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학교에 가던 어느 길에서였나, 종교에서 자살을 금기시 하고, 금지하는 건 신도가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중얼거린 적이 있다. (종교를 믿는 분들껜 죄송해요.) 종교가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고 종교와 무관한 삶을 산 것도 아닌데, 그때 그렇게 중얼거렸다. 종교 없음이 곧 종교와 무관한 삶이라거나(가능하지도 않지만) 딱히 종교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문화적 유산”이라고 불리는 의미가 아니라면 애써 만나지도 않았다. 때론 피하기도 했는데, 어쨌거나 어떤 종교와 관련한 음악은 별로 안 좋아했다.
작년, 키드님에게서 두 장의 앨범을 선물 받았을 때, 너무 좋았고 그래서 주구장창 앨범을 들었지만, 제프 버클리의 너무도 매력적인 노래들 사이에서도, 한 곡은 그냥 넘어가곤 했다. “Hallelujah”란 곡. 그저 노래 가사를 통해, 할렐루야, 라고 읊조리는 것이 싫었다. 할렐루야라니….
그렇게 시간이 참 많이도 지났다. 얼마 전 어느 순간이었나, 이 앨범을 듣다가 갑자기 이 노래를 달콤하게 느꼈다. 그리고 급기야 어제 밤부터 이 노래만 듣고 있다. 할렐루야… 이 구절이 (어차피 가사를 확인 안 했으니 실제 가사의 의미는 모르겠고) 종교적 귀의 같은 느낌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절박함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란 말이라도 읊조리며 기대고 싶었다.
불교의 전해지는 (유명한) 일화: 한 사람이 죽어 저승길로 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가는 길에, 누군가가 계속해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외고 있더랜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관세음보살을 삼천 번을 외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했다나. 그 말에 그 사람은, “나는 바쁘니 삼천 번을 욀 시간이 없다”면서 “천세음보살, 천세음보살, 천세음보살”이라고 말했다. 관세음보살을 외던 사람이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볼 즈음, 천세음보살을 외던 사람은 극락으로 갔다고.
비록 불교 경전에도 어떤 형식을 적어 두고 있긴 하지만, 형식은 어차피 형식일 뿐이란 얘기다. 열망으로 바라는 것이 형식을 잘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일화 혹은 우화. 이광수의 “무명”이란 단편소설엔, 평소엔 종교를 박해하고, 누가 경이라도 외면 구박하던 사람이 자신의 재판 일정을 앞두고 몰래 “관세음보살”을 외는 장면이 나온다. 아니 에르노는 애인에게서 전화가 오면 자선단체에 200프랑을 기부하겠다는 식의 다짐을 하며 전화가 오길 열망한다. 만화 [아즈망가 대왕]의 치요는 횡단보도를 건너며 흰 색 선만 밟고 건너며 소원을 빌고자 한다. 그래서 요즘의 루인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흰 색 선만 밟으며 걷고 있다.
이 노래를 들으며, 계속해서, 할렐루야, 라고 읊조리고 있다. 노래를 반복해서 들으며 이 부분만 따라하고 있다. 할렐루야, 란 말이 단순히 종교적인 귀의가 아니라, 어떤 열망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선 반드시 할렐루야나 관세음보살일 필요는 없다. 루인이 매일 아침 인사하는 나무를 부를 수도 있고, 핸드폰 줄을 장식하는 별인형에게 말을 걸 수도 있다. 어차피 믿음을 지탱해 줄 힘이 필요한 것일 뿐. 열망을 송신하고 믿음으로 버티면서, 시간을 견디고 있다.
참, 오랜 만에 노래 가사에 위로 받고 있다. (키드님,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