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방향전환 +

알바가 끝나고 玄牝에 돌아가는 길에 씨네21과 필름2.0을 샀다. 평소처럼 씨네21 가장 뒷장을 먼저 펼치니, 이번 주는 정희진 선생님 글.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글을 읽다가…

내 스승에게 물었다. “선생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선생님 친구랑 사랑에 빠져, 두 사람을 모두 잃게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선물 경제(gift economy)에서 내가 증여자가 되든가, 그들을 텍스트로 삼겠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다음 구절인 “아, 역시…!”란 정희진선생님의 감탄사를 읽기도 전에, “아…!”란 감탄사가 나왔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지난 어떤 시간을 이 한마디가 위로하는 느낌이었다.

사실, 최근 한 동안, 엘리엇 스미스의 자살을 둘러싼 얘기에 매여 있었다. 자살을 하며 식칼로 심장을 두 번 찔렀다는 얘기. 그 얘기가 자꾸만 맴돌았다. 왜 그랬을지, 와 닿아서. 물론 이런 와 닿음은 결국 루인 식으로 환원하며 해석한 것이기 마련이지만, 심장에 칼을 두 번 찌른다는 행위가 자연스럽고도 그 상황의 어떤 심리 상태가 익숙한 듯 느꼈다. 그래서 엘리엇 스미스의 음악은 한동안 듣지 않았다. 동시에 [퐁네프의 연인들]의 한 장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장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밝히기가 좀 그래서… 수다스런 루인이니 언젠간 말하겠지만요. 🙂 )

이런 심리 상태에서, 김은실선생님의 대답은 마치 현재의 감정을 풀어갈 실마리와 같았다. 물론 이런 한 마디로 모든 걸 풀 수는 없겠지만, 새로운 방향으로 인식을 전환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달까.

그러면서도, 다시, 조금씩, 미쳐가고 있다는 어떤 느낌들을 퍼뜩, 퍼뜩, 받곤 한다. 어느 순간에, 이렇게 조금씩, 그리고 서서히. 다시, 엉키는 걸까…

퇴고: 글 수정하기, 고마움

마지막 문장을 쓰곤, 스스로 감동 받았다.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에 실릴 원고 중, 파일명으론 “정체성 명명과 경계지대”, 현재 수정한 제목은 “범주와 명명, 그리고 경계지대”. 물론 최종 제목은 또 다르겠지. 오늘 저장한 파일이 take8이니, 그 전에 10개의 다른 원고들이 있다는 의미인데, 앞서 쓴 10개 원고들에선 얼버무리며 넘어갔던 부분들, 혹은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을 거라고 여긴 부분들을 채워 넣었다. 그러며 루인의 생애사가 상당 부분 들어갔다. 이곳, [Run To 루인]에도 쓰지 못한 얘기들이 그 글 속에 너무도 많이 들어가 있다. (이렇게 쓰면 꼭 황색신문 같다. 일테면 “루인, 충격고백”처럼 -_-;;; 크크크)

take7에서 take8로 넘어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아니, 실제 날짜 상으론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글 한 편 수정하겠다며 며칠을 붙잡고 앉았다는 점에선 오래 걸렸다. 보통은, 수정하겠다고 자리에 앉으면 그 자리에서 끝내기 때문이다. 참 많이 외면하기도 했다. 그냥 외면하고 싶었다. 글을 쓴다는 건, 자신을 마주하는 일, 자신의 삶을 드러내고 전시하는 일. 이런 일을 할 용기가 부족해서 자꾸만 미루기도 했다. 마주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냥 어물쩍 얘기해도 남들이 알아 줬으면 하는 바람을 품었다. 앞뒤 맥락 다 잘라버리고 한 마디, 툭, 내뱉는 것처럼.

배치를 바꾸기도 하고, 뺄 부분 빼고, 채워 넣을 부분들 채워 넣고 말을 덧붙이면서, 뭔가 전혀 다른 글로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런 느낌은 오늘 저녁 혹은 내일 오후에 다시 수정할 때 여지없이 깨지겠지만, 적어도 지금 느낌은 그렇다. take7과는 많이 다른 느낌의 글.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추가하면서, 감동 받았달까. 참 민망한 말이다. 자기가 쓴 글에 자신이 감동 받는다는 건, 그 만큼 허접하단 의미거나 거리를 두고 건조하게 평가하지 못 하고 있다는 의미니까. 안다. 분명 퇴고하려고 글과 마주하는 순간, 비문에서부터 구조적인 문제까지, 여러 문제들이 한꺼번에 나타날 거란 걸. 그리고 아직 수정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기도 하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이 여기까지란 걸 인정한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결론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방금 전에 다시 읽고, “감동”의 크기가 반 토막 났다.)

이 글에서 스스로 의미를 찾는다면, 다른 무엇도 아닌 한국에서 트랜스젠더, 트랜스섹슈얼, 성전환자란 용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모색하고 있는 지점이다. 물론 “이렇게 정의해야 한다”는 식의 내용은 없지만, 미국이란 맥락에서 사용하는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과 한국에서 사용하는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이 얼마나 다른지를 드러내려고 했다는 점에 의미를 두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사서 읽으시면… 편집장님, 책 홍보 잘 하고 있죠? 흐흐 -_-;;;)

그러고 나면 루인의 생애사를 통해 정체성을 규정하거나 특정 범주(일테면, 게이냐 트랜스젠더냐 크로스드레서냐란 식)로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드러냈다는 점, 정도랄까. 따지고 보면 이 지점은 (한국에선 아직 별다른/활발한 논의가 없다고 하더라도) 루인이 읽은 영어논문에선 낯설지 않은, 때론 익숙한 논의들이다. 그렇다면 그 논의들과 어떻게 차별화를 꾀할 것인가가 관건이겠지.

그러고 보면 루인은 인복이 참 많다. 이성애혈연가족들이나 친척들에겐 대인관계가 참 좁다는 말을 듣는데도, 그런 만큼이나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있어서, 매일 조금씩 변태할 수 있다. 최근 쓰고 있는 몇 편의 글들 모두, 이런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며칠 전 출판회의 때, 편집장님이 “저자의 자기소개와 함께 thanks to도 넣을까 생각했어요”란 요지의 말을 했었다. 그 말이 맴돌아 괜히 누구에게 고마움을 표할까 떠올리니, 20명이 넘는다(블로그 이웃이 반 이상이다 흐흐). 인간관계 좁다고 말하면서도 참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만약 책에 정말 thanks to를 적는다면, 참 유치한 일이라고 민망해 하면서도 가득 채워서 적을 것 같다. 지금은 그냥, 이런 몸이다.

아, 저녁은 알바가 있다. 갑작스레 맡은 알바. 그곳에서 글을 수정할지 짧은 논문을 읽을지 결정해야 한다. 이제 슬슬 갈 준비를 해야지.

근질근질

루인은 질투의 천재. 열등감의 화신. 키득.

뭔가, 아주 신나는 세계를 발견한 느낌이야. 킥킥. 루인은 질투의 천재. 열등감의 화신.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 알고는 있었지만 그냥 지나쳤던 그곳에 엄청 신나는 세계가 있을 줄이야. 킥킥.

아아…, 입이 근질근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ㅇㄴㅇㄱㄹㅎㅎ
꺄릇꺄릇.

친구랑 에니어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