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

나는 어쩌면 앞으로 내 기억력과 더 많이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고민을 하고 있다. 계속해서 잊어버리고 잊고 망각하고 있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떤 글을 읽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아득한 느낌, 어렴풋한 느낌으로만 남아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어렴풋한 형상이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라 정말로 그런 상태다. 그리하여 나는 나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내 기억력이 약해지거나 흐릿해지는 이 기억력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사실마저 어느 순간 잊겠만.

영화 하프, 관람 후기: 트랜스젠더퀴어와 구금시설 이슈

시사회로 트랜스젠더퀴어 관련 영화라는 [하프]를 봤다. 영화가 끝났을 때 나는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는 고민과 이 영화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고민을 동시에 했다. 아무려나 이 글엔 스포일러가 가득하다.
이 영화와 관련한 또 다른 평은
“트랜스젠더 서사” http://wanbyun.org/archives/5824 by 안팎
“개같은 영화, 하프(스포주의, 관람주의)” http://wanbyun.org/archives/5821 by 상어
영화은 지독하게 익숙한/진부한 풍경으로 시작한다. 반짝이는 악세사리와 화장품을 보여주고 나면 긴머리카락의 여성스러운 뒷모습을 나타난다. mtf/트랜스여성을 비추는 전형적 방식이다. 그 장면이 지나가면 주연/주인공 이민아의 얼굴을 비춘다. 조금은 어색하게 화장을 한 얼굴. 그 얼굴을 줌아웃하면 여성형 유방으로 불리는 가슴 형태가 추가로 드러난다. 다시 줌아웃하면 남성형 외부성기라고 불리는 외성기 형태가 추가로 드러난다. 그렇게 mtf/트랜스여성의 전신이 드러난다. 이 장면은 여러 의미를 생산한다. 감독이 mtf/트랜스여성이라면 떠올리는 유일한 이미지가 이렇기에 이 모습을 노출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누드로 노출된 mtf/트랜스여성의 몸은 좀 더 많은 질문을 던지는 듯도 하다. ‘당신들이 트랜스젠더 혹은 mtf/트랜스여성에게 궁금한 건 바로 이런 몸이지, 이런 몸을 보고 싶었지?’와 ‘당신들은 트랜스젠더하면 예쁜 얼굴에 완벽한 여성의 몸만 떠올리겠지’와 ‘트랜스젠더하면 궁금한 건 이렇게 몸의 형태지 다른 건 아니지?’와 … 뭐 이런저런 다양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독해할 수 있는 장면이다. 영화 속에 내가 있는데 그것은 대상이라고 하기에도 도전적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그런 복잡한 의미를 생산하고 있었다.
물론 카메라 촬영 기법은 강한 문제거리로 남는다. 감독은 줌아웃이란 형식으로, 즉 사건을 선정적으로 다루는 방식을 차용하여 이민아의 몸을 재현했다. 영화의 이 장면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지점이지만 감독은 매우 불쾌한 방식으로 이를 재현했다는 점에서 문제도 동시에 발생한다.
영화 초반에 주인공 이민아의 전신 누드를 재현한 건 영화 내에서 여러 가지로 의미 있고 중요한 장면이었다. 영화 초반 트랜스젠더 업소를 찾은 손놈(고객, 손님)은 이민아의 동료 세희에게 성기 형태를 보여달라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이로 인해 세희, 핑크, 왕언니(모두 민아가 일하는 업소의 동료다)는 그 손놈과 싸움을 한다. 그런데 그 손놈이 한 질문, 성기 모양이 어떻게 생겼냐는 비트랜스젠더퀴어가 트랜스젠더퀴어에게 은연 중에, 노골적으로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이다. 물론 그 손놈처럼 직접 물어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달리 물어볼 수도 있다. “수술은 하셨어요?”, “수술 언제 할 거예요?”와 같은 방식의 질문은 모두 그래서 너의 외부성기 형태가 어떤 상태냐, 어떤 모양이냐란 질문의 다른 판본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고, 영화 초반의 누드 장면과 정말 잘 어울리는 순간이 바로 그 손놈이 등장할 때였다. 아마도 그 질문 혹은 궁금함은 영화 관객이 가장 궁금해 할 내용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질문을 하는 손놈과 싸우는 순간은 그런 궁금함이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를 알려준다. 이 영화에서 건질 수 있는 몇 가지 장면 중 하나다.
mtf/트랜스여성의 외부성기 형태는 이 영화에서 계속해서 중요한 장면을 연출한다. 외부성기재구성 수술을 하지 않아 남성형 음경이 있다고 가정하는 사람은 여성인가, 혹은 여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발기하는 음경이 있는 사람은 여성인가 아닌가? 혹은 mtf/트랜스여성의 발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외부성기 형태가 음경 모습이며 그 자신은 여성으로 인식할 때 그 사람은 구금시설 어디에 수용되어야 할까? 이 영화의 초반에 재현된 누드 장면은 이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일련의 질문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민아는 같은 업소에서 일하는 동료 유리가 전/애인에게 심각한 수준의 구타를 당하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자신이 학창시절 겪은 학교폭력 피해를 상기한다. 그 순간 욱한 민아는 주변에 있던 도구를 이용해 전/애인의 폭력을 저지하려 한다. 물론 그 도구로 뒤통수를 쳤기 때문에 유리의 전/애인은 즉사한다. 그리고 영화의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검사 장재진은 고의 살인으로 기소했고, 변호사 김기주는… 흠… 김기주는 국선변호사 임기가 끝나가고 있는 인물이며 민아의 변호사로 활동한다. 그리고 이 영화의 실질적 주인공이다. 처음엔 변론하길 싫어했지만 mtf/트랜스여성 이민아를 변론하는 과정에서 트랜스젠더퀴어 이슈 혹은 소수자 이슈를 이해하는 인권변호사로 변해간다는 그런 흔한 성장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 김기주는 이민아를 변론하길 원하지 않아 다른 사람으로 바꾸길 바랐고, 이민아를 처음 만났을 때 왜 죽였냐며 이민아가 죄를 실토하길 다그쳤다. 그런 그는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트랜스젠더퀴어인 이민아와 어린 시절 시설에서 자란 김기주 자신이 비슷한/연대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깨닫고 진심으로 이민아를 변론하려 한다. 나는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라고 적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는 김기주의 변화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 아니 거의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김기주가 다른 배경 좋은 변호사와 달라 시설에서 자랐고 그런 경험이 트랜스젠더퀴어인 이민아와 공감하는 계기가 되었을 거라고 사실상 퉁치고 넘어간다. 물론 김기주가 이민아의 삶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태도를 바꿀 계기가 아예 없었다고 할 순 없다. 감독 나름으론 그 계기를 설명했다. 단지 설득력이 전혀 없다. 물론 스토리 전개가 맥락이 없고 설득력이 없음은 이 영화 전반에 걸친 문제기도 하다. 사건이 발생하고 재판이 진행되고 최종 선고가 난다는 흐름은 있지만 이야기 전개는 계속해서 뜬금없고 단절된다.
영화 초반에 김기주가 이민아 사건을 조금이나마 진지하게 접근하려 한 계기는, 그의 친구가 한 말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공개해서 언론이 보도하면 인권단체가 붙을 것이고 여론전에서 승리하면 재판에서 이길 것이라고 한 친구가 말했다. 이런 식의 말은 또 다른 지인이자 김기주를 대형 로펌에 스카웃하려고 애쓰는 차변호사가 한 말이기도 하다. 실제 김기주는 그렇게 행동한다. 무엇보다도 대형로펌 대표가 김기주에게 이민아 사건에서 승소하면 즉각 스카웃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영화가 끝날 때가지 김기주의 태도는 정확하게 이런 목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민아가 살인죄로 7년형을 선고받은 뒤 김기주와 이민아가 만나는 자리에서 이민아는 항소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에 김기주는 반드시 항소하도록 만들겠다고 소리친다. 물론 이 외침은 김기주가 이민아를 어떻게든 도와주려는 태도에서 발현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미래(대형로펌에 취직)와 관련 있기 때문이란 의심을 버릴 수 없다.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감독은 로펌 제안에 대해 김기주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특히나 영화 후반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화 초중반의 태도, 즉 로펌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욕망이 지속된다고 유추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김기주/감독은 이민아를 구제해야 할 대상으로, 자신이 인도하고 바꿔놓아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하지 스스로 판단하는 개인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끊임없이 포기하지 말고 싸우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이민아는 끊임없이 싸우고 또 싸우고 있다.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 트랜스젠더퀴어로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의 양식으로 살기 위해서 끝까지 싸우고 있다. 그 모든 걸 김기주는, 그리고 감독은 인식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민아가 끊임없이 연약한 존재,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존재로만 그리고 있다. 김기주를 통해서만 뭔가 바뀔 수 있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나는 김기주가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인식했다.
동시에 ‘이 시간울 공개하면 인권단체가 움직일 것이다’라는 김기주 친구의 말은 감독의 인식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그 말은 김기주와 그 주변 동료가 생각하는 인식 수준을 반영하는 말이며, 캐릭터를 구축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발언이다. 그래서 캐릭터의 성격을 표현하는 대사로서 무척 탁월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독이 이민아를 대하는 태도를 확인하면서 그 말은 또한 감독의 말이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 근거라면 카메라 워킹이다. 카메라는 끊임없이 이민아의 몸을 훑어내리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이민아가 구치소에서 폭행을 당했고 그로 인해 얼굴 등에 많은 상처가 생겼다. 그 상처를 보여줄 때도 카메라는 에로틱한 장면을 훑듯 이민아를 훑어 내린다. 이 시선을 승인하고 사용했다는 것은 감독이 그 시선과 동일시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물론 상처를 훑는 시선은 김기주의 시선을 설명하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감독의 시선이기도 하다. 감독이 정말로 트랜스젠더퀴어를 한 명의 동료로, 자신의 삶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존재로 인식했다면 이런 카메라 연출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며 가장 괴로웠고 감독이 그나마 열심히 조사를 했고 이 영화를 많은 사람이 관람했으면 좋겠다고 갈등한 지점은 구금시설 이슈 때문이다. 이 영화를 김기주의 성장담이 아닌 또 다른 방식으로 요약하지만 구금시설과 트랜스젠더 이슈다. 이민아는 살인혐의로 용산구치소에 구금된다. 물론 초반에 민아는 남성구치소에 구금된다. 그곳에서 이민아는 몇 차례 폭력과 성폭력 위협을 겪다가 두어 차례 성폭력 피해를 겪는다. 그로 인해 변호사는 구치소장과 면담을 하고 이민아를 여성구치소로 이감하는 협상을 진행한다. 물론 영화기에 이민아는 여성구치소로 이감되고 이 사실을 언론은 법무부의 인권진전 운운하는 제목으로 보도한다. 그런데 김기주는 구치소장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이민아의 여성형 가슴을 찍은 사진을 소장에게 보여준다. 나는 이것이 그가 결코 인권변호사가 되지 못 함을, 감독 역시 인권감수성이 별로 없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파악했다. 김기주 혹은 감독에게 조금의 인권감수성이라도 있었다면 그 사진을 사용해선 안 되었다.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의사의 진단서 같은 것으로 충분히 대체할 수 있었다. 아무려나 이민아는 여성구치소로 이감되었다. 하지만 여성구치소에서도 여전히 집단구타를 경험한다. 아울러 같은 방의 다른 수용자는 이민아를 성폭력한다. 후술하겠지만 어머니의 자살로 고통스러워하던 와중에 성폭력 피해로 이민아는 성기를 직접 절단한다.
어떤 사람에게 이런 일련의 기술은 매우 끔찍하게 심각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면 영화에서 표현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최대한 열심히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까 구금시설에서 성폭력 사건이나 구타 사건, 트랜스젠더퀴어가 겪는 어려움이나 고통은 영화의 것보다 더 심각하다. 구금시설 내 트랜스젠더 이슈를 연구한 문헌 중 하나는 남성구금시설에선 성폭력 가해를 하거나 피해를 겪거나 둘 중 하나며 성폭력은 통과의례라고 기술했다. 또한 구금시설에서 트랜스젠더퀴어 이슈가 발생하면 적잖은 시설의 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독방행을 선택한다. 트랜스젠더퀴어를 독방에 구금한다. 독방은 처벌의 의미가 강하고 타인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으며 때때로 햇볕도 제대로 쬘 수 없는 환경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이민아가 독방에 구금되는 것은 트랜스젠더퀴어가 빈번하게 겪는 일이다. 영화는 이런 상황을 최대한 순화해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구금시설에서 트랜스젠더퀴어가 겪는 상황을 고민한다면 내용 자체는 매우 순화했지만 어쨌거나 지금 구금시설에 있는 트랜스젠더퀴어가 실제 겪고 있는 일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괴로워했다. 그리고 갈등했다. 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구금시설 내 트랜스젠더퀴어 이슈를 조금이라도 고민하는 계기가 된다면 이 영화를 더 많은 사람이 보는 것이 좋은 것일까 하고. 단순히 사회가 트랜스젠더퀴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막연한 고민 말고 구금시설 내 트랜스젠더퀴어 이슈를 적극 고민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나마 이 영화는 관람할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런데 영화의 문제는 계속해서 발생한다. 카메라는 구금시설에 있는 이민아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이민아가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운지를 표착하려 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이민아를 대상화하거나 볼거리로 만드는 방식으로 촬영한다. 그래서 독해하기에 따라 그냥 이민아의 고통을 극대화하려는 장면 연출을 위해 구금시설이 등장한 것일까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 영화의 시선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이 지점인데 감독은 이민아를 가장 고통받는 존재로만 그리려고 하거나 성애적 대상으로 묘사하려 한다. 이 둘 중 하나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잘 없다. 혹은 트랜스젠더퀴어인 이민아의 고통을 성애화하거나. 이러다보니 구금시설 이슈도 제대로 부각되지 않으며 트랜스젠더퀴어란 점도 그리 중요하게 부각되지 않는 인상도 든다. 그냥 고통받는 상황 연출이 목적인가 싶기도 한다. 감독은 시사회 전 자신이 매우 힘들 당시 이 시나리오를 썼다고 했다. 물론 고통이 아니라 희망을 말하고 싶다고 했지만 정말 그 목적을 위해 구금시설 내 트랜스젠더가 동원되었다는 의심 역시 버릴 수가 없다. 구금시설에 있는 트랜스젠더퀴어인 이민아를 통해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감독 자신의 고통과 희망을 말하고 싶다는 목적이 이민아를 채택했단 뜻이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이민아는 구금시설에 있는 트랜스젠더퀴어가 아니라 시설 내 장애인이었어도 별 상관이 없었을 듯하다.
아무려나 구금시설에서 이민아가 겪는 일은 인권담론이 무엇이며 “인권신장이 이루어졌다”는 식의 홍보/평가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여실히 드러낸다는 잇점은 있다. 이민아는 그 자신이 원하는 여성구치소로 이감되었지만 불편한 생활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랬을 때 인권이 신장되었다는 평가는 무엇을 근거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트랜스젠더퀴어 수용인이 원하는 구금시설에 수용되는 것이 중요한 만큼이나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작일 뿐이다. 인권신장과 같은 표현은 적어도 인권신장의 대상에 해당하는 집단/개인이 하는 평가나 판단이 아니다. 그것과 무관한 사람, 판단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 오만한 집단/개인이 할 수 있는 판단이자 평가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또 다른 장면은 이민아가 여성구치소에서 지내던 어느 날 밤 발기를 한 순간이었다. 이민아는 그런 순간을 엄청 괴로워했고 발기를 중단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 노력은 방에서의 삶을 더 힘들게 한 계기가 되고 구금시설 내 트랜스젠더퀴어의 호르몬 투여 이슈를 제기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민아에게 호르몬제를 제공할 것인가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영화에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분량으로 등장한다. 이민아의 요청에 따라 교도관은 구치소장(교도소장이었나)에게 호르몬 투여 처방을 제안했고, 구치소장은 호르몬 투여를 처방할 의사가 시설에 없기에 호르몬 처방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맞다. 한국의 구금시설에서 트랜스젠더퀴어는 호르몬 투여를 할 수 없다. 물론 소장의 재량 문제가 있긴 하지만 공식적으로, 그리고 밝혀진 사건에서 호르몬 투여를 하던 트랜스젠더퀴어가 수용되면 호르몬투여를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 중요한 이슈다. 좀 더 길게 다뤘으면 했지만 다큐멘터리가 아니니까… 그런데 단순히 트랜스젠더퀴어만 호르몬 투여를 진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국가에서 지정한 약, 혹은 구금시설 의무담당관이 처방하거나 허락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중요한 약도 사용할 수 없다. 한 연구에 따르면 화상이 매우 심한 수용인이 외부에서 사용하던, 유일하게 효과가 있던 화상연고 사용을 요청했지만 규정에 어긋난다며 거절했다. 그 규정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연히 그 수용인은 증세가 악화되었다. 즉 이것은 단순히 트랜스젠더퀴어만의 이슈가 아니라 수용 시설 내 수용인의 인권 이슈이자 수용인이 최소한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호르몬 투여를 중단하면 mtf/트랜스여성은 다시 발기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가슴이 작아진다. 호르몬으로 발육한 가슴이 완전히 사라지는지는 개인차가 있겠지만 상당히 작아진다. 영화 말미에 가면 다시 한 번 이민아의 누드가 나온다. 물론 마지막 장면에서의 누드는 이전과 달리 흐릿한 창에 비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장면에서 이민아의 가슴은 거의 줄어들어서 여성형 가슴이 있었다고 상상할 수 없는 크기로 변했다. 그때 이민아는 중얼거린다. “결국 또 갇히는구나.” 다중적 의미다. 재판 과정에서 장재진 검사가 이민아를 두고 어딜 봐서 여자냐고 남자라고 말한다. 이에 김기주 변호사는 이민아가 껍데기에 갇힌 불쌍한 여자라고 항변한다. 마지막으로 이민아가 중얼거린 그 말은 김기주의 언설과 공명하면서 전형적 트랜스젠더퀴어 서사, ‘잘못된 몸에 갇힌 존재’란 수사를 환기시키고 반복하고 재생산한다. 하지만 “결국 또 갇히는구나”는 재판 결과에 따라 구금시설에 완전 수용된 상황도 상기시킨다. 나름 괜찮은 표현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잘못된 몸에 갇힌 존재란 표현이 매우 문제가 많을 수 있다. 나 역시 이 표현에 긍정적 입장을 취하진 않는다. 강의에선 이 표현의 문제점을 적극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젠더퀴어라고 해도 내가 잘못된 몸, 혹은 내가 원하지 않는 몸과 강하게 갈등하는 경우가 있다. 잘못된 몸에 갇히는 것과 원하지 않는 몸과 강하게 갈등하는 것이 동일한 의미라곤 할 수 없다. 하지만 때로 이것은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 유사한 의미일 수도 있다. 아울러 자신의 몸에 큰 갈등이 없다고 해도 때때로 내 몸과 갈등하고 내 몸이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발생하기도 한다. 또한 감옥은 공간 이분법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원젠더 규범에 따라 공간이 구획되어 있고 수용인 역시 이원젠더 규범에 따라 다뤄진다. 그것이 독방이건 어디건 이원젠더 규범에 따란 처우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민아 입장에선 다양한 의미에서 “결국 또 갇히는구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저 표현이 매우 문제적이면서도 나름 괜찮은 표현이라고 느꼈다. 내가 이민아와 같은 상황이었다고 해도 저렇게 중얼거렸을 것 같으니까.
내가 영화에서 가장 불편했던 장면은 영화가 이민아의 어머니인 정희연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이민아는 그나마 조력자가 있었지만 정희연에겐 없었다. 이민아 사건이 언론에 공개된 이후 이웃 주민은 수선실을 하는 정희연이 동네에서 떠나길 요청하고 익명의 누군가는 정희연의 집 앞에 온갖 욕설을 퍼붓고 전화로 욕설을 하고 집에 돌을 던진다. 그 모든 걸 정희연은 온전히 온자 감당한다. 그런데 모든 것을 감당하는 정희연의 역할은 어머니라면 으레 그러해야 한다고 믿는 모성신화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화가난 순간이라면 바로 이런 연출 때문이며, 그래서 주변의 갖은 혐오폭력으로 자살을 선택했을 때 감독에게 정말로 화가났다. 시나리오를 정말 이런 식으로밖에 쓸 수 없었는가? 트랜스젠더퀴어를 향한 다양하고 직접적 혐오는 정희연이 모두 감당했고 정희연이 자살하면서 관련 장면은 영화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실제 트랜스젠더퀴어나 범죄인의 가족이 주변의 다양한 혐오를 겪고 있으며 그것이 너무 힘들어 자살하는 경우가 있다. 정희연의 행동이 황당하단 의미가 아니다. 왜 정희연이 그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사라져야 했는가다. 정희연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런 상황에 대응할 수 있었다. 김기주가 아니라 정희연이 이민아를 찾아가 용기를 주고 그 모든 상황을 돌파할 여지를 만들 수도 있었다. 이 영화가 김기주의 ‘성장’담이라고 말하는 또 다른 이유이자 정말 불쾌한 순간이다. 어머니는 영원히 어머니로서 자식에게 부담을 덜어줘야 하는 존재일 뿐인가? 그렇게 재현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런 와중에 정희연이 자살하자 이민아는 장례식장에 참가할 수 있도록 배려되었다. 상복을 갈아입어야 하는 순간에 이민아는 갈등한다. 그리고 남성용 상복을 선택한다. 안타까운 장면이지만 이해가 되는 장면이기도 했다. 어머니 정희연의 최종 의중을 알 수 없었던 그때, 이민아가 아는 수준에서 정희연은 이민아를 이민수/아들로만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민아는 어머니를 보내는 마지막 순간만큼은 아들로 보내드리겠다고 결심했을 수도 있다. 그 결심이 누군가는 안타깝고 누군가는 이해가 안 되겠지만, 이민아 입장에서만큼은 그것이 최선의, 그리고 그 당시로선 유일하다고 생각한 예의였으리라. 물론 정희연은 이민아가 여성용 상복을 입길 바랐겠지만.
그리고 남은 이야기.
이 영화는 매우 규범적 서사를 차용해서 트랜스젠더퀴어 이민아를 재현하지만 마냥 규범적이지도 않다. 재판과정에서 밝혀졌듯 직장 동료인 유리와 6개월 가량 동거를 한 경험이 있다. 고등학생 시절에도 여자친구를 사귀기도 했다. 이것은 이민아를 이성애자-천상여자란 mtf/트랜스여성 규범에 결코 부합하지 않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 두 에피소드는 이 영화에서 다양한 틈새를 만들 수 있는 강력한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 가지 에피소드는 틈새가 되지 못 했다. 일단 감독은 이 두 가지 에피소드를 전혀 수습하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에피소드는 이민아가 유죄선고를 받는 결정적 사건이지만 전혀 수습되지 않았다.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고 나오고선 더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 두 틈새는 재판 과정에서 이민아의 살인죄를 증거하는 진술이나 사실로 등장한다. 즉 재판에 불리한 진술로 등장함으로서 틈새는 매우 손쉽게 수습된다. 즉 이민아의 삶과 관련한 혹은 트랜스젠더퀴어의 삶과 관련한 더 복잡하고 다양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장면이지만 ‘불리한 진술’이었기에 인식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안타까운 순간이고 감독의 한계가 분명한 순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민아가 고등학생 시절 애인을 괴롭혔다고 했던 증언을 더 파고 들었다면, 영화 [하이힐]처럼 mtf/트랜스여성의 남성성 이슈나 폭력성 이슈를 탐문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증언/사건은 그냥 묻힌다(재판이 끝나고 이민아가 이 사건의 진실이 궁금하지 않느냐고 김기주에게 물었을 때 김기주는 듣고 싶지 않다고, 어쩐지 알것 같다고 답했다. 하지만 나는 듣고 싶고 이 사건을 제대로 파고 들어야 했다고 믿는다).
장재진 검사는 이민아가 유리와 동거한 적 있고, 그래서 치정에 의해 유리의 전/애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이민아가 mtf/트랜스여성이 아니라 트랜스젠더인 척하는 남성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장재진 검사는 이민아의 고등학생 시절 애인을 찾아내고 그에게 이민아가 그때도 자신을 여자로 생각했느냐고 묻는다. 당시 애인은 그렇지 않고, 일진과 어울리는 남자였다고 답한다. 이 역시 이민아가 트랜스젠더가 아닌 근거로 쓰인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만약 레즈비언이거나 바이섹슈얼인 mtf/트랜스여성이 살인 사건에 휘말린다면 얄짤없이 자기보호가 아니라 치정에 의한 가짜 트랜스젠더의 고의적 살인사건이 된다.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여자로(ftm/트랜스남성이라면 남자로, 그런데 젠더퀴어는?) 생각하고 말하고 다니지 않았다면, 즉 티내고 다니지 않았다면 성인인 지금 트랜스젠더일 근거가 없다. 무서운 장면인 동시에 사회적 인식이 여실히 반영된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제목과 관련해서… 처음 ‘하프’란 제목을 들었을 때 황당했다. 하프가 뭐냐, 도대체 무슨 의미냐. 영화가 끝날 즈음 감독이 왜 하프라고 결정했는지 이해는 되었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어디에도 속하지 못 하는 존재란 점에서 하프라고 인식한 듯하다. 혹은 이민아의 몸이 여성형 가슴을 지니고 있지만 또한 남성형 성기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하프라고 인식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건 하프라는 건 감독의 인식 수준을 반영한다. 만약 이원젠더 사회에서 트랜스젠더퀴어가 겪는 어려움을 표현하고 싶었다면, 나라면 ‘경계’라고 했을 듯하다. 물론 그랬다면 내용 자체가 바뀌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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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사회 최대 코미디: 영화 시작 전 제작자, 감독, 배우가 나와서 인사를 했다. 그리고 모두 들어가려고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하자 제작자가 “차렷! 인사!”라고 외쳤다. 농담 같겠지만 진짜다. 뭔 짓거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