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P 중에서
종종 오만방자한 루인을 느낄 때가 있다. 잘난 것 하나 없으면서도 뭐가 그리도 잘났는지… 어떤 모임 자리나 세미나 자리에서 루인이 원하는 수준 혹은 루인을 자극할 만한 수준이 아니면 금방 산만함과 지루함을 드러낸다. 물론 그 사람이 루인과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면 루인이 원래 그런 인간이라고 느끼겠지만.
학부 마지막 학기 때, 대학원 수업을 청강한 적이 있다. 직전 학기에 미리 허락을 구할 정도로 기대를 하고 들어간 수업이었다.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고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청강을 하며 분위기도 파악하고 조금은 적응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청강을 시작한 첫 날이었나 그 다음 시간이었나.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대학원생이 이렇게 무식할 수도 있구나”라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땐 그 사람들의 “무식”에 치를 떨었지만 사실 지금, 석사 3학기인 루인의 입장에선 그저 루인의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았을 뿐임을 안다. 루인은, 대학원생이라면 그 수업시간에 하는 논의 정도는 기본적으로 알 거라고 기대했다. 아니, 적어도 그 정도는 “상식” 수준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고, 루인이 요구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함을 알았다. 결국 두 달을 못 듣고 그 수업에 안 들어갔다. 수업이 한없이 지루했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루인은 결국 실망만 잔뜩 안고 청강을 중단했고, 한동안 대학원 진학에 회의를 품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그 시절의 루인이 경악했던 모습의 대학원생이 지금의 루인이기도 하다.
이런 기대가 종종 과도한 기대임을 알면서도, 루인은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루인이 기대하는 어떤 수준을 만족시켜주지 않으면 금방 지루함을 느끼는 편이다. 루인의 이상형이(반드시 어떤 연애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해도) 소통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똑똑한 사람인 것은 이것과 관련 있다. 똑똑함이 지식의 정도를 의미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얘기를 나누며 상당한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걸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기대에 미치지 못함을 깨달을 땐 더 이상 얘기를 나누지 않으려는 편이다. 분명 루인의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을 못 견딘다.
이런 지루함, 혹은 못 견디게 불편하고 얘기를 나누려는 의욕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방식 중엔 “남성과 여성”이라는 것과 관련 있다. 특히나 젠더를 논하는 자리에선 더욱 그러한데,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거나 그런 문제제기는 예외적인 별도의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접할 때 특히 그러하다. 도대체 그 “여성” 혹은 “남성”이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혹은 상대방이 의미하는 “여성” 혹은 “남성”과 루인이 의미하는 것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는데, 마치 그것은 누구나 공유하는 것인 양 얘기를 할 때, 그럼에도 “그것은 생물학적인 여성이나 남성인가요?”라고 물을 땐 (사실상 그러함에도)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때,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이분법에 근거해서 설명 할 때, 초반의 짜증은 어느새 지루함과 산만함으로 드러난다. 그러며 더 이상 그런 대화의 과정에 있지 않으려고 한다.
※상대방이 소위 학제에서 공부하는 사람일 때, 특히 젠더와 관련해서 공부하는 사람일 때, 루인에게 이런 설명은 태만함을 의미한다. 소위 말하는 “생물학적인 여성” 혹은 “생물학적인 남성”은 아니라고 부연설명하면서도 루인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 그러할 때, 이건 태만함 그 이상이다.
오늘 수업을 듣다, 기어이 폭발할 것 같았다. 수업 내내 아무 말도 안 하고 다른 고민을 하며 수업과는 상관없는 다른 일을 하곤 했다. 물론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들어간 수업이었다. 그 수업에선 커밍아웃을 하지 않으면서 소통할 방법을 모색하겠다는 다짐으로 들어갔다. 수업을 듣는 다섯 명(루인을 포함) 중 한 명을 제외하면 루인이 트랜스임을 알고 있다. 다만 두 명의 선생님들(일종의 팀티칭)은 모르고 있다. 그러니 커밍아웃을 하면 의외로 쉬울 수도 있겠지만, 아니다. 두 분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분들이 얘기하는 젠더와 루인이 얘기하는 젠더의 의미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기 때문에 커밍아웃을 안 하니만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고.
그래서 수강을 취소할까 고민 중이다. 단순히 젠더를 둘러싼 논의만 불편한 게 아니라, 선생님들이 진행하는 수준이, 차라리 학부 과정이면 적당하겠다 싶을 정도였다. (당연히 이건 루인이 수업에 요구하는 기대치에 따른 평가이다. 그리고 좀 더 심한 말을 적었다가 수정했다. 다른 한 편, 이런 식의 평가는 학부 여성학 수업을 폄하하는 발언이란 점에서 문제다. 루인이 들은 학부 여성학 수업 중엔 어지간한 대학원 수업보다 좋은 과목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업을 듣는 동안, 다음 학기에도 수업을 들으며 한 학기를 더 다녀 5학기 만에 논문을 쓰는 한이 있어도 수강을 취소하고 싶다고 몸앓았다. 올해 다니는 것도 조금은 위태로운 경제적인 상황이고 내년엔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을 상황임을 알고 있는데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수업 끝나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이 즐거워 어느 정도 진정할 수 있었지 아니었다면 수강취소를 확정했을 듯싶다. 다음 주 월요일에 있을 지도교수와의 개인연구 시간에 상담을 해야겠다. 선생님께 털어 놓고 조언을 구해야겠다.
…거짓말! 결국 루인이 결정하고선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겠지. 물론 그 과정에 루인의 결정을 뒤집을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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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으며, 상당히 까칠한 상태구나, 싶다.(새삼?) 수정할까 어쩔까 고민하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이런 감정도 남겨둘 필요가 있을 테니까. 언젠간 루인이 이 글을 읽으며 반성할 때가 올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