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아는 사람과 얘기를 나누다가, 며칠 전 루인이 강의실 강의를 했다고 들었다며, 강의가 좋았다고 (그 수업의)선생님이 말하더라고 했다. 물론 이런 평가는 의례적인 말일 수 있고(비록 루인의 경우, 너무 많은 얘기를 의례적인 인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인사치레로 한 얘기일 수도 있다. 그런데 특강 이후, 수업게시판에 실명으로(익명게시판이 있음에도) 5명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다는 얘길 적었다고 하더라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강의가 아주 나쁘지는 않았구나 했다.
여성학 혹은 페미니즘 강의나 수업을 하는 사람들과 만나면 종종 메일로 커밍아웃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길 듣곤 한다. 물론 어떤 선생님은 이런 경험이 전혀 없다고 한다. 수업시간의 논의 방식, 학생이 강사에게 가지는 신뢰 등으로 생기는 현상이다. 수업의 마지막 한 시간으로 트랜스젠더나 퀴어, 동성애를 다룬다고해서 학생들이 강사에게 커밍아웃을 하지는 않는다. 전체적인 논의 구조를 어떤 식으로 가지고 가느냐가 쟁점일 테고, 그래서 학생이 커밍아웃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그 강사를 어느 정도 신뢰할 수도 있다는 걸 뜻한다.
그날, 특강 때 했던 말 중에, 루인이 나름 중요하다고 여기며 한 말은 두 가지:
1. 상대방의 외형을 안다는 것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첫 번째 숫자를 안다는 것이, 상대방의 외부성기 형태를 안다는 것이 무엇을 안다는 건지 고민했으면 해요.
2. (질의 응답 중에, 1번을 부연설명하며) 지금 이 강의실에도 말하지만 않았을 뿐, 트랜스젠더와 동성애자들이 있어요. 소위 남성이라고 혹은 여성이라고 여겨지는 외형으로, 또한 그런 외형에 따른 어떤 젠더 역할을 수행하곤 있지만, 말하지만 않았을 뿐, 사회가 요구하는 성별이나 성별역할과는 다른 식으로 자신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1번의 얘기는 다른 곳에서도 한 적이 있는, 아마 어느 강의를 가건 반드시 할 얘기이다. 2번은 맥락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할 수 있는 내용이다. 어떤 자리냐에 따라 말하는 내용의 수위를 조절할 필요가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얘기를 한다고 해서, 그것도 단 두 시간 특강강사(맨날 누군가의 강의를 들으러 가는 입장인 루인이 스스로를 특강”강사”란 식으로 부르는 건 참 민망하네요;;)의 말일 뿐이기도 하기에, 수업 반응은, 횡설수설이었다 정도로 예상했다.
그래서, 그날 특강 이후 다섯 명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다는 글을 적었다는 얘길 들었을 때, 아주 횡설수설하며 혼자서 쑈만 하고 온 건 아니구나, 했다. 사실 특강을 끝내며 메일주소(runtoruin@gmail.com)를 남겼는데, 한 통의 메일을 받기도 했다. 며칠이 지난 어제야 답장을 했는데, 그건 서울여성영화제 기간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메일의 내용이 그 자리에서 답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쁜 건, 커밍아웃 혹은 성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다는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대충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루인과는 또 다른 결로 얘기할 텐데 “안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루인이 그날 커밍아웃을 했기에 가능한 반응일 수도 있지만, 두 시간으로 끝나는 특강강사의 커밍아웃 만으로 수업게시판에 자신의 고민을 적을리 만무하다. 기본적으로 수업을 담당하는 강사를 신뢰한다는 전제 하에 루인이 촉매제 역할을 했으리라. 그리고 바로 이러한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기뻤다.
앞으로 계속해서 경험할 지도 모를 일들이고 이제 시작일 뿐이고, 앞으로 더 많은 상황들 속에서 더 많은 고민들을 해야 한다. 그래도 시작에서의 이런 경험은 기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