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린 T 민하 기획전

ㅌㄹ블로그에 놀러 갔다가 엄청난 소식을 접했다. “트린 T 민하 기획전”!!!

미디어극장 아이공 개관 첫 기획전
베트남, 탈식민주의 여성영상 트린 T 민하 기획전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에서 미디어극장 아이공의 개관 첫 기획전으로 아시아계 여성작가 트린T민하 기획전을 개최합니다.
베트남 출신의 여성 감독이자 학자인 트린T민하는 탈식민주의 관점으로 다양한 영화,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여성주의 작가입니다. 트린T민하의 작품은 베트남 문화, 정치, 여성의 정체성의 문제등을 독특한 형식으로 표현하고,‘차이’와 ‘관점’을 관통하는 그녀의 정치적 입장을 보여줍니다.
미디어극장 아이공은 트린T민하의 작품을 통해 오늘날 사회적 타자, 억압, 착취의 재생산에 놓여있는 제3세계 여성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고민하고, 타자로서 관통되는 문제의 지점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성,소수,비주류의 대안영상을 지향하는 미디어극장 아이공은 이 기획전을 시작으로 주체로서의 여성성에 대한 소통의 장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또한, 이번 기획전은 각종 영화제에서 상영된 트린T민하의 대표작을 비롯해 국내에서 상영된 바가 없었던 트린T민하의 신작도 상영되어 국내 관객들에게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행사 개요>
․ 행 사 명 트린 T 민하 기획전
․ 주 최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
․ 기 간 2007. 5.17(Thu) ~ 5. 30(Wed)
․ 장 소 미디어극장 아이공
․ 티 켓 일반 5,000원, 장애인/학생/단체(20인 이상) 3,000원
․ 문 의 TEL. (02)337-2870, igong@igong.org
․ 예 매 예매는 현장에서만 구매 가능
․ 홈페이지 http://www.igong.org

<상영작품 리스트> (8편 / 7섹션)
신작<사막은 보고 있다 The desert is watching> (11mins, 2003)
<사막의 몸 Bodies of the desert> (20mins, 2005)
<재집합 Reassemblage> (40mins, 1982)
<벌거벗은 공간: 지속되는 삶 Naked Spaces: Living Is Round> (135mins, 1985)
<그녀 이름은 베트남 Surname Viet, Given Name Nam> (108mins, 16mm, 1989)
<4차원 The Fourth Dimension> (87min, digital, 2001)
<사랑의 동화 A Tale of Love> (108min, fiction, 1995)
<밤의 여로 Night Passage> (98min fiction, digital, 2004)

출처와 작품 시놉시스는 여기로
트린 T 민하와 관련해서는 [여/성이론] 9호를 참고하세요!

수업:서울지역과 비서울지역에서 여성학, 고3경험

이번 학기를 시작하며, 처음엔 총 세 과목을 신청했다. 그러니 현재 두 과목을 듣고 있다는 의미. 결국 이렇게 되었는데, 지도교수와 많은 얘기, 상담을 하며 여러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고, 그래서 다음 학기에 더 흥미로운 과목과 놀기로 하고 두 과목을 듣고 있다.

그렇게 듣고 있는 과목들 중 한 과목은 목요일 2시에 한다. 오늘. 그리고 오늘 수업은 지난 주 휴강에 따른 보강 수업으로 선생님과 함께 저녁 먹는 시간까지 해서 2시에 시작해서 8시 40분 즈음에야 끝났다. 물론 저녁을 먹는 시간에도 수업과 관련한 얘기를 나눴지만, 그만큼 즐거운 시간이기도 하다.

이 수업을 들으며, 루인을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어서 즐거워하고 있다. 선생님의 쾌락적인 언어들도 좋지만, 또한 그런 과정에서 지금까지 간과하고 있던 경험들을 해석할 수 있는 틈들이 발생한다는 것, 수업을 듣는다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지금까지 알았던 지식을 확인하거나, 자신의 위치를 편하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앎들 사이에 있던 간극을 메우거나 간극과 균열을 발견하는 쾌락을 경험하는 것.

오늘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울지역에서 여성학을 한다는 것과 비서울지역에서 여성학을 한다는 것의 의미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문제는 이 “깨달음”이 명절 때마다 느꼈던 점이었음에도 한 번도 의식하지 않았다는 것.

서울에 소재한 대학에서 여성학을 공부한다는 건, 그다지 주류의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닌, 먹고 살기 어려운 일을 하는, 이란 식의 어떤 이미지가 있다. (한 편으론 사실이고 한 편으론 이미지고.) 그래서 대학원생이라는 어떤 계급성에도 불구하고 여성학을 한다고 하면 경영학을 공부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진 않는다. 물론 이런 반응은 루인이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성학과 사람들이거나 여성학/페미니즘을 매개해서 만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일 년에 두 번, 명절에 부산에 갈 때마다, 시공무원인 한 친척어른은 루인에게, 석사 졸업하면 지자체 계약직으로 일하면 되겠다는 말을 하곤 한다. 지자체 계약직의 경우 공무원에 준하는 대우이다. 사실, 지금까지 이 말이 가지는 여러 맥락들을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는데, 그저 공무원인 친척어른이 루인에게 하는 관례적인 의미로 받아 들였을 뿐이었다. 선생님께서 서울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는 것과 부산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는 것의 의미가 얼마나 다른지를 얘기하는 걸 듣다가, 불쑥 깨달았다. 예전에 부산 지역에 있는 한 여성학과 학생이 했던 말, 부산의 그 대학엔 공무원들도 많다고, 자자체와 상당히 많이 연결 되어 있다고. 그 학생의 말과 루인의 친척어른이 한 말의 연결 지점을 비로소 깨달은 셈이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일반화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님은 당연!

서울이라는 지역이 가지는 맥락 속에서 살고 있음에도 언제나 이런 식으로 맥락을 놓치곤 한다.

그러며 요즘 고민이 떠올랐다. 이른바 고3의 입시경쟁이라는 것의 의미가 가지는 학벌 차이.

흔히 입시 제도를 얘기하면 힘든 고3들, 입시정책에 따라 예민하게 반응하는 학생들과 학부모단체들, 뭐 이런 이야기들이 중심을 이룬다. 그러면 루인은 또, 아 그렇지, 대학에 입학하는 고등학생 시절은 정말 힘들지, 라고 중얼거리면서도, 그 말에 공감하지는 않는다. 예전에도 쓴 적이 있는데, 루인의 경우, 모의고사를 치면 뒤에서 1, 2등을 하는 그런 고등학교에 다녔고, 그 학교는 공립이었기에 학교 선생들도 그다지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 번 왔다가 몇 년 지나면 떠날 그런 학교였다. 입시제도가 바뀐다고 해서 신경 쓰는 학생도 드물었다. 어쨌거나 인문계였지만, 소위 인문계라고 얘기할 때 말하는 그런 고등학교가 가지는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언론(을 매개하는 여럿)에서 만들어내는 고3의 이미지, 과외 열풍, 학부모단체의 목소리들은 서울이라는, 그것도 모의고사 성적이 상위 1, 2등을 다툴 그런 학교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닐 런지. 서울지역과 비서울지역이 경험하는 방식이 다르고 사립과 공립이 다르고 모의고사 성적으로 평가하는 학교의 학력에 따라 다른데, 왜 그리도 고3의 이미지는 천편일률적인지. (일테면 ps의 경우 부산지역에서 모의고사 성적으로 1, 2등을 다투는 그런 고등학교에 다녔고, 그래서 이른바 고등학생 혹은 입시지옥이라는 어떤 생활을 했었다.)

한 번은 이와 관련해서 글을 쓰고 싶다. 당장은 아니고, 천천히 오랜 시간을 두고.

바람-열망: Jeff Buckley – Hallelujah

중학생 때, 학교에 가던 어느 길에서였나, 종교에서 자살을 금기시 하고, 금지하는 건 신도가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중얼거린 적이 있다. (종교를 믿는 분들껜 죄송해요.) 종교가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고 종교와 무관한 삶을 산 것도 아닌데, 그때 그렇게 중얼거렸다. 종교 없음이 곧 종교와 무관한 삶이라거나(가능하지도 않지만) 딱히 종교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문화적 유산”이라고 불리는 의미가 아니라면 애써 만나지도 않았다. 때론 피하기도 했는데, 어쨌거나 어떤 종교와 관련한 음악은 별로 안 좋아했다.

작년, 키드님에게서 두 장의 앨범을 선물 받았을 때, 너무 좋았고 그래서 주구장창 앨범을 들었지만, 제프 버클리의 너무도 매력적인 노래들 사이에서도, 한 곡은 그냥 넘어가곤 했다. “Hallelujah”란 곡. 그저 노래 가사를 통해, 할렐루야, 라고 읊조리는 것이 싫었다. 할렐루야라니….

그렇게 시간이 참 많이도 지났다. 얼마 전 어느 순간이었나, 이 앨범을 듣다가 갑자기 이 노래를 달콤하게 느꼈다. 그리고 급기야 어제 밤부터 이 노래만 듣고 있다. 할렐루야… 이 구절이 (어차피 가사를 확인 안 했으니 실제 가사의 의미는 모르겠고) 종교적 귀의 같은 느낌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절박함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란 말이라도 읊조리며 기대고 싶었다.

불교의 전해지는 (유명한) 일화: 한 사람이 죽어 저승길로 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가는 길에, 누군가가 계속해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외고 있더랜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관세음보살을 삼천 번을 외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했다나. 그 말에 그 사람은, “나는 바쁘니 삼천 번을 욀 시간이 없다”면서 “천세음보살, 천세음보살, 천세음보살”이라고 말했다. 관세음보살을 외던 사람이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볼 즈음, 천세음보살을 외던 사람은 극락으로 갔다고.

비록 불교 경전에도 어떤 형식을 적어 두고 있긴 하지만, 형식은 어차피 형식일 뿐이란 얘기다. 열망으로 바라는 것이 형식을 잘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일화 혹은 우화. 이광수의 “무명”이란 단편소설엔, 평소엔 종교를 박해하고, 누가 경이라도 외면 구박하던 사람이 자신의 재판 일정을 앞두고 몰래 “관세음보살”을 외는 장면이 나온다. 아니 에르노는 애인에게서 전화가 오면 자선단체에 200프랑을 기부하겠다는 식의 다짐을 하며 전화가 오길 열망한다. 만화 [아즈망가 대왕]의 치요는 횡단보도를 건너며 흰 색 선만 밟고 건너며 소원을 빌고자 한다. 그래서 요즘의 루인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흰 색 선만 밟으며 걷고 있다.

이 노래를 들으며, 계속해서, 할렐루야, 라고 읊조리고 있다. 노래를 반복해서 들으며 이 부분만 따라하고 있다. 할렐루야, 란 말이 단순히 종교적인 귀의가 아니라, 어떤 열망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선 반드시 할렐루야나 관세음보살일 필요는 없다. 루인이 매일 아침 인사하는 나무를 부를 수도 있고, 핸드폰 줄을 장식하는 별인형에게 말을 걸 수도 있다. 어차피 믿음을 지탱해 줄 힘이 필요한 것일 뿐. 열망을 송신하고 믿음으로 버티면서, 시간을 견디고 있다.

참, 오랜 만에 노래 가사에 위로 받고 있다. (키드님, 고마워요!)

#노래 들으러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