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욕심: 제본과 출판본

어제, 오늘, 이틀 사이에 책을 12권이나 주문했다. Yes24와 교보문고에서 외국도서 주문이 되고, 마침 찾는 책들이 있어서, 별 망설임 없이. 마치 책을 고르고 결제하는 데 신들리기라도 한 듯;;; 어제 저녁엔 4단짜리 책장을 하나 새로 샀다. 책상 앞엔 압도할 것만 같은 높이로 책이 쌓여 있다. 필요 이상의 욕심들.

한때 이런 욕심으로 제본을 한 적이 있다. 다 읽지도 못하면서 언젠간 볼 거라는 막연한 욕심 하나로 책을 제본했다. 학교 도서관을 통해 주문하고 책이 도착하면 제본하고, 도서관에 있으면 또 빌려서 제본하고. 나중에 다 필요할 테니 미리미리 제본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 합리화했다. 하지만 그렇게 제본한 책들을 다 읽으려면 몇 년이 걸리는 분량이다. 영어를 잘 못하는 루인은 25~30페이지 분량의 논문 한 편 읽는데 하루가 걸린다. 물론 조금씩 속도가 빨라지고 있긴 하지만(지금 이것도 속도가 많이 빨라진 편이다) 문체가 익숙하지 않거나, 문맥을 파악하지 못하고 헷갈릴 경우엔 시간이 더 걸리기도 한다. 그런데도 책을 제본했다. 제본한 책이 손에 들어오면 괜히 뿌듯했다. 그렇게 쌓여갈 즈음 불안했고 바보 같다고 느꼈다. 다 읽지도 못 할 거면서.

물론 이 책들은 석사만 끝나면 더 이상 안 볼 책들이 아니다. 그리고 석사논문에만 사용하려고 제본하는 것도 아니다. 평생 공부할 거라면 당장 안 읽어도 상관없지만, 이렇게 쌓여가는 책들을 보며, 또 다시 겉멋 들기 바쁘다는 걸 느꼈다.

그런데 또 책을 왕창 주문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제본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불법이라서? 아마 그럴 지도 모른다. 그저 읽는 것으로도 좋았고 그래서 책 속의 사진들이 조금 흐릿해도(그래도 루인이 제본을 맡기는 곳에선 상당히 선명하게 잘 해준다) 괜찮았다. 그저 읽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미안함이 들기 시작했다. 제본 하는 것을 너무 당연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카피라이트(copyright)니 카피레프트(copyleft)니 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불법이다 합법이다, 란 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감정들.

물론 제본한 가격과 출판본을 살 때의 가격이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도 이런 변화에 한몫했다. 그렇다고 제본을 아주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신용카드가 없으니 아마존에서 직접 살 수 없고 학교도서관을 통해서만 주문할 수밖에 없는 책이 아니라면, 국내사이트를 통해 주문할 수 있는 책이라면, 출판본을 사야겠다는 몸으로 바뀌고 있다. 그러면서 또 무리한 욕심을 내고 있다.

이렇게 주문한 책 중엔 이미 제본을 한 책도 있고, 그러니 이미 메모들로 가득한 책들을 두고서 출판본을 새로 주문하고 있다. (이 기분은 오래 전에 테이프로 구매한 앨범을 CD로 새로 사야 하느냐 그냥 버틸 것이냐와 비슷한 기분이기도 하다. 그다지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아, 그러고 보면 책에 낙서를 절대 하지 않던 습관을 버리면서 이것이 가능한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책에 낙서는커녕 조그만 구겨짐도 못 참았다. 그래서 5번을 읽은 책을 누군가는 새 책이냐고, 한 번도 안 읽었느냐고 묻기도 했다. 제본은 이런 점에서 편했다. 뭔가 편하게 낙서를 할 수 있다는, 글을 마구마구 적어도 괜찮다는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출판본에도 메모를 잘 남기는 편이다. 아직도 많이 망설이고 매번 깜짝깜짝 놀라긴 하지만.

아, 뭔가 이야기가 이상하게 흐른다;;; 그리고… 하고 싶은 얘기를 까먹었다;;;;;;;;;;;;
뭐, 새삼스러운 일이라고… 캬캬캬 ;;;;

인연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피천득 [인연] 중에서

–교보홈페이지에서 읽은 글..

책을 고를 일이 있어 교보홈페이지에 갔다가, 상태표시줄(?)에 위와 같은 문장이 있는 걸 알았다. 단박에 외웠다. 물론 한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옮겨 적어야지 했을 때, 단박에 저 긴 문장을 외웠다.

부모님께 커밍아웃 하기 어려움..

관련 글: 노란 손 + 세월 속에 변하는 부모’님’

부산에 가서 부모님과 (혹은 친척들과) 얘기를 나누며 종종 답답함을 느꼈다. 부모님이나 이성애혈연(부계건 모계건 상관없이)을 매개하는 친척들은 루인이 학교에서 공부만 하는 아이로 알고 있었다. 그 사실에서부터 답답함이 발생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앎은 사실이기도 했다. 부모님들이 원하는 모습 혹은 알고 있는 모습 속에서 루인은 하루 종일 학교에만 있는 “범생이 원단”일 뿐이었다. 그러니 세상 물정은 잘 모르고(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_-;;) 아직은 철없는 학생.

그리고 부모님이 모르는 모습과 생활 속에서 루인은 실태조사기획단에서 일하기도 했고(“했고”라는 과거시제를 쓰고, 아직 활동이 끝난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흑흑)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라는 트랜스젠더/성전환자 단체를 발족하고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루인이 스스로를 활동가로 부를 수 있느냐는 언제나 의심스럽고 부족함에 부끄럽지만. 어쨌거나 여성학/페미니즘 분야에선 나름 유명한 [여/성이론]이란 잡지의 2006년 겨울호에 글을 싣기도 했고(물론 그 글은 너무도 부끄러워서 이렇게 말하기가 민망하지만 ㅠ_ㅠ) 모 주간지나 어떤 매체들에 미약하나마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얘기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저 공부만 하는 아이”라는 한 친척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속상하고 답답했다. 루인이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속상하기도 했다. 그 내용이나 수준과는 상관없이 “유명한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고 적당히 허풍 섞인 말을 한다면 부모님은 한껏 좋아할 거란 걸 너무도 잘 알지만, 할 수가 없었다. 보여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 거라 믿지만, 행여나 보여 달라고 했을 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루인이 쓰는 거의 모든 글은 루인의 경험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지점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루인의 글을 읽는 순간이 곧 커밍아웃 하는 순간이다. 루인이라는 이름 자체를 밝히기가 꺼려지기도 했고.

그동안 워낙 제멋대로에 속만 썩인 아해라서,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한다는 건 가장 큰 “불효”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그 완고함이 의외의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한편으론 그걸 믿기에 루인이 트랜스라고 말하면, 그 말을 듣는 당장은 화를 내거나 울거나 충격에 쓰러지거나 하시겠지만(엄마님의 현재 건강 상태를 봤을 때, 한 번 쓰러진다는 건 다시는 못 일어 날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럼에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루인이 트랜스인 걸 모르는 척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도 있고, 루인 스스로 트랜스’임’을 부정하고 그냥 살겠다고 말하길 바라는 몸으로 루인이 트랜스’임’을 받아들이며 관계를 맺어 갈 수도 있으리라. 그럼에도 망설이고 그냥, 부모님만은 루인의 정체성들을 영원히 모르길 바라는 몸.
(석사학위 논문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두 가지 판본으로 찍을 계획도 세우고 있다. 실제 제출하고 취득할 제목과 목차의 판본과, 가족들에게 보여줄 제목과 목차를 지닌 판본으로. 그렇다면 아마 서론도 조금은 바뀌겠지. 왜냐면 원래 판본에선 서론에서부터 루인의 정체성들을 얘기하는 것으로 시작할 테니까.)

설이라는 행사를 빌미로 만난 가족 중 조카 한 명은, (어떤 명확한 정체성 범주 구분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나중에 게이로 커밍아웃할 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편으론 기쁘지만 한 편으론 걱정이었다. 스스로에게 커밍아웃을 하기까지 겪을 일들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여담인데, 왠지 루인의 사촌들 중엔, 나중에 LGBTQ 모임이라도 있다면 그런 모임에서 만날 거라는 느낌이 드는 사촌도 있다. 서로가 당황하려나? 흐흐. 엄청 재밌어하고 좋아하겠지. 후후.)

이런 감정들-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하기 어려움, 친척 중엔 커밍아웃을 ‘해야만 하는’ 정체성인 사람이 없길 바라는 몸이 루인의 정체성을 부정하고픈 걸 의미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루인의 다양한 정체성들이 특별히 자랑스러운 것도 아닌 만큼이나 특별히 부정하고픈 것도 아니다. “게이 자부심[gay pride]”과 같은 말이 혐오와 공포가 만연한 사회적인 맥락에서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 말은 자칫 동성애자를 특별한 존재로,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와는 완전히 유리된 존재로 만들 위험성 때문에 별로 안 좋아하는 표현이다(“트랜스젠더는 신을 매개하는 존재”, “트랜스젠더는 젠더와 무관한 존재”, “젠더를 횡단하는 존재”란 식으로 표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특별히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없는 만큼 부끄럽거나 부정할 이유는 없지만, 루인의 친척관계 속에서 커밍아웃을 해야만 하는 이가 없기를 바라는 몸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이런 앞선 걱정은, 상대를 루인의 수준으로 환원해서 판단하는 것이기에 위험하단 건 ‘안다.’ 커밍아웃하지 않으며, 자신의 원하는 방식으로 여겨지는 트랜스(이럴 때 그 사람을 “트랜스”라고 부를 수 있을까?)가 다른 트랜스, 트랜스젠더를 향해 더 심한 혐오 발화를 하는 이유엔 이런 ‘앞선 걱정’이 있기 때문임도 ‘안다.’ 이런 고민들 속에서 어떤 답답함을 느꼈다. 이런 답답함은 속상함일 수도 있고, 한편으론 아직도 커밍아웃을 하기에 앞서 걱정과 두려움이 다른 한편으론 커밍아웃을 하고 싶은 바람이 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언젠가 커밍아웃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꼭 커밍아웃을 해야 할까? 커밍아웃을 하지 않고, 루인의 정체성들을 부정하거나 숨기지도 않으면서 루인의 활동을 말하는 방법은 없을까? 남의 일이지만 관심이 있어서 하고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고민을 하며, 예전에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나눈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인터뷰에 대답한 사람이, 자신의 딸은 자신처럼 살지 않았으면 한다는 얘기를 했다고 했다. 조금은 기대를 했기에 어떻게 논문을 썼을지 궁금하고 읽고 싶(었)다. 기회가 생길지는 알 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