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스킨: 단순한게 좋아

처음으로 운영하던 블로그의 스킨은 이제 기억나지 않아요. 그 당시 포털사이트에서 제공하던 블로그의 스킨은 그다지 예쁘지는 않았죠. 당시 블로그 붐이 일기 직전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포털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스킨 중에서 예쁜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그저, 있는 중에서 그나마 괜찮은 걸 골랐죠.

9개월 가량을 중단하고 나서 시작한 두 번째 블로그이자 [Run To 루인] 첫 번째 버전은 지금의 [Run To 루인]과는 스킨이 달라도 많이 달랐죠. 몽땅 검은 색이었거든요. 그나마 지금은 흰색이기에 빗금의 구분선(?)이라도 있죠. 그땐 이것 마저도 없었어요. 구분선도 몽땅 없애고 오직 검은 색에 회색 계열로 추정하는 글자색으로 수정한 스킨을 사용했었죠.

그 스킨을 좋아했는데, 그럼에도 안타까운 일은 있었죠. 모니터에 따라선 글자가 전혀 안 보이기도 한다는 것-_-;; 玄牝에 있는 컴퓨터 모니터에 맞춰 스킨을 수정했기에 주로 사용하는 모니터에선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명절 때 부산에라도 가서 컴퓨터를 사용하려 하면, 글씨가 전혀 안 보인다는 것;;; 그래서 블로그 사용은 엄두도 못 냈죠.

지금의 [Run To 루인]으로 넘어 오면서도, 완전 검은 색으로 이루어진 스킨을 사용하고 싶었죠. 그러지 못한 건, 이전에 사용하던 블로그에선 스킨 수정이 쉬웠는데 반해, 태터툴즈를 처음 사용하던 시절엔 스킨 수정은 엄두도 못 냈거든요. (그 이유는 여기에… 아,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_-*) 누군가가 올려 둔 스킨을 수정할 수도 없고 검은 색 중심의 스킨 중에서 딱히 몸에 드는 것도 없고 해서 작은 고양이가 있던 스킨을 임시로 사용했죠.

그러다 키드님을 만나고 키드님의 당시 스킨에 반해서 선택한 스킨이 지금의 스킨이에요. 이미지 장식이 없고 깔끔하고 요란하지 않아서 좋아해요. 사실, 블로그 이름과 메뉴 등이 있는 부분에 그림이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을 지우고, 바탕그림을 없애고 방명록을 없애는 등, 약간의 수정을 거쳤죠. 그것이 지금의 스킨이고, 이 스킨을 두고 혹자는 “병원이 떠오른다”고 했지요. 캬캬.

현재 태터툴즈 클래식 버전을 고수하고 있는 것도 이 스킨보다 몸에 드는 스킨을 발견하지 못해서죠. 만약 지금의 스킨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벌써 업그레이드 했을 듯.

변태고냥 J씨의 스킨 선택은 mikimoto님의 스킨에 반했던 이유에서 였죠. 다방을 만들기 전부터 mikimoto님이 가끔씩 사용하던 스킨이 좋아서 사용해야지 했더랬죠. 그러다 며칠 전, 또 수정을 했어요. 그나마 하나 있는 이미지를 없애 버린 것. 그리하여 글자만 존재하는 스킨으로 탈바꿈했죠. 후후후. (원래 모습현재 모습) 두 모습을 비교하면서, 현재 모습을 좋아하고 있는데요, 현재 스킨을 사용 중인 음악다방에선 몰랐는데, 이미지 하나 없는 공간에 적용하니…;;; 앨범표지사진이라도 있을 때와 없을 때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는 줄 몰랐어요. 아하하 ;;;;;;;;;;; 그래도 좋아요 🙂

그나저나 왜 이렇게 단순한 디자인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후후.

#[Run To 루인]엔 방명록이 없는데 반해 음악다방엔 수정할 줄을 몰라 방명록을 그대로 뒀었죠. 그런데 조만간에… 쿠후후

프로이트의 애도/슬픔과 우울증, 그리고 루인

루인의 일 년에 한 편 쓰는 독후감 -_-;; 일 년에 책 한 권 읽는다는 얘기죠. 케케케. 그런데 심지어 이 독후감은 책을 한 권 다 읽은 것이 아니라 한 챕터를 읽고 썼네요. -_-;; 후후후.

프로이트, “슬픔과 우울증”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윤희기 옮김, 파주: 열린책들 2003/1997

슬픔은 보통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똑같은 종류의 상실감이 슬픔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을 유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우울증의 특징은 심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낙심,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의 중단,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 모든 행동의 억제, 그리고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을 정도로 자기 비하감을 느끼면서 급기야는 자신을 누가 처벌해 주었으면 하는 징벌에 대한 망상적 기대를 갖는 것 등으로 나타난다. (…) 슬픔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자애심(自愛心)의 추락이다.

그렇다면 슬픔은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 것일까? (…) 현실성 검사를 통해 드러난 사실은 사랑하는 대상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그 대상에 부과되었던 모든 리비도를 다 철회시켜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된다. 물론 이런 요구는 당연히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 결국 사랑하던 대상에 리비도를 집중시켰던 때의 어떤 기억과 기대가 각기 되살아날 때마다 리비도의 과잉 집중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현실을 존중하는 가운데 리비도의 이탈도 이루어진다. (…) 그러나 슬픔의 작용이 완결된 뒤, 자아는 다시 자유롭게 되고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자, 이제는 우리가 슬픔에서 알아낸 것을 우울증에 적용해 보자. (…) 대상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생기는 우울증 (…) 대상이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다만 이제는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경우가 그렇다. 또 다른 경우, 그와 같은 종류의 상실이 일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더 적절하게 얘기하자면, 이런 경우는 환자가 자신이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 가령, 잃어버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지만 그의 [어떤 것]을 상실했는지 모를 경우, 우리는 환자가 상실을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울증의 경우는 당사자를 그렇게 전적으로 사로잡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우울증 환자의 억제가 우리에게는 당혹스럽게 여겨진다는 점이다. 게다가 우울증 환자는 슬픔의 경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또 다른 것, 즉 자애심의 급격한 저하, 말하자면 상당한 정도 자아의 빈곤을 내보인다. 슬픔의 경우는 빈곤해지고 공허해지는 것이 세상이지만, 우울증의 경우는 바로 자아가 빈곤해지는 것이다. (…) 그는 스스로를 비난하고,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붓고, 스스로가 이 사회에서 추방되어 처벌받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비하시키며,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이렇게 쓸모없는 사람과 같이 지내야 한다는 것이 실로 안타깝다며 동정을 보내기도 한다.

어쩌면 우울증 환자에게는 그것과는 정반대의 특징, 즉 자기 폭로를 통해 만족을 얻기 위해 집요하게 떠들어 대는 속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여기에서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모순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슬픔과 우울증을 비교해 볼 때 우울증 환자는 대상과 관련한 상실감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이 자아와 관련된 상실감이라는 것이다.

만일 어느 우울증 환자가 내뱉는 온갖 자기 비난의 말을 꾹 참고 끝까지 들어보면 정말 듣기 어려운 심한 자기 비난의 말이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말 조금만 달리 보면 그런 비난의 말이 다른 사람, 그 환자가 현재 사랑하고 있거나 아니면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 혹은 그가 꼭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다른 사람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그것은 바로 우울증 환자들의 자기 비난이라는 것이 사랑의 대상에 대한 비난인데, 그것이 환자 자신의 자아로 돌려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자기 불평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또 감추지도 않는 것은 그들이 내뱉는 자기 멸시의 말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런 우울증 환자들은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겸손과 복종의 태도를 전혀 내보이지도 않는다. 그런 태도는 주변에 있는 그런 무가치한 사람들이나 내보이는 것이지 자기는 아니라는 심산이다. 반대로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냉대를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남을 불편하게 하는 귀찮은 존재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그들의 행동에서 이런 반응들이 나타나는 것은 어떤 과정을 거쳐 우울증이라는 비참한 상태로 바뀐 그들의 반항적인 심리 상태가 행동으로 그대로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대상 선택, 즉 어떤 특정인에게 리비도를 집중시키는 일이 한때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냉대를 받거나 그에게 실망을 하게 되면 그 대상관계가 깨지고 말았다. 정상적인 결과라면 그 대상에게 집중되었던 리비도가 철회되어 새로운 대상에게 전위되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여러 가지 다른 조건들 때문에 다른 식의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즉, 저항할 힘을 지니지 못한 대상 리비도 집중은 결국 사라지게 되고, 반면에 자유로운 리비도는 다른 대상을 찾는 대신 자아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자아 속에서도 그 리비도는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아를 포기된 대상과 [동일시]하는 데에만 기여할 뿐이다. 그래서 그 포기된 대상의 그림자가 자아에 드리우게 되고, 그때부터 자아는 마치 그것이 떠나 버린 대상이라도 되는 듯 어떤 특수한 기관에 의해 대상처럼 취급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대상 상실은 자아 상실로 전환되고, 자아와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갈등은 자아의 비판적 활동과 동일시에 의해 변형된 자아 사이의 분열로 바뀌게 된다.

만일 대상에 대한 사랑 – 대상 그 자체가 포기된 뒤에도 결코 포기될 수 없는 사랑 – 이 나르시시즘적인 동일시 속에 숨어 버린다면 그 동일시에 의한 대체 대상에 증오가 작용하게 되면서 그 대상을 욕하고, 비하시키고, 고통 받게 만들고, 그리고 그런 고통 속에서 사디즘적인 만족을 이끌어 내게 된다.

따라서 우울증 환자가 자기 대상과 관련해서 내보이게 되는 성애 리비도 집중은 이중의 변천 과정을 겪는 셈이 된다.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동일시로의 퇴행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애증 병존에 따른 갈등의 영향을 받아 그 갈등에 아주 근접해 있는 사디즘 단계로 후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울증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자아가 대상 리비도 집중에 복귀함에 따라 스스로를 하나의 대상으로 취급하기만 하면, 말하자면 외부 세계의 대상에 대한 자아의 원초적 반응을 표현하면서 그 대상으로 향해 발산되었던 적개심이 자아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게 되면, 자아가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01
이 글을 읽고 난 뒤 책엔 밑줄 친 흔적과 메모한 흔적으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달았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상당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버릴 수 없는 매력이 있는데, 이 글을 읽으며 새삼 깨달았다. 프로이트가 전개하는 우울증에 대한 설명이 루인의 현재 상태를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 옮겨 적은 글을 다 읽었다면, 아마 최근 글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루인의 상태를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음을 알았으리라, 싶다. 프로이트의 논리에 따르면 루인은 우울증이다.

오랫동안 우울증은 그저 우울한 상태의 지속 정도라고 여겼다. 만화나 다른 텍스트 속에서도 우울증은 우울의 지속이고 그래서 이불 속에 들어가 아무 것도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고 짐작했다. 어쩌면 심리학에서 얘기하는 우울증과 정신분석학에서 얘기하는 우울증 사이엔 차이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우울증을 얘기할 때면, 루인도 우울증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이트 식의 설명을 받아들인다면, 루인은 우울증의 전형이 될 수도 있다. 책에서 [Run To 루인]으로 문장들을 옮겨 적으며, 사실, 한 문장 한 문장에 루인의 얘기를 덧붙이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프로이트는 우울증 “환자”라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상당히 많은 경험들을 병리적인 것으로 취급하며 어떤 정상적인 사람을 가정한다. 그러니 이런 식의 기술을 비판할까? 하지만 루인은 루인이 환자가 아니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트랜스/젠더는 정말 정신병일 지도 모른다. 루인이 하고 싶은 얘기는 “그래, 루인은 환자 맞아, 그래서 어쩌라고?” 이다. 환자면 또 어때서? 정신병이면 좀 어때? 병이라고 정신질환이라고 호들갑스럽게 반응하는 그것이 더 문제아냐? “트랜스젠더는 정신병이 아니야”라는 주장은 “진짜 정신병”이 있고, “그런 진짜 정신병자들만은 정말로 상종도 해선 안 될 존재”로 박제한다. “트랜스젠더는 정신병이 아니다”라는 반박은 병을 분류하고 만들어 내는 기준과 제도를 문제시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기존의 기준과 제도를 강력하게 지지한다. 환자 혹은 “비정상”이라고 불리면 안 된다고 느끼는 두려움들, 그것에 대한 과도한 반응들이 현재 한국 사회의 제도와 관습들을 지속 가능하게 한다.

상담은, 정신분석은 비록 그것이 내담자를 환자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해도, 그동안 설명하지 못했던 삶의 흔적을 (어떤 식으로 건 간에)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느낀다.

02
미치도록 몸에 와 닿은 부분은 자신을 향한 비난이 사실은 상실한 대상을 향한 비난이라는 지적이었다. 이 구절에서 가장 많은 메모를 남겼다.

“누가 루인 따위를 좋아하겠느냐”는 요지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이와 비슷한 글/얘기는 빈번하다. 오프라인에서 누군가가 루인에게 “왜 연애를 안 해요?”라고 물으면 대답하는 방식은 대체로 두 가지: 안 사귀다 보니 탄력 받아서 계속 안 사귀고 있어요; 주제 파악은 하고 살아요 🙂

하지만, 프로이트의 저 문장을 읽고 깨달았다. “누가 루인 따위를 좋아하겠어요.”라는 말은 “왜 당신은 그토록 루인에게 무관심 했나요?”라는 의미일 수 있음을. (이걸 또 이렇게 대놓고 적음으로서 자기 폭로를 하는 것 역시 우울증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케케케.) 사랑 혹은 연애를 하지 않겠다는 말은 결국 ‘당신이 루인을 사랑하지 않았잖아요’ 혹은 ‘당신은 루인을 전혀 모르잖아요’ 라는 의미였음을. 사실은 당신을 원망하고 있었음을….

물론 그 대상을 상실한 지 오래고 이젠 막연한 흔적만 남아 있다. 당신… 언제나 그렇듯 당신은, 막연한 흔적일 뿐이다. 거울을 통해서만 낯설고도 기괴한 형상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는.

(그렇다고 해서 “주제 파악은 하고 살아요”라는 말이 유효함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흐흐흐)

03
물론 꼭 이런 식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단지 프로이트의 의견일 뿐, 그것이 보편적인 해석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좋다. 이런 방식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만이라도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언어를 발견했다는 것, 그래서 삶의 어떤 지점이 한 순간이나마 해석이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프로이트가 가지는 의미이고 여전히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키워드: 짝사랑, 짝사랑이라는 섹슈얼리티

붉은 꽃 피고 진 자리

아, 그랬었지.
잊고 있었어.
붉은 꽃은 유난히 점성이 강해.
둥글게 피면서 시들어가지.
시들면서 피는 꽃.
조금은 달콤하고 상쾌하면서도 비린 향을 풍겨.

몸엔 평생 붉은 꽃 피고 진 자리 남겠지.
몇 해 전 피고 진 붉은 꽃의 흔적처럼.

꽃이 피기까지, 많은 망설임도 있지.
하지만 순간이야. 망설임도 피는 순간의 쾌감도.
떨리면서도 그 떨림을 잊지 못해.
두려우면서도 그 두려움이 주는 쾌감을 잊지 못해.

몸에 붉은 꽃 피고 진 자리.

…이렇게 또 한 시절의 흔적을 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