해. 그러니 익숙한 이야기구조를 어떻게 끌어가느냐 역시 중요한 점일 거야.

이런 관점에서 애니메이션 [철콘 근크리트]를 읽으면, 어느 쪽으로도 만족스럽진 않아. 두 명의 주인공 이름, 시로(しろ, 白)와 쿠로(くろ, 黑)가 암시하듯, 어둠의 사악함을 이기고 흰색의 밝음을 찾아가는 구조이지. 흑백과 선악이라는 단순한 구조에다 결국 밝음=선을 선택하고. 이야기 전개도 아쉬운 느낌이 많이 들었는데, 애니를 읽는 내내, 왠지 책을 읽어야만 좀 더 재밌을 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 뭔가 중간에 빠져 있는 느낌이 자주 들었거든. 그래서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니가 무척 좋았어. 시로와 쿠로, 두 악동의 캐릭터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거든. 특히나 시로가 좋았는데, 그 불안을 느끼고 그런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장면에선, 어쩔 수 없이 어떤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그냥 어떤 아련한 듯이 슬픈 느낌들이 들어서 나중에 꼭 만화책을 사서 읽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어. 하지만 읽고 싶은 동시에 읽고 싶지 않은 몸이기도 해. 읽는 중간 중간에 꽤나 불편한 장면들도 나오거든.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만화책이라면 이런 불편들이 더 가중될 지도 모른다는 어떤 예감. 어쩌면 시로란 캐릭터의 매력은, 목소리 연기가 한 몫을 한 건지도 몰라. *힐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