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붉은 띠, 딜레마: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

(우선, 감정을 좀 추스르고…)

어제 지렁이 회의 때, 제 8회 퀴어문화축제 무지개의 퍼레이드 행사에 참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하면서, 부스에 설치할 것과 퍼레이드 때 무엇을 할 것인지를 의논했다.

단체를 설립한지 이제 몇 개월이고, 지금은 동면상태라 딱히 무언가 그럴 듯 한 걸 하겠다는 욕심은 내지 않았다. 부스엔 그저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를 알릴 수 있을 간단한 표시 정도 수준으로 결정했다. 단체를 소개할 그럴 듯한 팜플렛이나 뭔가 홍보자료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이런 자료 하나 아직 없는 단체이다 보니, 우선은 지렁이라는 단체가 있다는 걸 알리는데 의미부여하기로 했다.

퍼레이드를 하며, 어떻게 할까를 얘기하다가, 지렁이 깃발 큰 것과 작은 것을 흔들기로 했고, 아울러 피켓을 몇 개 들기로 했다. 피켓 내용은 네 가지, “나는 트랜스젠더일까”, “나는 트랜스젠더이다”, “나는 트랜스젠더 인가봐”, “나는 트랜스젠더이고 싶어”. 두 번째 내용인 “나는 트랜스젠더이다”는 루인이 제안했고, 이 피켓은 루인이 들겠다고 했다. (이 말은 그날 퍼레이드에서 이 내용이 적힌 피켓을 들고 있으면 루인이란 의미인가? -_-;; 차라리 그러면 다행인데 잠깐 다른 사람이 들고 있을 때, 그 사람을 루인으로 인식하면, 이것도 재밌겠다. 흐흐 ;;)

고민은 이 지점에서 발생했다. “나는 트랜스젠더이다”라는 피켓을 들고 있는데, 붉은 띠를 할 것인가. 왜냐면 붉은 띠의 의미는

붉은 띠는 방송, 신문뿐만 아니라 개인블로그, 까페 등에도 공개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아웃팅에 대한 예방차원에서, 원하는 사람은 붉은 띠를 할 수 있으며, 이럴 때 그 사람 사진은 찍지 못하고, 혹시나 찍혔다면 누구도 알아 볼 수 없게 모자이크 처리를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고민이 발생했다.

예전에도 적었듯, 루인의 경우 사진 찍히는 것 자체, 사진 속의 모습 자체를 못 견디는 경향이 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사진도 증명사진 두 종류가 전부고. 한때 중고 디카를 선물 받은 일이 있어 셀카도 조금 찍었지만 그 사진들 중 남아 있는 건 한 장도 없다. 일테면 오프라인에서 누군가 루인을 지칭하며 “저 사람 루인이야”라거나 “저 사람이 루인인데, 트랜스야”라고 말한다면 그건 상관없다고 느끼지만, 사진이나 영상물은…

그렇다고 루인이 사진 찍히길 싫어하는 게 트랜스(젠더)들의 자기 이미지 때문인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트랜스젠더들의 경우, 자신이 바라는 모습과 거울을 통해 보는 모습이 너무도 달라, 거울을 안 본다거나, 사진 속의 모습을 안 보는 경향이 있다(당연한 말이지만, 모두가 그렇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런 식의 말들이 있다는 의미다). 자신은 자신을 “여성”이라고 인식하며 살아가는데 거울 속에서 돌연 “남성”의 모습이 나올 때, 낯설고도 자신이 부정당하는 느낌 때문이다. 하지만 루인의 경우, 이런 이유는 아니고 그냥 사진 속의 모습이 싫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붉은 띠는 딜레마로 다가오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까지 적고, 붉은 띠의 의미 자체를 다시 고민하기로 했다. 만약 붉은 띠가 아웃팅 때문이 아니라 단지 사진 찍히는 것 자체가 싫다는 의사 표시일 수도 있다면 지금의 이 고민은 무게가 덜할 수도 있겠다 싶다. 비록 사진을 찍거나 퍼레이드에 참가한 다른 사람들은 붉은 띠를 아웃팅과 연결시키겠지만, 그렇다면 사진 찍히기 싫다는 표현을 곧장 아웃팅으로만 연결시키는 지점에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겠지. 만약 소위 “이성애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사진 찍히길 거부한다면 이럴 땐 아웃팅과 연결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비이성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사진 찍히길 거부한다면, 다른 맥락을 무시하고 아웃팅으로 연결하는 그 지점에 문제제기할 필요가 있겠지. 여기에 트랜스라면 몸 이미지 때문이냐고, 다른 맥락 무시하고 곧장 이런 식으로만 묻는 지점에 문제제기하면 되겠지.

+
사실, 피켓에 정말 쓰고 싶은 말 중 하나는, “나, 괴물. 낄낄낄.” 혹은 “나는 트랜스이다. 나는 괴물이다.”
케케케. 일단 인쇄해서 가져갈까? (ㅎㅁㅈ씨 어때?)

++
피켓 내용 추가
“응, 나 괴물이야. 케케케”
“응, 나 괴물. 그런데 뭐?”
“응, 나 트랜스야. 그래서?”

입맛

배가 고픈데 입맛이 없으면 그냥 입맛이 생길 때까지 버틴다. 그러다 후회한다. 밥을 먹으려고 할 땐 이미 허기에 지친 상태.

사무실에서 일주일에 두어 번 보는 사람은, 종종 루인에게 살이 빠진 것 같다는 얘기를 한다. 174.5 정도인 키에 51±3인 몸무게.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모른다. 살이 빠졌는지 더 쪘는지. 고등학생 때부터 줄곧 비슷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느낄 뿐. 마지막으로 몸무게를 잰 것이 언제인지 모른다. (루인의 키와 몸무게를 아는 사람 중에서) 루인을 “남성”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말랐다고, 그렇게 약해서 어떡할 거냐고 말하고, 루인을 “여성”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말랐다고, 날씬해서 좋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난 내가 무척이나 뚱뚱하다고 느낀다. 다른 사람들의 공간을 무단으로 침입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연구실에 혼자 있을 때가 아니면 항상 웅크리거나 움츠러든다. 그래서 체중계엔 안 올라간다. 그러니 현재 정확하게 몸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사실은 잘 모른다. 그저 고등학생 시절 산 옷을 지금도 편하게 입을 수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겠거니, 추측할 뿐.

입맛이 없는데 김밥을 꾸역꾸역 먹고 있다. 며칠 전 친구와 저녁을 먹으러 가며, 사실 상 친구가 끌고 갔는데, 간단하게 협박했다. “밥을 제때 안 먹으면 박사논문 못 쓴다”고. 그 말에, 허걱, 하며 잘 챙겨 먹어야지, 했다. 뭐, 그래봐야 그때 잠깐이지만. 아직 석사논문도 안 쓴 주제에 벌써부터 박사논문이냐 만은, 그래도 계속 공부하고 싶은 욕심은 있다. 비록 내가 좋아하는 멋쟁이들만큼의 실력이나 수준은 안 된다 해도, 루인같은 평범한 공부쟁이 한 명 정도 있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계속 공부하고 싶다는 욕심을 품고 있다.

울음에 체한 상태라도 짜부라진 상태는 아니니까, 아직은 괜찮다. 숨을 곳은 어디에나 있고.

여름이 오고 있다: Nothing To Do But Dream

잠들고 싶어…

I would shut my eyes but I’ve got promises to keep
길을 걸을 때면 눈을 감아. 눈을 감고 태양을 보면, 비로소 눈부시다는 걸 깨닫지. 여름이 오고 있어. 해 마다, 여름이 오는 시간을 깨달으면 불안해. 안절부절 못 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할 수 있는 것 없이 속수무책으로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만 깨달을 뿐이야.

처음부터 여름을 싫어하진 않았어. 그저 몇 해 전, 그 여름들을 보내고 나서지. “나는 펑, 하고 터질 거야”라는 말을 종일 중얼 거렸던 여름, 하루 종일 냉장고를 상상했던 그 여름, 온 몸에 꽃이 필거라고, 곰팡이 꽃이 온 몸에 필거라는 강박에 빠져 있던 여름. 그 몇 번의 여름을 보내고 난 이후, 여름이 온다는 걸 깨닫는 건 일종의 소름끼치는 순간이기도 했어. 피하고 싶어.

I can’t go crazy and I can’t get sane
물론 단 한 번도 미친 적은 없지만, 미치지 않을 거란 것도 잘 알고 있지만, 종종 지난 어떤 시절은, 적어도 제정신은 아니었구나, 싶어. 지금의 내가 그렇기도 해. 지금의 내가 미친 상태인지 제 정신인 상태인지 누가 알겠어. 몇 번의 여름이 더 지나고 나서 오늘 이 순간을 어떤 광기에 시달리고 있었구나, 라고 중얼거릴지 또 누가 알겠어.

응, 그래. 미친 적도 없지만 제정신으로 견디지도 못하고 있는 순간. 이렇게 무언가를 쓸 수라도 없었다면, 정말 미쳤을까? 정말 냉장고의 상상을 실현했을까? 그때 사실은 온 몸에 꽃이 피었던 걸까?

I’ve got nowhere to go but to sleep…
(…)
I’ve had nothing to do for years but dream

잠들고 싶어. 잠들면 좀 괜찮을 것 같아. 그냥 오랫동안 꿈을 꾸고 있었다고…. 환한 백일몽. 태양을 마주보며 꾸는 꿈. 좀, 자고 싶을 뿐인데…

+
영어가사는 Jolie Holland의 “Nothing To Do But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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