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퀸: 파병하는 ‘진보’와 “아들”이라는 성역할

[더 퀸] 2007.02.20. 20:20, 아트레온 9관 11층 G-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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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할인이 대학생까지를 의미한다면 더 이상 학생할인을 하지 않았다. 뭔가 찔렸다. 판매하는 분은 학생증 있으면 달라고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지난 일 년 동안 대학생증을 내밀고 할인을 받았는데, 더 이상은 그럴 수가 없었다. 흑흑흑. 천원~~!!! ㅠ_ㅠ

스포일러가 없는 리뷰가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무엇을 스포일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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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다이애나란 사람의 사건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영화가 시작하는 초반, 이 사건과 관련한 정보를 기억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 영화의 토대를 이루는 사건, 혹은 다이애나의 죽음과 관련한 얘기들 중에 루인이 아는 것은 없었다. 1997년이면 루인은 십대였고, 배철수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엘튼 존의 노래가 몇 주간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정도만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 어떤 정보를 떠올리려고 해도, 떠올릴 내용이 없었다. 그러다, 왜 굳이 이 영화의 내용을 실제 있었던 사건과 결부시키려고 하는지 되물었다. 이 영화를 말 그대로 하나의 허구로 간주하면 안 되나. 영국과 프랑스란 나라, 영국의 여왕과 군주제의 존재, 다이애나의 죽음 등을 모두 영화에서 창조한 영화적 허구로 간주하고 본다면 더 재밌을 것 같았다. (일테면 “궁”이라는 드라마처럼.) 이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사건으로.

그리고 깨달았다. 이 영화를 어떤 맥락과 분리시켜서 영화적인 허구로만 접근하는 순간,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꽤나 불친절하거나 엉성하다는 걸. 영화 속에서, 다이애나의 죽음에 전 세계가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루인은 그 죽음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 이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상당한 간극을 가지고 출발하는데, 이 영화를 읽는 사람은 이 영화의 토대를 이루는 사건을 알 거라고, 영국왕실의 맥락들을 알 거라고 가정하고 그런 가정 아래 사건을 전개하지만, 이런 맥락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하나의 허구일 뿐이고(이럴 때, 영국왕실과 군주제 뿐 아니라 영국이라는 나라 자체도 허구가 된다) 그럴 때 이 영화는 꽤나 재미없게 다가온다.

그래서 이런 전제에 슬쩍 화가 났다. (물론 이런 “화가 남”은 루인에게도 향해야 하는데,) 마치 자신들이 하는 말의 맥락을 당연히 알 거라는 전제가 가지는 오만함 때문이다. 그 오만함은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가 가지는 오만함이고.

02
이 영화의 맥락을 영화적 허구로만 가정하지 않고 루인의 접하고 있는 현실에 토대를 두고 읽는다면, 토니 블레어가 “진보” 정당이라는 사실에 당황했다. 루인이 알고 있는 토니 블레어는 미국의 이라크침략전쟁에 파병한, 파병을 주장한 사람, “부시의 친구” 혹은 조지 마이클이 “부시의 개”[이런 묘사는 반드시 블레어라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개에 대한 모독이다]로 묘사한 뮤직 비디오 속의 모습과 같은 것들이다.

처음으로 총리로 당선될 당시엔 “진보”였을 지 몰라도, 루인이 접하기 시작한 지금의 모습에선, 잘 모르겠다. 저항으로서의 전쟁이 아니라 침략으로서의 전쟁에 참여하는 걸 “진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런 선입견으로 이 영화를 접할 때, 두드러지게 다가오는 모습은 인기를 위해 어떻게 연설문을 기획하고 언론을 이용하는가 하는 장면들이다. 그리고 “진보정당”의 당수이자 “가장 진보적인 인물”이라고 평가 받는 블레어가 집에선 음식준비를 하지 않고 부인이 음식을 차려주길 기다리는 모습이다. 무엇이 “진보”인가, 라는 진부하지만 언제나 유효한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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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재미는 전혀 다른 곳에서 발생한다. 여왕 역을 맡은 헬렌 미렌의 연기는 그것만으로도 볼만 한데, 헬렌 미렌의 연기가 이 영화를 끝까지 읽을 수 있게 한 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연기력에 덧붙여, 이 영화의 재미는 여왕과 총리의 관계에 있다.

영화 중간 즈음에 가면, 블레어의 부인은 블레어에게 블레어의 죽은 엄마와 관련한 얘기를 한다. 여왕과 동년배이고 성격도 비슷하다고. 그래서 여왕을 감싸도 도느냐고.

여왕과 총리인 둘의 관계는 어느 순간 더 이상 여왕과 총리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블레어 부인의 말처럼, 하지만 블레어 부인의 말과는 달리 토니 블레어는 여왕을 엄마처럼 여겨서 지지하거나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여왕과 엄마를 동일시 한 것이다. 여왕과 총리 사이의 긴장관계 혹은 적대관계는 어느 순간 총리가 여왕을 지키려는 관계로 바뀌는데, 이 장면에서 블레어의 역할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성역할을 떠오르게 한다. 싸움터에 나가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네 엄마와 누나/동생을 지키거라”는 말을 할 때,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는 서구의 아들역할. 블레어의 역할은 어느 순간 이렇게 바뀌고, 여왕을 부르는 호칭 맘(Mom)은 어느 순간 엄마를 부르는 호칭 맘(mom)의 뉘앙스로 바뀐다. 영화 말미에 여왕을 알현하는 장면에서 블레어의 모습은 엄마에게 칭찬 받고 싶어서 설레어 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여왕과 총리의 관계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로 바뀐다. 어떤 경우에도 군주제를 폐지할 수는 없다는 블레어의 말이, 군주제 자체가 아니라 엄마-여왕(Mom)을 (또 한 번) 잃고 싶지 않다는 바람으로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왜 이 지점에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는 단어를 떠올렸을까?

노란 손 + 세월 속에 변하는 부모’님’

어제 낮, 지도교수를 만났다가, 피부가 하얗다고, 예전에 노랗던 피부가 좋아졌다는 말을 했다. 부산에 갔다 와서 그런가 보다고 답했다. 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부산에서 루인의 생활은, 자고, 밥 먹고, 놀고, 밥 먹고, 놀고의 반복이었으니까. 정말 영화와 잠깐 잠깐의 장보러 간 것 외에는 종일 집에서 뒹굴었는데 피부가 안 좋아 질 수가 있으랴…. 케케.

부산에서, 장보러 갔다가 은행에 들려 잠시 머물던 사이 엄마님(요즘 ○○님이란 식의 표현을 통해 고정되지 않은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은 루인의 손을 보더니, 노랗다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엄마님이 몇 해 전에 그랬다며 걱정해서 무슨 이유에서냐고 물으니, 손이 노라면 영양실조의 징후라고 했다. 예전 같으면 이런 말에, 무슨 소리냐고 말도 안 된다고 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채식을 하면 영양실조에 걸린다는 식의 말들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엄마님의 이런 말은 루인의 채식을 문제 삼는 발언으로 넘어 갈까봐 언제나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었다. (채식을 해서가 아니라 채식을 하건 채식을 안 하건 상관없이 음식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으면 누구나 영양실조에 걸린다. 그리고 채식이 건강에 더 좋다, 몸에 더 좋다는 말은 채식을 하면 영양이 부족하다, 영양실조에 걸리기 쉽다란 말과 별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번엔 그저 수긍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영양실조라는 것이,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상태, 그리하여 몸에 영양분이라곤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영양분이 하나만 부족해도 의학에선 영양실조로 판정한다는 얘길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일테면 다른 영양분은 다 충분한데 철분이나 캴슘과 같은 특정 영양소 하나가 부족해도 영양실조로 판정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이유로 부산에 간 것이기도 하다. 몸의 위태로움이, 다른 이유들과 겹치면서, 부산에 가야겠다고, 다짐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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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두 번 이성애혈연가족의 부모를 만나며 느끼는 건, 세월 속에서 변하는 모습이었다. 그토록 완강하기만 그분들의 달라진 모습을 보기 시작했다. 루인과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ps는 무슨 말 속에 “네가 만약 결혼을 한다면”이라는 전제를 붙이기 시작했고, 아빠님은 “언젠간 결혼 할 것 아니냐”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정년퇴임 이전에 결혼하라고 다그치기만 했는데, 이젠 루인이 결혼을 안 할 수도 있다는 걸 조금씩은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물론 여전히 루인이 결혼하길 바라지만 그럼에도 결혼을 안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이런 과정에서 여전히 “그래도 언젠간 결혼을 하겠지”라는 바람을 놓지 않고 싶어 하는 모습. 조금은 슬펐다.

그리고 이런 부모’님’과의 관계 속에서 더 이상 신경질만 내지 않는 루인을 깨달았다. 예전 같으면 결혼 이야기만 나와도 신경질과 짜증이었는데, 지금에 와선, 헤헤거리며 씽긋이 웃기만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말들에 더 이상 짜증으로만 대처하지 않는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죄송한 몸이기도 했다. “평범”하게 사는 것만큼 힘든 것도 없지만 “평범”함을 바라는 부모’님’의 바람 속에서 루인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고, 그럴 수도 없다는 걸 깨달으며 죄송했다. 어쩌면 영원히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것이 루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효도”인지도 모르겠다는 몸앓이를 했다. (하지만 커밍아웃을 하지 않음이 마냥 좋은 건지는 모르겠다.)

玄牝에서..: 지난 일정, 논문

무수한 상념들이 몸을 타고 놀았다. 그러며, “그래, 이건 [Run To 루인]에 쓰면 좋겠어”라고 중얼거렸지만, 그곳엔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가 없었다. 인터넷과는 너무도 거리가 있는 일주일. 그렇게 많은 언어들이, 하고 싶은 말들이 몸속에 가라앉았다.

5통의 전화가 왔다. 한 통은 행정조교 업무와 관련한 내용이고, 한 통은 같은 과 사람의 (루인이 조교라는 위치와 관련한) 전화였다. 한 통은 집주인이 인터파크에서 표가 왔다며 언제 오느냐는 내용이었고 한 통은 택배회사에서 집에 있느냐는 전화였다(그 사람은 새로 바뀐 사람인 듯 했다). 그리고 한 통은 소중한 친구의 전화였다.

10통의 문자가 왔다. 활동과 관련한 문자가 있었고 새해 인사를 담은 문자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뮤즈티켓이 도착할 거라고, 루인보다 더 걱정해주신 ㄷㄴㅈㅅ님 문자엔 다시 한 번 고마움을!

gmail엔 활동 관련 메일이 한 통 있고, 파란메일엔 HRnet으로 온 메일과 필요해서 받고 있는 정보메일이 쌓여있다. 그러니 당장 답장을 해야만 하는 메일은 없다.

일주일 동안 달라진 건 별로 없다. 메일은 언제나와 마찬가지였고, 전화도 문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메일을 통해 아주 급한 내용이 있었다고 해도 상관없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없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건 아니지만 핸드폰이 없을 때에도 인터넷이 없을 때에도 잘 살았는걸. 그땐 그때 상황에 맞게 살았고, 지금은 핸드폰과 인터넷이 있는 상황에 적응한 몸으로 살고 있을 뿐이고, 지난 일주일은 단지 인터넷이 없는 상황에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루인의 몸은 언제나 [Run To 루인]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저런 글을 쓰고 싶다고, 메모지에 적기도 했고, 다이어리엔 좀 더 많은 일기를 썼다.

편지도 많이 썼다. 보내지도 않을 보낼 수도 없는 편지들. 몸에 쓰고 몸에서 지우고 만 편지들. 그렇게 지워버린 언어들은 결국 언젠가 몸에 합체해선 우울증이 되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오랜만에 문자로 나타나지 않는 편지들을 썼다. 이대로 어느 날 죽는다면, 누구도 그 존재를 알 수 없을 편지들. 편지를 쓴 사람조차 다음 날이면 잊어버릴 편지들.

Eels의 [Electro-Shock Blues]를 많이도 들었다. 자주 듣는 앨범은 특별히 좋아하는 곡이 있는 경우이다. 앨범 자체가 좋아도 특별히 좋아하는 곡이 없다면 자주 안 듣게 되는데, 부산에서 “Climbing To The Moon”이란 곡에 반했다. 그래서 그 전까지는 자주 안 듣는 이 앨범이 자주 듣는 앨범 목록에 올랐다. 아울러 “Dead Of Winter”도 반한 곡. 이승환의 [Hwantastic]도 자주 들었다. 특히 좋아한 곡은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와 “울다”. 하지만 어떤 앨범에서 타이틀곡을 유난히 좋아하는 경우가 잘 없다는 점에서, 이번 앨범에 좋은 평가를 하기 힘들다. (이것이 루인이 앨범을 판단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논문은 9편을 읽었다. 월요일부터 월요일까지 8일 중, 내려가는 날, 어제, 오늘 빼면 5일이니, 적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정작 부산에서 꼭 읽겠다고 한 글은 읽지 않았다. 그래도 설마 이 정도까지 읽을 수 있을까 하며 챙겨간 논문들인데, 아주 놀지는 않은 모양이다. 부산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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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경, “어떻게 우리는 여자, 혹은 남자인가?”, [한국여성학] 제18권 2호(2000)
Patricia Elliot and Katrina Roen, “Transgenderism and the Question of Embodiment”, GLQ 4:2 (1998)
Henry S. Rubin, “Phenomenology as Method in Trans Studies”, GLQ 4:2 (1998)
Joshua Gamson, “Must Identity Movement Self-destruct? A Queer Dilemma”, Social Problems vol.42 no.3 (Aug. 1995)
Daniel Nourry & Nikki Sullivan, “BODILY (Trans)Formations”, Scan vol 1 number 3 november 2004
Nikki Sullivan, “‘It’s as plain as the nose on his face’: Michael Jackson, modificatory practices, and the question of ethics”, Scan vol 1 number 3 november 2004
Nikki Sullivan, “Integrity, Mayhem, and the Question of Self-demand Amputation”, Continuum: Journal of Media & Cultural Studies Sep2005, Vol. 19 Issue 3 (2005)
Nikki Sullivan, “Somatechnics, or, The Social Inscription of Bodies and Selves”, Australian Feminist Studies Nov 2005, Vol. 20 Issue 48 (2005)
Nicole Anderson and Nikki Sullivan, “Technological Interventions”, Scan vol 3 number 3 decembe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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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려고 간 부산이지만, 그래서 더 읽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읽고, 최근의 관심사를 정리하다가 당혹스러운 점을 발견했다. 위에 적은 글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트랜스 혹은 트랜스젠더 뿐 아니라 최근의 관심사를 잘 엮어서 논문을 쓴다면, 참고문헌의 최소한 절반은 1997년 이후에 나온 것으로 채워질 거란 것이었다. 이 정도는 다행이고 아무리 못해도 1/3 이상은 2000년 이후에 나온 글들이다. (이건 일종의 ‘컴플렉스’이다.)

물론 “트랜스젠더”가 2006년 한국의 최고 인기검색어 중 하나이자 히트상품이긴 하지만,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논의가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식으로 논문을 쓴다면, 꽤나 위험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탁월하게 잘 쓰지 않는 이상, 잘 써봐야 “새롭다”는 얘길 들을 테고, 조금만 엉성해도 “최신 유행 따라 하느냐”는 비판에 직면하기 쉽다는 걸. 이런 짐작을 한 건, 솔직하게, 루인이 아주 빈약한 토대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자격지심에서 발생한 짐작이기도 하다. 철학사 한 권 제대로 읽지 않고서, 그렇다고 수학사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글을 쓴다면, 다른 누군가 지적하기도 전에 엉성함의 무게에 스스로 짓눌릴 게 뻔하다. 다행히 루인의 지도교수 역시 이런 점에서 정확하기에 루인의 취약함 혹은 엉성함을 언제나 정확하게 지적해주고 있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덜 엉성한 글을 쓰려고 안달이지만, 걱정이다.

요즘의 걱정 중 하나는 이것이었다. 엉성하지 않게, 탄탄한 토대에서 글쓰기. 고민 중에 있는 글쓰기. 겉멋 들지 않은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