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매일 알파고 관련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나날이다. 정말 멋진 일이고 다양한 의미에서 충격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체스에서 승리한 디퍼블루처럼 모든 가능성을 계산하고 입력된 데이트를 밑절미 삼아 체스를 두는 것이 스스로 학습해서 성장하는 인공지능을 지금 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특정 목적에 맞는 인공지능이지만 나중엔 범용인공지능(AGI)을 개발할 것이고 그럼 더 놀라운 일이 발생할 테다.
알파고와 관련한 이런저런 많은 상상을 하는데 그 중 하나는 시간이 지나면 인공지능을 뇌로 이식할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인가다. 요즘 기억력이 약해지는 상황으로 인해 이런 상상을 했다. 물론 지금은 CPU가 1202를 사용하는 등 방 한 칸 이상을 차지할 수도 있는 규모의 하드웨어지만, 애니악에서 스마트폰으로 변하듯, 인공지능을 운영하기 위한 하드웨어의 크기 역시 지금의 스마트폰 혹은 그보다 작은 규모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인공지능은 인간의 뇌에 이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기존의 인간 뇌의 기록을 모두 스캔해서 인공지능에 ‘저장’하고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공지능은 자기학습을 비롯한 강화학습을 통해 더 탁월한 뇌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을 이식하기 전의 나와 인공지능을 이식한 뒤의 나는 동일할까? E가 철학의 오랜 논쟁이라고 했던 자기 동일성의 문제가 등장한다. 기억과 몸의 다른 부분은 일단 동일한데 뇌가 바뀌었고 이를 통해 뇌의 활동이 완전히 바뀐 나는 그 전의 나와 동일한 나일 수 있을까? 만약 동일하다면 몸의 어떤 부분을 근거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동일하지 않다면 어떤 부분을 근거로 동일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동일성의 이슈를 말하다가 질문을 바꿨다. 왜 동일성을 주장해야 하고 동일성은 왜 그렇게 중요한가? 동일성은 필요한가?
물론 뇌를 인공지능 뇌로 바꾼다고 해도 내 몸의 다른 부분은 (아마도) 이전과 같다(물론 이 정도 시기가 되면 몸의 다양한 부분을 부분별로 교체할 수 있을 것이니 동일성 이슈는 지금 나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겠지만). 내 몸이 곧 나이며, 내 몸은 나의 역사며 나는 내 몸의 역사란 점에서 뇌를 인공지능뇌로 바꾼다고 해서 다른 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뇌의 기능이 달라지고 이를 통해 전혀 다른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면 동일한 나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강화인간 포 무라사메가 상실한 기억과 과거로 괴로워하면서도 다른 자아로 살아간 것처럼. 그렇다면 다시 자기 동일성이 논쟁이 되겠지만 나는 왜 내가 혹은 우리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해야 하고, 자기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지를 질문하고 싶다. 뇌를 제외한 몸의 다른 부분이 완전히 같고, 몸의 역사를 공유 혹은 유지하고 있다고 해서 내가 그 전과 동일성을 유지하는 나일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매 순간 다른 나로 변한다는 의미의 나와는 다른 맥락에서 논하고 있다. 또한 책을 읽고 다른 내가 되었다는 표현 또한 여전히 어떤 자아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냥 전혀 다른 나, 동일성을 가정하지 않는 나/자아/주체로 인간의 몸과 삶을 다시 이야기할 수는 없을까? 아니, 이렇게 사유하고 상상해야 하지 않을까?
자아 동일성의 여러 근거 중 하나로 젠더 범주로 쓰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 논의, 인공지능뇌 이식과 자아 동일성 이슈는 트랜스젠더퀴어 이슈로 연결된다. 젠더퀴어인 나는 왜 어제와 같은, 혹은 내일과 같은 오늘의 어떤 젠더여야 하는가? 트랜스젠더퀴어인 나는 왜 특정한 방식의 젠더로 나를 확정해야 하는가? 젠더리스나 에이젠더, 혹은 젠더플루이드가 대안이란 의미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도 젠더 범주를 구성하지 않고 명명하지 않고 확정하지 않는 그런 젠더로 살며 나를 트랜스젠더퀴어로 부르는 것이 왜 안 되는가? 이런 질문이 등장한다. 나를 젠더퀴어의 다양한 범주 중 하나로 특정하지 않으면서, 젠더 동일성 자체를 전면 거부하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젠더를 살고 사유하는 틀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트랜스젠더퀴어 정치학에서 필요한 사유 중 하나는 이것일 아닐까란 고민을 했다. 오늘 내가 나를 트랜스젠더퀴어로 설명할 때의 이 ‘젠더’와 내일 내가 나를 트랜스젠더퀴어로 설명할 때의 그 ‘젠더’는 동일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동일성을 유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동일성이란 차원을 아예 다른 식으로 사유할 필요가 등장했다는 의미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이미 누군가가 열심히 탐문한 작업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