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글 만나기

관련 글: Nikki Sullivan – Queer Material(ities): Lyotard, Language and the Libidinal Body

멋진, 그래서 몸을 움직이게 하는 글을 읽는다는 건 무덤을 파는 일이다. 멋진 글은 언제나 몸의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잠도 잊게 하지만, 그 글을 다 읽고 나면, 저자의 다른 글을 찾고 저자가 참고한 글이나 책을 찾기 마련. 그러다보면 어느 새, 읽고 싶어서 읽어야만 하는 글이나 책이 10편/권은 더 늘어나 있다. 이렇게 찾을 때는 마냥 좋고 행복하지만, 시간의 압박, 제한된 시간을 깨닫는 순간, 비명은 행복이 아니라 ‘또 무덤을 팠다’는 자책으로 의미를 바꾼다.

루인은 남들 보다 많이 느리다. 남들 한 시간이면 읽는다는 책을 두세 시간은 걸리고, 서너 시간이면 읽는다는 글은 종종 하루 종일 읽고 있다. 그래서 남들과 같은 시간을 투자하면 언제나 남들보다 뒤쳐진다. 남들보다 두세 배 더 해야 간신히 같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고, 경쟁심이 발동하면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만 한다.

천재를 질투하던 시기엔 이런 루인이 싫었다. 천재가 부럽고 루인도 천재이고 싶었다. 하지만, 천재라는 것이 정말 있다면, 천재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자신을 싫어했고, 열등감도 심하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강하지만(이 글 참고)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이것이 더욱더 분발하게 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영원히 인정받지 못 할 수도 있다. 일테면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한, 루인이 무슨 글을 쓰건, 무슨 활동을 하건, 부모님께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학생일 때는 학점만이 유일한 지표가 되는데, 루인은 학점도 별로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루인은 재능도 없으면서 그저 비싼 등록금만 지불하고 있는 무능한 인간일 때가 많다. 뭐, 이 말이 아주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런 말을 직접 듣고 유쾌할 수는 없다 -_-;;)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 자리에서 오래 머무는 건 잘 한다. 남들보다 오래 걸리는 만큼 오래 머물 수는 있다. 남들보다 두세 배는 오래 걸리는 만큼, 그 정도 시간을 한 곳에 머무는 것은 별로 힘들지 않다. 그렇게 간신히 따라간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어제, 멋진 글 한 편을 읽으면서 신나고 좋았다. 그러면서 또 무덤을 파고 있는 루인을 깨달았다. 저자의 다른 글은 이미 읽겠다고 찾아둔 상태였지만, 저자가 참고한 다른 글들을 찾아서 읽고 싶은 욕심이 몸을 타고 돌기 시작했다. 책을 사거나 제본을 하거나, 그러겠지. 그런데 읽을 시간이 없다(평생이라는 시간 개념이 아니라 논문을 쓸 때까지는 시간 개념으로). 루인이 책을 빨리 읽거나 영어를 잘 한다면 읽고 싶은 거 다 읽을 수 있겠지만, 책 읽는 시간도 늦고 영어도 잘 못한다. 그저 남들보다 시간을 더 들일 뿐. 그 뿐이다. 그래도 이런 건 잘 하니까 아직은 멋진 글을 만나는 것도 즐겁다. 평생 만나고 싶기도 하고.

Nikki Sullivan – Queer Material(ities): Lyotard, Language and the Libidinal Body

Title: Queer Material(ities): Lyotard, Language and the Libidinal Body. 여기 (pdf파일임)
Authors: Sullivan, Nikki
Source: Australian Feminist Studies; Mar2002, Vol. 17 Issue 37, p43-54, 12p

오랜 만에 이 카테고리에 글을 쓰면서 왠지 만행을 저지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이 아니겠지요;;;

저자인 설리반(셜리반? 슐리반? 슐리번? 셜리번? 설리번? ;;;)은 이 글을 통해, 현재로선 별로 새롭지 않은-혹은 너무도 진부한, 이분법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어요. 이 글에서 저자가 주로 논하고 있는 사람은 세 명, Jean-Francois Lyotard와 Teresa L. Ebert, Donald Morton인데요, Ebert와 Morton은 역사 유물론주의/마르크시즘과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을 비교하고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이 초월적이고 “현실”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이론이라고 비난하죠. 셜리반은 이런 저자의 논점을 비판하면서 료따르(Lyotard, 료타르? 리오타르? 리오따르? ;;)의 논의를 빌려 이렇게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 언제나 이런 이분법의 논의 구조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 구조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붕괴시킬 균열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등을 얘기하고 이렇게 겹치면서도 균열을 일으키는 것을 퀴어물질(성)이라고 불러요. (대충 그렇다는 거지 정확한 설명은 아니에요;;;)

루인이 초점을 맞춘 지점은 몸을 설명하는 부분인데, 단일하고 통합적인 몸이라는 가정은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맥락 안에서 발생하는 의미이며, 몸/육체라는 건 여러 요소들을 땜질 하듯이 덕지덕지 붙여 놓은 거라는 구절이죠.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좋아서 많은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기로 했어요.

셜리번의 자료를 찾으면서, 처음엔 이 글은 안 읽고 이후에 쓴 글들만 읽으려고 했는데, 읽길 잘 한 것 같아요. 이후 셜리반이 논하는 주요 아이디어들의 징후를 찾을 수 있거든요. 그 아이디어는 단어 하나로 적을 수는 있지만 루인도 잘 모르는 단어를 쓴다는 것이 께름칙해서… 뭐, 그렇다고 유물론이니 마르크시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페미니즘을 아느냐면 그런 것도 아니지만요;;;

아아, 이런 글을 올릴 때마다 공부 못 하는 애들이 꼭 가방은 제일 무겁다고(루인이 정말 그랬어요-_-;;) 꼭 평소에 공부도 안 하고 무식한데 어쩌다가 글 한 편 읽고는 제일 열심히 하는 것처럼 동네방네 떠들고 자랑하는 것만 같아 부끄러워요.. 흑흑.

“흑인 1호냐, 여성 1호냐” 라니요! : 트랜스는 트랜스이기만 한 건 아니다

관련 글: “‘미 대선전 정치혁명 예고’ 흑인 1호냐, 여성 1호냐

[#M_ 캡쳐확인.. | 오랜 만에 이미지 파일? 크크.. |
_M#]

기자는 미국의 민주당 대선 후보가 “흑인” 대 “여성”으로 보일 지 모르겠지만, 루인에겐 그나마 “흑인남성”과 “백인여성”으로 쓰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몸앓는다.

“흑인 대 여성”이라는 구절은 “모든 흑인은 곧 남성”이며 “모든 여성은 곧 백인여성”임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흑인”은 “흑인남성”이 대표하고 “여성”은 “백인여성”이 대표한다. 이럴 때, “흑인여성”은 어디에 위치하나? 이런 식의 표현 속에서 “흑인여성”은 언제나 부재하거나 둘 중 하나 만을 선택하도록 강요 받는다. “흑인여성”이지만 “흑인” 아니면 “여성”이라는 배타적이라서 공존할 수 없다고 요구하는 정체성에 속해야 한다.

이런 언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민족이 중요하냐 여성운동이 중요하냐”와 같은 말은 이제 ‘상식’이다. 얼마 전엔 “굶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트랜스젠더의 젠더 문제가 그렇게 시급하냐”라는 말을 전해 들은 적이 있다. 트랜스젠더는 오직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만 지니고 있을 뿐 이라서 비정규직 노동자이거나 학생이거나, 등등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동시에 이런 말 속에는 “트랜스젠더 중엔 굶어 죽는 사람이 없다”라거나 “굶어 죽는 사람 중엔 트랜스젠더가 없다”라는 교묘한 의미를 품고 있다.

이런 식의 언설들은 언제나 우리를 단 하나의, 단일한 정체성이기만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렇게 나눈 범주 속에 고착해 있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루인은 트랜스이기도 하지만 채식주의자이기도 하고 부산지역 출신의 서울거주자이기도 하다. (부산지역 출신의 서울 거주자라는 말은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세한 건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 레즈비언이기도 하고 이성애자이기도 하고 퀴어(queer)이기도 하고 변태이기도 하다. 🙂

“흑인 1호냐, 여성 1호냐”란 식의 표현은 언론이 만들어낸 선정주의라고만 치부하기엔 꽤나 무서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