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을 잃다

눈을 뜨고 핸드폰시계를 보니, 5시 52분. 요즘 자주 이 시간에 눈을 뜬다. 그러며 한 쪽 팔이 없다고 느꼈다. 잠에서 갓 깨어나 멍한 상태에서, 어느 쪽 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쪽 팔이 없다고, 평소 있다고 느낄 법한 팔이 허전하다고 느꼈다. 어디로 간 걸까.

그러며 문득 환상사지란 말이 떠올랐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야 실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만 잠결에 환상사지란 말이 떠올랐다. 부재하는 신체 부위가 존재하는 것으로 느끼는 환상사지가 아니라 문득 없어졌다고 느끼는 환상사지. 그런데 팔은 어디로 간 걸까?

시계는 왼쪽에 있었고, 시계를 왼손으로 잡았으니 왼팔은 있는 셈이었다. 오른쪽으로 돌아누우니 오른쪽 팔이 싸늘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내 팔이 아닌 그저 저기 버려진 무언가란 느낌이었다. 널브러진 상태로 있는 팔을 움직이려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무런 감각도 없었고 “움직여!”란 몸의 신호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몸에 붙어 있다는 건 보이는데 내 팔이란 느낌은 없었다. 왼손으로, 꺾인 상태로 널브러진 오른팔을 잡아서 다른 방향으로 던졌다. 무감각. 그러다 서서히 피가 돌기 시작하고 쥐가 나면서 감각이 돌아왔다.

문득, 올리버 색스의 책들이 떠올랐다. 어느 책이었나, 침대에 놓여진 다른 누군가의 발을 침대 밖으로 던지려는데, 그럴 때마다 자신이 침대 아래로 떨어진다는 얘기. 눈으로 몸을 보지 않으면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누군가의 얘기. 순간이었지만, 팔을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팔이 없다고 느꼈고, 눈으로 확인했다고 해서 팔이 몸에 붙어 있음을 확신할 수 없었다. 다른 손으로 움직이기 전까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무섭다는 느낌은 없었다. 심드렁했다.

그냥, 이른 아침 한 장의 사진처럼 떠오르는 풍경, 버려진 팔이 널브러진 상황을 바라보는 풍경, 그냥 이 풍경이 아른거릴 뿐이다.

트랜스젠더

친구가 이사를 한다고 했다. 이삿짐 나르는 일을 도와주러 갔다가 시간이 붕 떴다. 시간 계산에 착오가 있었고, 그리하여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갈까 했지만,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더 많이 들겠다 싶어, 근처의 지하철역으로 갔다. 지하철역에 가면, 책상과 의자가 있으니까.

루인은 블로그에 쓰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면지에 볼펜으로 글을 쓴다. 이런 얘길 사람들에게 하면 요즘 들어 이런 경우는 드물다며, 모니터 화면을 보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는 얘기도 자주 듣는다. 지하철역에 가서 책을 읽을까 하다가 어제의 내일인 오늘이 마감인 글을 쓰기로 했다. 이면지는 언제나 몇 장정도 가지고 다니는 편이기에 종이는 넉넉했다. 다만 걱정은 요청한 원고 분량이 원고지 5~6장인데, 펜으로 쓰다보면 그 분량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것. 아무려나 일단 대충 하고 싶은 얘기를 썼다. 그러곤 한 번 수정하고 나서 글자수를 세기 시작했다. -_-;;; 크크크. 대충 이 정도 분량이면 5~6장이겠다 싶은 분량으로 해서 수정과 편집을 거친 후, (분량이 적었기에 반복해서 쓴다고 해서 힘들진 않았다) 일단 초안은 완성. 나중에 사무실에 돌아와 워드작업을 하니, 후후후, 딱 요청 분량. 내용은 만족스럽지 않은데 분량을 맞췄다는 사실에 혼자 좋아했다. ;;;

이제 곧 있을 인권영화제에서 해설책자를 내면서 인권해설이란 글이 들어가는 듯한데, 그곳에 실릴 목적으로 글을 청탁 받았다. 그곳에서 요청한 주제는 “인권해설은 성전화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알기 쉽게 써주시면 됩니다.“였다. 하지만 쓴 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잡았다. 왜냐면, “우리는 어떤 차별을 받고 있다”는 식의 글을 별로 안 좋아 하기도 하거니와 이와 관련한 내용은 기사검색만 해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좀 다른 접근을 할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적어도 영화제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더욱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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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 혹은 “나”를 어떻게 얘기할 것인가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나”의 어떤 지점을 어떤 식으로 주장할 것인가란 고민 때문이다. 흔히 트랜스젠더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정신적인 성과 육체적인 성이 불일치해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얘기하곤 한다. 물론 자신의 몸이 변하면서(일테면 사춘기를 거치며 가슴이 나오거나 월경을 하는 것, 목소리가 굵어지고 수염이 나는 것) 몸과 갈등을 겪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설명은 세상엔 남성과 여성이란 두 가지 성별뿐이며, 태어날 때 할당 받은 성별과 어떤 갈등도 경험하지 않는다는 식의 가정을 은폐한다. 이럴 때 트랜스젠더들이 경험하는 갈등과 긴장은 “그들 개인의 문제”이고 “치료”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정신적인 성과 육체적인 성이 불일치한다”란 식의 언설은 트랜스젠더들의 경험을 설명하는 여러 방식 중 하나일 수는 있지만, 유일한 설명 방식은 아니다. 만약 이런 식으로만 설명한다면, 현행 호적제도나 신분제도 등으로 인해 경험하는 갈등, 그리하여 끊임없이 호적상의 성별을 변경하고자 하는 요구들을 설명하기 힘들다.

이 글에서는 트랜스젠더들이 얼마나/어떻게 고통 받고 있는지를 쓰지 않는다. “나”를 주장하기 위해 “나”의 고통을 전시하고 “나”의 고통을 증명해야 하는 건 아니며, “내”가 이 만큼 고통 받고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주장할 수 없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인권운동이 우리는 이 만큼 고통 받고 있으니 이를 해결하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범주를 어떻게 만들고, 인권의 의미를 누가 어떤 식으로 해석하는가란 질문과 같이, 해석들이 경합하는 장을 만드는 작업이라면, “나”의 고통을 말하기에 앞서 고통의 전시를 통해서만 나를 주장할 수 있는 맥락들을 얘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질문은 “트랜스젠더가 되는 이유는 무엇이냐”와 같은 형식이 아니라 사회적, 법적, 문화적 제도가 사람들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가, 어떻게 사람들을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기획하는가로 바뀔 필요가 있다. 동시에 트랜스젠더와 어떻게 소통할지 모르겠다와 같은 말은, 상대방이 트랜스젠더라는 걸 알았다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 오는지와 동시에 고민할 때에야 비로소 의미 있는 언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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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아이디어는 “Transgender? Transgender!“에 썼던 내용들을 토대로 했다. 팜플렛에 들어갈 내용으로 썼는데 팜플렛이 나왔는지 모르겠고 -_-;;; 아이디어는 비슷하다고 해도 그런 아이디어를 구성하는 문장 방식은 변했다는 느낌이 있다. 이 느낌을 믿어야지.

독서문답

관련 글: [문답놀이] 도서문답 by 키드

키드님 블로그에서 받았어요. 책을 언제 읽었나 싶기도 하고, 책만으로 제한한다면 궁색한 문답이 되겠구나 싶지만, 독서가 반드시 책을 읽는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논문도 괜찮다면… *힐끔*

1. 평안히 지내셨습니까?
감정의 무한변주 속에서 잘 지내고 있답니다. 🙂

2. 독서 좋아하시는 지요?
좋아한다고 표현하기엔 뭔가 좀 아쉽거나 부족하단 느낌이 들어요.

3. 그 이유를 물어 보아도 되겠지요?
그냥, 생활이기도 하고, 직업이기도 하고요. 힛.
읽어야 하기 때문에 읽고 싶고, 읽고 싶기 때문에 읽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대답이 될까요? 🙂

4. 한 달에 책을 얼마나 읽나요?
학부시절엔, 거의 한국어로 이루어진 책만 읽다보니 12~15권정도 읽었는데, 대학원 들어왔더니, 태만하게도 한 달에 2~5권정도 읽는 것 같아요. 뭐, 대학원 들어와서 읽는 글의 종류와 언어가 많이 바뀌었으니 “권 수”로 독서의 정도를 얘기할 순 없죠.

5. 주로 읽는 책은 어떤 것인가요?
기본적으론 잡다하게 읽는 편이고, 요즘은 암만해도 전공을 중심으로 읽고 있죠. 트랜스젠더를 축으로 다양하게.

6. 당신은 책을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정의하나요?
장난감!
아직 글을 읽는 것 만한 장난감은 없는 것 같아요. 흐흐.
(요즘은 장식품이기도 하다는…;;;;;;;;;;;;;;;;;)

7. 당신은 독서를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정의하나요?
신나는 놀이.
그나저나 “한 마디”로 무언가를 정의해달라는 식의 질문은 꽤나 문제가 있죠. “한 마디”로 정의해달라고 묻기 보다는, “당신에게 독서는 어떤 의미인가요”, 라고 묻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8. 한국은 독서율이 상당히 낮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그 이유를 알면 루인이 여기 있겠어요? 어딘가에 불려 다니며 강연하고 있겠죠. 케케.
독서와 글쓰기를 입시와 관련해서만 얘기하는 사회적인 맥락에서 독서율이 “높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 같아요. 그리고 한 달에 몇 권 읽어야 많이 읽는 건가요? 책만이 유일한 앎의 공간도 아니고요. 가끔씩은 책을 많이 읽자는 구호가, 의도했건 안 했건, 국가가 요구하는 형식의 국민을 만들려는 의도는 아닐까, 의심하기도 해요.
더욱이 한 달에 몇 권 읽느냐가 중요한 건 아닌데, 루인은 어떤 의미에서 이웃블로거들의 글을 읽으며 더 많은 걸 배우거든요. 그러니 독서율이 낮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먼저 고민했으면 해요. 독서율이 낮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기에 그렇게도 천편일률적인 이유를 들며 호들갑일까요?

9. 책을 하나만 추천 하시죠?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6월 말에 나올 예정인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 낄낄. -_-;;;
한 권은 어떻게든 무리고, Judith Butler의 [Gender Trouble]과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지금은 말하고 싶어요. 단편소설이긴 하지만, 배수아의 “회색 時”도!

10. 그 책을 추천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버틀러는 어떻게 고민할 것인가에 있어 중요한 성찰을 준다는 측면에서, 아니 에르노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죠.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예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한 무언가를 주고 있어요.

11. 만화책도 책이라고 여기시나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이 질문의 문장구조를 왠지 따져 묻고 싶어지는 이 심정은 뭘까요? “만화책도 책이라고 여기시나요?”는 혹시 “만화책 따위의 저급한 문화도 감히 책이라고 부르시나요?” 라는 저의가 있으신 건가요? 물론 그렇진 않겠지만, 만약 “만화책도 좋아하세요?”라거나 “만화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었다면 이 문장을 읽으며 드는 느낌이 많이 달랐을 것 같아요.
비록 만화를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요즘 좋아하는 만화는 [바둑 삼국지](여기). 파란메일을 사용하다가 우연히 만났는데, 인터넷만화는 아이디어와 대충그린 그림체라는 편견을 여지 없이 깬 작품. 읽다보면 “뒷이야기” 형식으로 작가가 밝히는데, 수작업한 작품이라고 한다. 현재 165화까지 나왔고, 일주일에 다섯 번(월~금) 올라오는데, 읽고 있노라면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12. 문학을 더 많이 읽나요? 비문학을 더 많이 읽나요?
거의 반반인 듯해요.
한땐 소설만 읽기도 했고요. 요즘은 주로 비문학을 더 많이 읽는 듯해요.

13. 판타지와 무협지는 “소비문학”이라는 장르로 분류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소비하지 않는 문학도 있나요? 어떤 소비는 “순수문학”이고 어떤 소비는 “소비문학”이라고 나누는 그것에 질문할 필요가 있겠죠.

14. 당신은 한 번이라도 책의 작가가 되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조만 간에요. 흐흐.
(조만 간에 본격적인 책 홍보가 있답니다 -_-;; 흐흐)

15. 만약 그런 적이 있다면 그때의 기분은 어떻던가요?
예전에 반년간 잡지에 글 한 편 실린 적이 있는데, 그때 기분이, 참, 아무 느낌 없더라고요. 흐흐.

16.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누구입니까?
버틀러♡_♡ 아흥.
최근 수업을 계기로 배수아의 최근 소설들을 읽었는데(예전에 읽다가 한동안 안 읽었는데), 예전과는 또 다른 의미로, 꽤나 멋지다고 느꼈어요. 한 번 기회가 생기면 첫 작품부터 시작해서 쭉 다 읽고 싶다는 바람을 품고 있어요.
제이콥 헤일도 좋아요. 흐흐.

17. 좋아하는 작가에게 한 말씀 하시죠?
버틀러: 나중에 만나요~♡
배수아: 계속 글을 써 줘요.
헤일: 글 쫌 쓰시죠? 책도 좀 내구요! 이 사람, 2000년대 들어, 글을 발표하지 않고 있는 듯.

18. 이제 이 문답의 바톤을 넘기실 분들을 선택하세요. 5명 이상, 단 “아무나”는 안 됩니다.
R,
쑥,
아옹님,
한나님,
나무님,
a.k.a. 덧글쟁이님,
ㅅㅎ(본인은 알죠? 근데 여기 들어오려나? -_-;;;),
유린님(이 글을 읽으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