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발설, 소통

몇 해 전, 아침 9시에 문을 여는 교보를 본 적이 있다는 기억을 믿으며 아침 일찍 교보문고에 갔다. 오늘 있는 수업과 관련해서 참고할 책이 있어서. 발제를 할 것도 아니고 무슨 발표를 할 것도 아니면서 관련 서적을 읽고 싶었다. 물론 그 책에 실린 저자의 한 명이 양가감정을 일으키는 인물이기 때문에 뭔가를 확인하고 싶어서기도 했다. 9시 개장 시간에 맞춰 들어갔다가 얼른 학교에 가야지 했다. 8시 50분 즈음 교보에 도착했을 때, 입구엔 9시 30분 개장이라는 표시가 있었다. 이런. 지하철역에 있는 차디찬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책을 사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읽으며, 무난하다고 궁시렁거렸고, 지도교수이자 학과 주임교수인 선생님에게 잠깐 들렸다. 사무실에 들어서면, 느껴지는 어떤 낯설음. 지난 일 년 동안 거의 매일 머문 곳인데, 낯선 익숙함 같은 것이 있다. 언젠가 사무실에서 떠나는 날이 있다면, 떠나고 나서야 익숙해지겠지.

글을 마저 읽고 12시에 있을 학과 운영위원 선생님들 회의를 준비했다. 은근히 신경 쓰이고 긴장한다. 글은 (과장해서) 동시에 다섯 편도 읽을 수 있지만 사람과는 한 번에 한 사람 이상과는 얘기를 나눌 수 없는 루인이기에 이런 회의 자리는 신경이 잔뜩 쓰인다. 동시에 여러 선생님이 얘기를 하면, 몸은 퓨즈가 나가버린다.

몇 분의 선생님이 도착했을 즈음, 아뿔싸, 미쳐 준비하지 않은 것을 발견. 서둘러 건물에 있는 매점에 갔다. 그리고 반가운 만남. 기쁨. 하지만 미안함.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만났음을 실감하고 좀더 얘기를 나누지 못해 아쉬워한다. 늘 이런 식이다. 갑작스러운 만남 앞에선 언제나 헤어지고 나서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9년째 만나고 있는 친구를 빼면(루인에겐 오랜 시간이란 것이 중요하다, 곧 관련 글을 쓰겠지?), 늘 만났다는 사실을 깨닫기 까지 시간이 걸린다. 왜 그럴까.

회의는 더욱더 정신없이 지나간다. 퓨즈가 나가고 정신을 못 차릴 즈음 회의는 끝나고 곧바로 수업 준비. 주교제 외에 몇 권의 책을 더 챙기지만 어차피 수업시간엔 말을 별로 안 할 걸 안다. 수업에 적응하기까지 몇 주의 시간이 필요하니까. 다행인 건 선생님도 같이 듣는 사람도 모두 이미 안면이 있다는 정도.

수업 시간에 한 번 정도 얘기를 했지만, 저녁 5시, 수업이 끝났을 땐, 얼이 빠지고 진이 빠진 느낌. 토요일에 있을 발제 준비를 하나도 안 했기에 준비를 해야지 하면서도, [Run To 루인]을 연다. 뭔가 안정이 안 될 땐, 뭔가를 쓴다. 쓰는 것. 쓴다는 행위. 쓰다보니 포스팅 세 개는 될 분량의 글을 하나에 몰아넣는다. 발설. 말하고 싶다는 욕망만 남아 있는 상태. 정작 글을 쓴 본인은 그 글을 다시 읽지 않는다. 끔찍하니까.

그렇게 “열심히 한다는 것, 성실하다는 것: 두 가지 이야기“를 쓰고, 트랙백을 보내는데, 실패. 예전에 키드님 블로그에서 네이버로 트랙백을 보내면 안 되는 경우가 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보내긴 보냈는데, 도착하지 않는 트랙백. 어디 즈음에 머물러 있을까? 문득 그 트랙백이 루인 같다.

그렇게 쓰고도 모자라 또 한 편의 글을 쓴다. 그러다 문득 점심 외엔 밥을 먹은 적이 없단 걸 깨닫는다. 배고파…. 하지만 수업이 끝났을 때, 밥을 먹을까 하다 귀찮아서 관두기로 했었다. 玄牝으로 돌아오는 길에 단골 과일가게에 들린다. 주인이 최고로 맛있다는 귤을 사서 들어온다. 가격은 조금 비싸지만, 감동적인 맛을 누릴 수 있는 과일가게. 이곳으로 이사 온 이후 항상 가는 곳. 그곳 과일만 먹을 땐 몰랐는데(그곳이 비싼 곳인 줄도 몰랐고) 다른 곳에서 과일을 사먹으면 그곳이 얼마나 맛있는지 새삼 깨닫는다. 단골이란 게 이런 거다. 익숙해진다는 게 이런 거다.

또 글을 쓰고 있다. 이렇게라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이 계속해서 쓴다. 결국 발설의 욕망일 뿐. 쏟아 내고 싶다는 욕망만 남아 있음을 다시 확인한다. 며칠 전, 누군가가 이상형을 물었다. 망설임 없이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외모는 전혀 상관없느냐고 물었다. 어차피 외모는 익숙해지기 마련이라고 답했다. 물론 평생을 살아도 매일 같이 감동적인 외모도 있을 수 있겠지만, 결국 외모는, 외형은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소통의 욕망이 강한 루인에겐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소통한다는 것이 루인의 방식으로 얘기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눴는데, 상대방이 루인이 가장 뜨악해 하는 방식으로 얘기를 한다면 좌절할까?

루인과 같은 채식주의자여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 이것도 상대방이 채식주의자인가 하는 여부보다는 이와 관련해서 소통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에 그 글을 쓰고 난 후. 별자리 책에 루인은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만 남는 경향이 있다고 했는데 결국 그런 걸까?


오늘 하루도 이렇게 편집한다. 이렇게 루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편집해서 ‘사실’인 양 얘기한다. 현실이란 것도, 환상이란 것도 결국 같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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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핸드폰에 달고 있는 캐릭터는 이 아해다. (인터넷으론 실제 제품의 이미지를 구할 수 없어서 캐릭터 그림으로 대체.) 이 캐릭터를 보여주면, 사람들은 딱 루인이라고 반응하거나, 딱 루인이란 말에 동의한다.

그림으로는 좀 착하게 나왔는데 핸드폰 장식엔, 사악한 표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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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다 더 좋은 이미지…

예전에 잠수탔다가 돌아온 사람이 있어서, 얼굴만 내어 놓고 땅에 묻어 버릴 거라고 했는데(다시는 잠수 못 타게 하려고), 그때 깨달은 것이기도 하다. 사람을 얼굴만 내어 놓고 땅에 파묻은 다음, 해맑은 표정으로 쌩긋이 웃으며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는 루인.

이 이미지를 말해주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수긍하고 완벽하다고 말한다.

… 그런데 이런 글을 적으면서 좋아하는 건 또 뭐지;;;

열심히 한다는 것, 성실하다는 것: 두 가지 이야기

#관련 글이 있긴 하나, 공개하길 바라지 않는 공간이라고 느껴서…. 글 내용이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읽다가 문득 떠올랐어요. 오늘 점심시간에 매점에서 만나 반가웠고 기뻤어요. 🙂 워낙 정신이 없던 상황이어서 제대로 인사를 못해 미안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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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몇 해 전, 한 회사의 창고에서 창고정리로 취직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학교를 그만 두고 싶어서, 몰래 휴학을 하고 알바를 하다가, 알바가 지겨울 즈음, 그 회사의 창고관리로 취직했다. 자기소개서의 학력 난엔 고졸이 끝이었고 휴학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몇몇은 재수생인데 공부는 안 하고 회사 다닌다고 여기기도 했다.

한 보름 정도가 지났을까, 회식 자리에서 같이 일하던 한 사람이 루인이 성실하다고 참 열심히 일한다고 칭찬을 했다. 그것은 입에 발린 관용어구가 아니라 정말 그렇게 칭찬하고 있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는데, 입사하고 보름 동안 창고에 아무렇게 방치되어 있던 물건들을 종류별로 사이즈별로 분류하고 배치하는 등의 작업을 새로 다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혼자한 건 아니었지만, 두 명이서 관리하는 창고에 다른 한 명은 50대 중반이었기에 실질적인 노동은 루인이 했었다. 하지만 그때 “열심”이라는 말과 “성실”이라는 말이 좋은 의미로만 다가오지는 않았다.

딱히 내세울 다른 재능 하나 없는 사람에게 해주기에 무난한 칭찬이 “성실”이 아닐까 하고 의심했(었)다. 이런 의심은 알바로 매장에서 판매 알바를 하던 시절에 있었던 일에 기인한다. 세 개의 업체가 할인마트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팔고 있었고 ㄱ사가 매출 1위였고 ㄴ사[루인이 다녔던 곳이라고 치고]와 ㄷ사는 비슷비슷한 매출을 올렸고 종종 3위를 하기도 했었다. ㄴ과 ㄷ을 합해도 ㄱ사의 매출이 더 놓은 그런 상황.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망치려고 했고 외면하고만 싶던 시절이었기에(지금이라고 그렇지 않겠느냐만;;;) 알바에 매달렸고, 어느새 ㄷ사와는 상당한 매출 차이를 보이는, ㄱ사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지만 ㄱ사가 위기감을 느낄 정도는 되는 그런 매출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때 ㄱ사의 알바생과 매장을 담당하는 직원이 와서 했던 말: “예전에 ㄴ사에서 ○○대(이른바 명문대다)에 다니는 학생이 알바를 했지만 그때도 우리 못 따라 잡았어.”
※이 말이 루인은 학벌차별을 경험했기에 ‘안다’고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알바를 하던 곳의 사람들도 루인은 고졸이고 대학엔 갈 의향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당시의 맥락에서, 한 편으론 사실이었고 다른 한 편으론 사실이 아니었고) 그 말은 “명문대 학생도 못 따라 잡았는데 고졸인 네가 우리를 따라 잡을 수 있겠느냐”란 의미였다. 이 말을 한 두 번 한 것이 아니라, 매출액의 간격이 좁아질수록 더 자주 했었다.

창고정리 및 관리 업무를 하기 시작한 후(알바를 그만 두고 싶다고 했을 때, 담당자가 루인에게 창고 관리를 제안할 수 있었던 건 이런 이유에서 였다, 만약 지금 판매 알바를 하라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다만 루인의 경쟁심만 자극한다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지금의 루인에겐 낯선 상상이다), 루인에게 성실하고 열심히 한다는 말이 주요 수식어로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문득 떠오른 게, 이거였다: 딱히 내세울 다른 재능 하나 없는 사람에게 해주기에 무난한 칭찬이 “성실”이 아닐까 하는 의심.

만약 루인이 어쨌거나 대학을 다닌 적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루인에게 붙인 수식어는 달라졌을 거고, 만약 루인이 소위 말하는 명문대라도 되었다면 그 수식어는 더욱더 달라졌을 테다. 일테면 “역시 명문대생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라거나 “똑똑한데 성실하기까지 하구나”라는 식으로. (한국의 대학서열화 방식을 빌려, 루인이 다닌 학교가 ○○대보다 서열이 더 높다고 평가되는 곳이었다면 어떻게 말했을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곳에서 로또와 관련한 말을 하다가 루인이 로또에 당첨될 확률을 계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사람들의 반응은, “내가 아는 친구가 수학과 나왔는데”라며 루인의 계산을 무시했었다. 하지만 지금 루인이 수학과였던 걸 아는 사람들은, 단순한 덧셈과 곱셈을 조금만 빨리 해도, “역시 수학과”라고 반응한다. 물론 루인 역시 이런 방식에서 자유롭지 않고,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영문과 출신이라거나 외국에 갔다 온 적이 있으면 “그럴 줄 알았어”라는 식으로 반응하기 일쑤다.

이런 경험들이 성실하다 혹은 열심히 한다는 칭찬은 다른 어떤 “내세울 만한 배경”이라고 불리는 것이 없는 이들에게 부여하는 수식어는 아닌지, 성실 할 것을, 열심히 할 것을 요구하는 것 역시 이러한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했다. 즉, 성실할 것을 요구 받는 것 역시 학벌이나 계급 등과 관련 있고 특정하게 범주화한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미덕”은 아닌가 하는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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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심 속에서도 루인이 자기 성실성에 상당한 강박이 있음을 부정할 수도 없다. 밤 혹은 새벽 12시(혹은 0시)에서 12시 30분 즈음에 잠들고 아침 6시에서 6시 30분 사이에 일어나고, 학교 사무실엔 8시 30분 즈음엔 도착하는 생활. 이런 생활 방식에서 조금만 엇나가도 게으르다고 비난하고, 사실 지금의 생활 방식도 게으르다며 불만족을 표한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루인이 (어쨌거나) 열심히 공부한다고 얘기하고 루인은 그렇지 않다고 항상 부정한다. 물론 이런 말은 상대적일 수 있고(“상대적일 수 있고”라고 쓰는 순간, 이건 상대방에게 원인을 돌리는 표현이란 점에서 문제가 있음을 깨닫지만, 그냥 두기로 한다) 그런 감각에서 하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루인은 왜 이리도 열심히 하는 것, 성실한 것-특히 자기 성실성을 자신에게 강하게 요구하는 것일까. 하지만 열심히 한다는 건 어떻게 한다는 것이며 성실하다는 건 어떻게 한다는 의미일까.

요즘 나태해졌어, 라는 표현을 하곤 하는데, 이 말은 항상 어떤 특정 시기(혹은 다른 누군가)를 기준으로 삼고 있기에 가능한 말이다. 그 당시에만 가능했고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맥락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준은 여전히 어떤 시기에 고착해 있기에 이런 식으로 현재의 자신을 평가한다.

루인의 생활 방식이 여전히 불성실하다고 여기는 건, 12시 넘어 잠들고 아침 5시에 일어나도 아무렇지 않았던 시절을 기준으로 삼고 있어서임을, 문득 깨달았다. 그땐 그렇게 생활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고 지금은 그렇지 않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어떤 시절을 기준으로, 척도로 삼고 있기에 불성실하고 나태한 인간, 루인이 된다.

책과 관련해선 사실 좀 더 웃긴 상황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작정하고 책을 읽으며 일 년 동안 250여 권의 책을 읽은 적이 있고, 고등학교 시절에도 야간자율시간이면 문고본 등으로 공부는 안 하고 책만 읽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와 문제집이 아닌 다른 책을 읽는다는 건,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노는 것이었다.) 맞다. 루인에겐 그 시절이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처럼 자리 잡고 있다. 루인은 그 정도는 할 수 있는데 지금은 이 정도 밖에 안 하니 너무 게을러. 하지만 그땐 그게 가능한 상황이고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다른 사람에겐 그렇지 않지만 자신에게만은 개수로 평가하는 루인이기에, 일 년에 책(루인에게 책은 여전히 단행본을 의미한다)이라곤 20권을 읽을까 말까는 곧 게으르다는 걸 의미한다.

물론 이런 자기 평가가 긍정적인 효과를 낳긴 한다. 끊임없는 자극과 긴장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하지만 왜 열심히 해야 하고 열심히 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어떻게 하는 것이 열심히 한다는 걸까? 하루에 20~30 페이지 분량의 영어 논문 한 편씩 읽으면 열심히 하는 것일까? 일주일에 책 세 권정도 읽으면 열심히 하는 것일까?

관심이 변했고 생활 방식이 변했고 노는 방식이 변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기준은 어떤 특정 시기에 고착해 있다. 왜 천천히 길을 걸으며 바람을 느끼는 건 성실하다거나 열심히 한다는 의미로 부를 수 없는 걸까? 왜 루인은 “바람을 느끼는 일에 열심히 한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걸까”라고 적는 걸까? 블로그에 매일 한 편 글을 쓰지 않으면 게으르다고 느끼면서 블로그에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며 불성실하다고 평가하는 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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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인은 열심히 해”라거나 “루인은 성실해”라는 말을 들을 때면, 몸이 복잡해짐을 느낀다. 위와 같은 이유 등으로. 성실함 혹은 열심히 함 이라는 말이 “칭찬”으로 작동하는 맥락과 그 말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은 루인의 감정들.

그럼에도 여전히 이렇게 생활할 것을 안다. 왜냐면 지금은 이렇게 살고 싶으니까. 지금은 이런 생활이 편하고 바라는 방식이니까. 그저 작은 바람이라면 “성실” 혹은 “열심”이라는 수식으로 이런 생활을 평가하지 않는 루인이 되는 것. “자기 성실성”이라는 말에 쉽게 매료되는 루인이기에 때문에. 그런 동시에, 이불 속에서 뒹굴며 공상(혹은 망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에도 “성실” 혹은 “열심”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 “성실” 혹은 “열심”의 의미를 고정시켜서 판단하기 보다는 슬쩍 장난치면서 노는 것. 이런 루인이 되는 것.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다짐 속에서, 이런 다짐 역시 소위 말하는 “성실” 혹은 “열심”이라는 어떤 강박의 산물임을 깨닫는다. 크헹. ㅡ_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