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에 관하여

예전에 편집장에 대해 쓴 적이 있다(이글).

최근 편집장의 역할에 대해 다시 고민하고 있다. 편집장이란 자신의 의견을 기고자들에게 투여하고 그래서 자신의 의도와 취향에 맞춰서 편집하는 사람인 건지, 기고자들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면서 그 능력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사람인 건지. 물론 루인은 후자를 좋아한다. 기고자들의 목소리와 언어를 최대한 살리면서도 부족하다 싶은 부분은 더 끌어내고 그것을 적절하게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이 좋은 편집장이고 같이 일하고 싶은 편집장이라고.

편집장이 자신의 주장을 기고자들의 글에 투여하고 그래서 편집장의 언어로 기고자들의 문장이나 언어들을 바꾼다면 그 편집장과는 같이 작업을 하고 싶지 않고 심할 경우 편집장이 바뀌어도 그 매체엔 글을 싣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

예전에 그런 경험이 있었다. 루인의 글을, 루인이란 이름으로 나간 건 아니지만, 편집장의 주장에 맞춰 바꿔버린 경험. 그렇게 바뀐 내용이 루인의 몸에 드느냐면 전혀 아니었다. 심지어 루인이 주장하지도 않은 내용과 사용하지도 않는 언어들로 바뀌어 있었다.

편집과 관련한 고민을 다시 하고 있다. 물론 루인이 편집장을 할 리 없지만, 루인 역시 좋은 편집장일 리는 없다. 루인이 비판하는 언어들과 내용을 잘 못 참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팀블로그나 사전 검열 없는 기고 형식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영화] 그놈 목소리: 윤리의 부재

[그놈 목소리] 2007.02.09. 20:30, 아트레온 2관 3층 H-17

※스포일러는 곳곳에 있어요.
01
영화가 보고 싶을 땐 보러 가야하고(물론 이렇게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음에 대해선 언제나 고민이 필요하고!) 보고 싶은 영화가 있을 땐 보러 가야한다. 하지만 모든 바람의 결과가 만족스럽지는 않다. 어떤 선택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정말 멋지다면, 어떤 선택은 기대에 미치지 못 하는 거야 그렇다 해도 그 수준을 뛰어 넘어 사람을 화나게 하기도 한다.

이 영화가 그랬다. 오지선(김남주 분)이 아들 한상우의 살을 빼기 위해 다이어트를 시키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이 장면에서부터, 이 영화 읽는 내내 불편하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물론 루인은 그저 울기 위해 이 영화를 선택했다. 그렇기에 다른 모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울 수만 있다면, 그냥 넘어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시작 장면에서부터, 울 수도 없을 것이고 불편하기만 할 것이란 걸 예감했다.

무엇보다도 연기자들 연기 진짜 못 한다! 영화잡지에서 “설경구”, “설경구” 하며 호들갑스레 반응해서 연기를 엄청 잘 하는 줄 알았는데, 실망. 김남주 역시 마찬가지. 다른 조연들의 연기력에 그나마 수습이 되었지, 그 마저도 아니었다면, 으으으~ 설경구가 등장하는 영화는 이 영화가 처음이었는데, 뭐랄까, 등장인물과 연기자가 겉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물과 놀지 않고 인물을 설경구 방식으로 환원하려고 한다고 할까, 그 뭐랄까, 아무튼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느낌. 김남주는…(할 말 잃음;;)

02
이 영화를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윤리”였다. 특히 고통을 표현할 때의 윤리. “내가 힘들어서 소리 좀 치겠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 내가 힘들 때조차 주변 사람들을 신경 써야 하느냐”라는 말은 상당히 위험한데, 한경배(설경구 분)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이런 감정 표현 방식에 대해 별로 성찰하지 않는다.

이런 지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김형사(김영철 분)를 트렁크에 태운 상태에서 속도제한범퍼 위를 계속 왔다 갔다 하는 부분. 속도제한범퍼 위를 빠른 속도로 차가 왔다 갔다 하면 그 충격이 상당한데 트렁크 안에서 잠복근무하는 김형사는 속수무책으로 다칠 수밖에 없다. 이 장면은 상당히 끔찍하고 고통스러웠는데, 영화는 김형사의 고통보다는 아들이 납치되어 힘들어하는 한경배에 초점을 맞추고, 아들을 찾으려는 한경배의 한탄을 통해 이런 폭력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이런 정당화가 조금도 설득력이 없고, 오히려 구차하게 변명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내가 고통스러우니 네가 좀 참아라”는 식의 구차함. 더구나 이 때의 “너”는 “나”보다 권력적으로 우위에 있는 이가 아니다. 9시 뉴스 진행자이자 언론권력을 등에 업고 있는 한경배는 사실 상 경찰보다 더 많은 권력을 쥐고 있고, 경찰들은 한경배이기 때문에 쩔쩔매는 모습을 보여 준다. 한경배의 이러한 폭력은, 루인의 입장에서 유괴범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고, 세상의 부조리 운운하며 “여성”과 “노인”들만 죽인 유영철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한경배의 슬픔도 오지선의 슬픔도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물론 이런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03
이 영화는 분명 영화이고 그래서 영화관을 찾았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서며, 헷갈렸다. 영화를 본 건지, 유괴에 따른 가족의 고통을 보도하는 ‘시사프로그램’을 보고 나온 건지, 시청률을 높일 수 있을 법한 소재를 찾아선 그것을 포장하고 ‘이야기로 만들어’ 내는 미디어 혹은 작가들의 욕망을 확인하고 온 건지. 이야기 진행은 뻔한 공식 속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데 그렇다고 눈물이라도 흘리게 했느냐면 그 마저도 아니다.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부정(父情)”이 아니라 무미건조한 동영상.

연기자들의 감정은 넘쳐서(감정과잉) 다들 슬퍼하는데 감동(감정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없었다. 소재의 화재성은 있지만(소재선정성) 드라마는 없다. 태만하게 공식에 따라 내용을 나열하고 있는데 연기자들의 연기는 겉돌거나 어색하기만 하다. (일테면 [각설탕] 역시 진부한 공식에 따르고 있지만 감동과 드라마가 있었고 펑펑 울면서 나올 수 있었다. [미녀는 괴로워]의 김아중 연기는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지만 충분히 공감하고 이입할 수 있었다.)

이런 과잉은 마지막으로 유괴범과 전화하며 협상하려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아침을 먹으며 한경배는 유괴범과 전화를 한 후 아이를 찾으러 가려는데 오지선은 자신 때문이라며 주먹으로 가슴을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한 편으론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지만, 다른 한 편으론 정말 부담스러운 장면이었다. 가슴을 치며 슬퍼하는 장면, 자신을 자책하는 장면을 길게 보여 줌으로써, 그렇잖아도 “부모들이 얼마나 고통 받고 슬퍼하는지 알겠냐”고 웅변하는 것에 지쳐버린 루인의 몸은 슬슬 짜증으로 변할 지경이었다. 문제는 이런 감정의 과잉이 이와 유사한 경험을 지닌 이들에겐 너무도 부족하게만 느껴지겠다는 것. 과잉만 있고 감정과 감동은 없거나 부족한 셈이다.

이 “영화”의 당혹스러움은 죽은 아이의 시신을 다루는 방식. 영화관에서 아이의 시신을 발견하는 장면을 보며 상당히 고통스러웠고, 죽은 이의 몸을 그렇게 다뤄도 되는가, 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 영화 속에서 아이는, 유괴당한 아이는, 그래서 죽은 아이는, 영화 속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영화를 이끌어가기 위한 소재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유괴의 문제점, 부모들이 어떤 고통과 갈등을 겪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소재”라는 것. 아이의 죽은 몸을 다루는 카메라 방식이 그랬다.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지만, 소위 말하는 “피사체” 이상 아니었고 언론이나 뉴스 등에서 선정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사건의 소재” 이상 아니라는 느낌. 그런 카메라의 응시가 너무도 강했다.
(그래서, 필름2.0의 최광희씨 글에서 지적한 “소재 선정주의”라는 말에 일정 부분 동의했다. 다만 아이를 다루는 방식은 얘기하지 않아 아쉬웠는데 다음 주엔 하려나..)

결국, 이 영화는 소재와 사건에 기대어 “화면이 되게끔” 만든 선정성이라는 느낌. 자칫 루인이 꼽는 올해 가장 별로인 영화가 되겠구나 하는 느낌.

04
어쩌면 마지막 장면으로 가면서, 영화가 좋아질 뻔 했다. 덤덤하게 뉴스진행자로 복귀한 한경배는 뉴스를 진행하고 오지선은 어둠 속에서 아들과 동일시하고.

물론 “새로 아이를 만들자”는 한경배의 말은 소름끼치도록 섬뜩했다. 한경배와 오지선의 이런 발상의 간극은 어디에서 기인할까. 루인은 한경배가 뉴스를 진행하기 전까진, 오지선의 감정이 슬픔에서 우울증으로 진행하겠구나 싶었다. 적어도 한경배가 뉴스진행을 시작하는 그 장면까지는 그렇게 느꼈다.

뉴스진행에 복귀한 날, 첫 뉴스는 아들의 유괴사건. 한경배는 처음엔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보도하다가 결국 자신의 아들이라는 말을 한다. 처음엔 울먹이려다가 참다가 울다가 결국 죽은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말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오지선은 뉴스를 보며 “하지마”라는 말을 중얼거린다. 루인은 이 말이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인 줄 알았다. 한경배가 뉴스를 통해 “저의 아들이 죽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진짜로 죽었음이 확인되고 오지선의 우울증은 그 실체-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아들과 자신이 하나가 됨으로서 죽음을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음-를 직면해야 하는 또 다른 고통을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었다는 말을) 하지마”라고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오지선은 “울면서 말하지 마”라고 중얼거린다. 아, 이때의 당혹스러움과 실망이라니.

우울증이라고 가정했을 때, 그렇다고 해서 오지선이 아들의 죽음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이런 부정을 통해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더 강하게 확인한다. 그렇기에 뉴스를 통해, 뉴스를 진행하는 남편, 한경배의 입을 통해 “자신의 아들이 죽었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건, 그렇게 다시 한 번 죽이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다. 외부의 확인을 통해 우울증은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울증이 아니어도 애도와 치유의 시간 동안 이런 말을 듣는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울면서 말하지 마”라고 중얼거렸을 때, 아이는 이 영화를 전개하는 내내 결국 “소재”였을 뿐이란 걸 확인해 준다고 느꼈다. 산자는 망자의 죽음을 영원히 애도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 내내 보여준 그 시선이 이 한마디를 통해 확인하고 확증하고 못 박는 효과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애도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
(물론 한경배의 울음을 통해 오지선이 다시 한 번 울게 되고 더 고통스러워지기에 울지 말라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글쎄, 다시 확인을 해야겠지만, 이 영화를 다시 일고 싶지는 않다.)

05
그래서 영화관을 나서며 기분이 많이 더러웠다. 원래 계획이라면 오늘 아침엔 [바람피기 좋은 날]을 읽으려 했는데, 관뒀다.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불쾌해질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일은 읽으러 가야지.

기분, 방학,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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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바닥 없이 가라 앉아있던 몸은 수요일 세미나를 기점으로 괜찮은 상태다. 지도교수와의 즐거운(!) 세미나를 하면서 몸이 많이 좋아졌다. 의외의 결과인데, 세미나를 하고 나면 몸은 더 가라 앉을 거라고 걱정했기 때문. 어쩌면 그 자리가 세미나 자리였기에 가능한 몸의 변화인지도 모른다. 어제 저녁에도 세미나가 있었는데, 역시나 세미나 이후 몸이 괜찮은 상태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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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끝나가는데, 계획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한 것이 없다. 방학 계획은 원대했으나 그 끝은 비참하다, 인가ㅠ_ㅠ 물론 계획은 처음부터 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무리인 걸 알고 세운 계획이고 일부러 무리하게 세웠다. 이유는, 빠듯한 혹은 무리인 계획을 세우고 그것에 근접하려고 노력할 때, 어느 정도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가능한 정도만 목표로 삼는다면, 느슨해질 것이고 그러다보면 할 수 있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낼테니까.

그래도 이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빈둥거린 시간이다. 무얼 읽었다고 혹은 무얼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물론 무언가를 했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 곧 아무 것도 안 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세세하게 말한다면 무언가는 했다. 하지만 루인은 언제나 루인에게 이런 식의 잣대를 적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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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개봉 중인 영화 중, 아트레온에서 하는 것을 기준으로 읽고 싶은 영화는 네 편. [그 놈 목소리], [바람피기 좋은 날], [아포칼립토], [샬롯의 거미줄].

[그 놈 목소리]는 그저 영화를 읽는 과정에 울 수만 있으면 된다. 최근 개봉작 중에 그나마 울 만한 영화가 이것 뿐인 것 같아 안타깝지만. 돈 아까워서 우는 사태는 없겠죠? 🙂

[바람피기 좋은 날]은 김혜수도 나오고 섹슈얼리티 때문에 읽고 싶고, 무엇보다 바람피는 건 좋잖아 🙂

[아포칼립토]는 논쟁 때문에 읽고 싶다. [보랏]을 못 읽은 건 아쉬운 일.

[샬롯의 거미줄]은 채식주의와 관련 있을 수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기사를 다 읽은 건 아니고 기사에서 채식주의를 언급하고 있는 걸 발견해서, 읽기로 했다.

근데 이 네 편을 일요일까지 다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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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이용하여 또 한 편의 “슈퍼울트라 초보의 블로그 스킨 수정하기”란 글을 쓸까… 하는 충동을… 그래도 지난 번과 같은 글을 쓸리는 없겠지, 하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