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머리를 자르고 꽤 여러 사람을 만났거나 스쳐 지나갔는데 알아 본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무려 두 달 보름 전에 잠깐 만났을 뿐인 사람. 재밌다고 느꼈다. 이건 익숙함과 낯설음이 주는 차이일까? 익숙하기 때문에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낯설기 때문에 작은 변화에도 민감한 것. 익숙해서 풍경화로 사라진 것과 낯설어서 여전히 거슬리는 것. 하지만 그저, 루인은 누군가가 신경 쓰거나 관심을 가질 만한 종이 아니라고 결론 내리면 간단한 일이다. 풋.
(어찌하여 해러웨이의 [동반종 선언문]The Companion Species Manifesto 발제를 해야 하는데, 아아, 해러웨이의 문장은… ㅠ_ㅠ)
궁상떠는 것도 귀찮은 상황에서, 누군가의 한 마디에 내내 분한 감정을 품었다. 칫, 댁이 뭘 안다고 그래? 라고 중얼거리면서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고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옹졸해서 그렇다고 자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옹졸함이 주는 감정까지 해소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실 루인에겐, 소위 말하는 “금지어” 비슷한 것이 있다. 이 “금지어”의 효과는 그 사람과는 두 번 다시 아는 척 안 하는 것-세상에서 모르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다. 예전에 정확하게 이 말(“금지어”)을 해서 처음부터 알고 지낸 적 없는 사이로 바뀐 사람이 있다. 정확하게 이 말(“금지어”)과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유사 언어들. 그런데 이런 유사어를 말했고 그래서 상당한 위험 수위까지 갔다가 현재는 조금 수습한 상태.
어떤 의미에서, 혐오발화들엔 이렇게 까지 반응하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혐오발화는 ‘귀엽게’ 받아들이고 쌩긋, 웃고 마는 편. 하지만 컴플렉스 중 하나를 건드리면 문제가 달라지는데, “금지어”는 이것과 밀접하게 관련 있다. 으아악, 분하다고!!! -_-;;; 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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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자주, “나는 살 수 있을까? 살 만한 삶을 살 수 있을까?“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