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학부조교를 할 분들과 명목상의 회식(이라고 하기 보다는 한 학기 잘 부탁한다는 자리)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감정선이 툭, 끊기면서 떨어졌다. 시작이다.
영화를 읽으러 갈 예정이었다. 스폰지하우스에서 하는 [바벨]을 읽으러 갈까 했는데, 몸이 자꾸 가라앉았다. 저녁을 먹고 영화관으로 가려는 길에, 그냥 돌아섰다. 명목은 다음 주 월요일에 있는 세미나의 발제 준비를 해야지, 하며.
가방과 파일을 다 챙겨 나왔지만 다시 연구실(?, 사무실?)로 돌아와선 한 동안 멍하니 웹서핑만 했다. 무언가에 집중이 될 몸이 아니었다. 아니다. 그럴 때의 몸은 집중을 하면 너무 잘 되거나, 자꾸만 집중이 끊기면서 다른 일을 하려거나. 그러니 그럴 때 글(책이라고 적었다가 글이라고 고쳤다)을 읽으면, 글의 여백에 엄청난 양의 메모를 쏟아 내거나 글 진도는 안 나가고 다이어리에 엄청난 양의 메모를 쏟아 내거나.
다음 주 월요일에 있을 세미나의 발제는 정말 얼결에 맡았다.(변혜정쌤과 하는 몸세미나,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2장 발제) 발제를 맡기 전만해도, 이번 주의 계획은 다른 글을 신나게 읽거나 영화관을 전전하는 거였다. 얼결에 발제를 맡았고 그리하여 발제할 글을 읽어야 했다. 그 글을 읽기 위해선 6편의 다른 글을 더 읽어야 했기 때문에 내키지 않는 발제였다. 사실 이번 발제를 하기 전에 이미 두 번 혹은 세 번은 읽은 글이었고(그랬기에 이 글과 더 재밌게 놀기 위해선 최소한 6편의 글을 더 읽어야 함을 안 것이다), 그러며 부가적으로 필히 읽어야 하는 글 중 4편은 이미 읽은 상황이었고, 2편만 더 읽으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언제나 그렇듯 앓는 소리를 내며 혼자서 징징거렸다. 꾸에~
하지만 이 글을 읽는 것이 싫으냐면 전혀 그렇지 않다. 발제를 맡기 싫어하는 건 글을 읽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발제문을 써야 한다는 그 부담감, 잘해야 한다는 욕심, 그리고 종종 루인의 발제문은 토론시간에 더 많은 논의를 생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싫어서다. 이번 발제가 좋았던 건, 이런 발제를 빌미로 미쳐 읽지 않은 두 편의 글을 마저 읽을 수 있었고, 발제를 빌미로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다시 읽으며 이전에는 지나쳤던 부분을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이 글과 부가적인 6편 외에도 관련해서 세 편 정도의 글을 더 정리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발제할 글을 반 밖에 못 읽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이건 루인의 성격이 괴팍해서(지금은 꼭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발제를 맡으면 예전에 읽었건 말건, 이미 상당한 메모와 예전에 쓴 발제문이 있건 말건 새로 읽고 새로 발제문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기인한다. 사실 이건 너무도 당연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한 달 전에 쓴 발제문 혹은 글에서 나타나는 루인의 몸과 지금 쓰는 글에서 나타나는 루인의 몸은 너무도 다른데 어떻게 예전에 쓴 글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겠어.
그러면서도 툭, 떨어진 감정은 들쭉날쭉 움직이고 그래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태다. (조금 전 읽은 키드님의 글과 관련해서 성격이 돌변했던 시절과 관련한 글을 써도 재밌겠다. 흐흐.) 웃기게도, 아주 드문 상황인데, 다이어리와 글의 여백 모두가 메모가 쏟아지고 있는가 하면, 갑자기 아무 것도 안 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도 요 며칠 조금 혹은 아주 많이 기쁜 일이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런 기쁨은 동시에 슬픔을, 쓸쓸함을 동반한다. 기쁘고 불안하다. 기뻐서 좌절(너무 심각하지는 않은 의미로)하고, 그러면서도 좋아하고 괜히 웃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기쁘다가 불안하고 기쁘다가 슬픈 것이 아니라 기쁜 동시에 불안하고 슬프고 좌절한다. 기쁘기 때문에 슬프고 불안하고 좌절한다. 이 기쁨이 곧 없어질 거라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기쁨의 이유가, 설렐 정도로 기쁜 이유가 동시에 불안과 슬픔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에 잘 어울린다. 쓸, 이란 단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