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톤월이란 신화 : 역사를 가정하기

작년 퀴어문화축제의 부스행사 및 퍼레이드 행사가 6월 28일에 진행된다고 발표되자, 스톤월 항쟁이 발생한 날과 같은 날이라며 기뻐하는 반응을 몇 사람에게서 접했다. 왜 그 둘을 연결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그것이 왜 기쁜 일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한국의 적잖은 LGBT/퀴어 구성원이 스톤월 항쟁을 마치 한국 LGBT/퀴어 운동의 신화적 기원이자 직접적 기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듣곤 한다. 답답하다. 한국에서 탈식민 LGBT/퀴어 운동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반드시 한국의 역사를 팔 이유는 없으며 한국의 역사를 조사하는 작업이 반드시 탈식민은 아니지만 왜 상상력과 지식의 기원이 미국 뉴욕에 가 있는 것일까?

얼마전 1990년대 중반 자료를 살피다가 스톤월 항쟁을 언급하는 글을 읽었다. 그러며 스톤월 항쟁의 의미를 살피는 토론회 자리도 만들었음을 확인했다. 내가 읽은 자료에선 스톤월 항쟁을 알고서 정말 기뻐하는 어떤 감정이 느껴졌다.
나는 이 두 상황이 전혀 다른 상황이라고 고민한다. 1990년대,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자료 찾기가 수월하지 않던 시대, 미국 등 외국 자료를 구하기 위해선 해당 국가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과 연결이 되어서 편지로 정보를 주고 받던 시대에 스톤월 항쟁의 의미는 지금과 다르다. 물론 몇몇 활동가가 미국의 퀴어 이론을 열심히 소개했으니 정보가 부족했다고 믿지는 않지만,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원한다면 아마존에서 도서를 바로 주문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으니까). 아울러 LGBT/퀴어 운동을 이제 시작했다고 믿는 당시에 외국의 항쟁 소식은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시대의 스톤월 항쟁 소식 및 의미와 2010년대에도 여전히 스톤월 항쟁을 마치 자신의 신화적 기원이자 힘으로 삼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래서 가정하고 싶다.
만약 1990년대 초중반 운동을 시작했던 활동가가 스톤월 항쟁 소식에 기뻐하고 그 의미를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동시에 1990년대 이전의 역사를 살피는 작업을 진행했다면 어땠을까? 물론 그때도 지금도 1990년대 이전의 자료에 접근하기 어려웠겠지만 누군가 한 명이라도 그 작업을 진행해서 한국 LGBT/퀴어의 역사를 탐문하는 작업을 진행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크지는 않지만 뭔가 조금은 달랐을 수도 있다고 기대한다. 한국 LGBT/퀴어의 운동과 그 기원(언제나 신화적이고 망상적인 그 기원)을 조금은 다르게 생각했을 테니까. 물론 하지 않았다고 아쉬워할 일은 아니다. 역사 연구를 비롯한 어떤 연구 작업 자체가 임계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0년 전만 해도 지금처럼 많은 퀴어 연구자가 등장하리라 생각 못 했다. (사실 더 많은 연구자가 등장할 거라고 망상했다… 호호호) 그러니 그때 왜 그러지 않았냐고 물을 수는 없다. 그저 그때 바로 한국 퀴어 역사를 연구하는 작업을 했다면 어땠을까 싶을 뿐이다.

정말 번역책이 나오는 걸까

아는 사람은 알지만 나는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번역을 정말 못 한다. 한국어로 글을 쓸 때의 그 문장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 영어를 한국어로 우선 번역을 해줘야 뭔가 작업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영어에 짓눌릴 때가 많지만. 이런 이유로 나는 내가 어떤 책을 번역할 수 있을 거라고 고민하지 않았다. 엄두를 못 냈다. 그런데 기회가 왔다. 좋은 공동 번역자를 만났고 그래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물론 한국어로 표현하는 과정에선 서로의 의견 차이가 분명 존재했지만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쩌면 거의 마지막일 교정 작업을 했다. 출판사에서 얼추 디자인이 끝난 교정지를 받았고 거기서 수정할 다양한 사항을 체크해서 조금 전 넘겼다. 조금 무섭기도 하고 염려가 되기도 한다.
조금의 위로라면 역주를 열심히 썼다는 점이다. 2~3년 전 작성한 역주를 지금 다시 확인하며 ‘뭘 이렇게까지 역자주를 달았나’란 말이 나오기도 했다. 스트라이커의 책은 분명 입문서고 쉬운 내용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맥락과 설명이 누락되곤 했다. 그래서 그 공백을 채울 필요가 있었다. 물론 공백을 채우는 과정에서 많은 오류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 나의 착각이 있을까봐 염려도 된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노력은 했다.
그럼에도 정말 괜찮을까란 고민을 했다.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고 얼추 2~3년이 지났으니 내가 먼저 출판사에 연락했을 법도 하다. 그런데 어지간하면 그러지 않았다. 그냥 기다렸다. 어쩐지 두렵기도 했다. 번역 작업 자체가 내겐 크나큰 부담이라 생기는 두려움도 있었다. 다른 사람의 번역을 읽으며 구시렁거리곤 했는데 공동 번역이지만 어쨌거나 내가 책임을 진 번역 판본을 읽으며 다른 누군가가 구시렁거릴 것이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번역 작업을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대단하다고 고민한다. 번역 작업을 좋아하는 E를 존경한다. 내겐 가장 두렵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빠르면 이번 주, 늦어도 다음 주 초에는 책이 나올 것 같다. 걱정이다.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알파고, 인공지능, 자기 동일성과 트랜스젠더퀴어

매일 매일 알파고 관련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나날이다. 정말 멋진 일이고 다양한 의미에서 충격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체스에서 승리한 디퍼블루처럼 모든 가능성을 계산하고 입력된 데이트를 밑절미 삼아 체스를 두는 것이 스스로 학습해서 성장하는 인공지능을 지금 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특정 목적에 맞는 인공지능이지만 나중엔 범용인공지능(AGI)을 개발할 것이고 그럼 더 놀라운 일이 발생할 테다.

알파고와 관련한 이런저런 많은 상상을 하는데 그 중 하나는 시간이 지나면 인공지능을 뇌로 이식할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인가다. 요즘 기억력이 약해지는 상황으로 인해 이런 상상을 했다. 물론 지금은 CPU가 1202를 사용하는 등 방 한 칸 이상을 차지할 수도 있는 규모의 하드웨어지만, 애니악에서 스마트폰으로 변하듯, 인공지능을 운영하기 위한 하드웨어의 크기 역시 지금의 스마트폰 혹은 그보다 작은 규모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인공지능은 인간의 뇌에 이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기존의 인간 뇌의 기록을 모두 스캔해서 인공지능에 ‘저장’하고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공지능은 자기학습을 비롯한 강화학습을 통해 더 탁월한 뇌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을 이식하기 전의 나와 인공지능을 이식한 뒤의 나는 동일할까? E가 철학의 오랜 논쟁이라고 했던 자기 동일성의 문제가 등장한다. 기억과 몸의 다른 부분은 일단 동일한데 뇌가 바뀌었고 이를 통해 뇌의 활동이 완전히 바뀐 나는 그 전의 나와 동일한 나일 수 있을까? 만약 동일하다면 몸의 어떤 부분을 근거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동일하지 않다면 어떤 부분을 근거로 동일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동일성의 이슈를 말하다가 질문을 바꿨다. 왜 동일성을 주장해야 하고 동일성은 왜 그렇게 중요한가? 동일성은 필요한가?
물론 뇌를 인공지능 뇌로 바꾼다고 해도 내 몸의 다른 부분은 (아마도) 이전과 같다(물론 이 정도 시기가 되면 몸의 다양한 부분을 부분별로 교체할 수 있을 것이니 동일성 이슈는 지금 나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겠지만). 내 몸이 곧 나이며, 내 몸은 나의 역사며 나는 내 몸의 역사란 점에서 뇌를 인공지능뇌로 바꾼다고 해서 다른 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뇌의 기능이 달라지고 이를 통해 전혀 다른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면 동일한 나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강화인간 포 무라사메가 상실한 기억과 과거로 괴로워하면서도 다른 자아로 살아간 것처럼. 그렇다면 다시 자기 동일성이 논쟁이 되겠지만 나는 왜 내가 혹은 우리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해야 하고, 자기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지를 질문하고 싶다. 뇌를 제외한 몸의 다른 부분이 완전히 같고, 몸의 역사를 공유 혹은 유지하고 있다고 해서 내가 그 전과 동일성을 유지하는 나일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매 순간 다른 나로 변한다는 의미의 나와는 다른 맥락에서 논하고 있다. 또한 책을 읽고 다른 내가 되었다는 표현 또한 여전히 어떤 자아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냥 전혀 다른 나, 동일성을 가정하지 않는 나/자아/주체로 인간의 몸과 삶을 다시 이야기할 수는 없을까? 아니, 이렇게 사유하고 상상해야 하지 않을까?
자아 동일성의 여러 근거 중 하나로 젠더 범주로 쓰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 논의, 인공지능뇌 이식과 자아 동일성 이슈는 트랜스젠더퀴어 이슈로 연결된다. 젠더퀴어인 나는 왜 어제와 같은, 혹은 내일과 같은 오늘의 어떤 젠더여야 하는가? 트랜스젠더퀴어인 나는 왜 특정한 방식의 젠더로 나를 확정해야 하는가? 젠더리스나 에이젠더, 혹은 젠더플루이드가 대안이란 의미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도 젠더 범주를 구성하지 않고 명명하지 않고 확정하지 않는 그런 젠더로 살며 나를 트랜스젠더퀴어로 부르는 것이 왜 안 되는가? 이런 질문이 등장한다. 나를 젠더퀴어의 다양한 범주 중 하나로 특정하지 않으면서, 젠더 동일성 자체를 전면 거부하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젠더를 살고 사유하는 틀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트랜스젠더퀴어 정치학에서 필요한 사유 중 하나는 이것일 아닐까란 고민을 했다. 오늘 내가 나를 트랜스젠더퀴어로 설명할 때의 이 ‘젠더’와 내일 내가 나를 트랜스젠더퀴어로 설명할 때의 그 ‘젠더’는 동일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동일성을 유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동일성이란 차원을 아예 다른 식으로 사유할 필요가 등장했다는 의미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이미 누군가가 열심히 탐문한 작업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