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는 게으름

요즘 블로깅을 매일 안 올리고 있다. 글은 매일 쓰고 있다. 그런데도 블로그에 공개는 안 하고 있다. 공개하면 한번에 여러 편을 모아서 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한데 귀찮아서. 글을 쓰는 건 안 귀찮은데 어쩐지 블로깅하는 건 귀찮다. 아니 그보다 한없이 게으르고 싶어서 블로깅을 뭉그적거리고 있다. 그러니까 내게 게으름의 끝은 다른 게 아니라 블로깅을 하지 않는 것. 글은 쓰지만 블로깅을 하지 않는 것만큼 본격 게으름이 어딨겠는가. 어쨌거나 요즘 좀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당분간은 지속될 듯…

좋은 연구자란…

그런 연구자가 있다. 주변에서 그 사람을 토론자로 부르고 싶어하지 않고 학술대회에서 그 사람 논문에 토론자로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는 연구자. 박사학위는 있는데 논문을 읽으면 심각하다는 평이 먼저 나오는 연구자. 그런데도 엄청 성실해서 열심히 글을 쓰는 연구자. 그런 연구자가 있다.
그런 연구자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고민하는데 좋은 연구자란 무엇일까? 자기 위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식도 있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데도 주변에서 기피하는 연구자가 된다는 건 어째서일까? 사실 성실함은 연구자의 기본 덕목이지 장점일 순 없다. (껠바서 터진 나는 글렀어.) 그래서 “그래도 그 사람 엄청 성실하잖아”라는 평은 좋은 평일 수 없다. 물론 갈 수록 성실함이 좋은 평가 지표가 되고 있긴 하지만. ㅠㅠㅠ
아무려나 좋은 연구자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 똑같이 공부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의 위치를 질문하는 작업을 하는데도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쪼렙이고 평생 학생이고 싶은 나 따위야 신경 쓸 이유가 없지만 그럼에도 종종 궁금하다.

누가 비건의 음식 선택을 규정할까

며칠 전 채식한다는 말을 쓰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고민한 이유 중 하나가 다시 떠올랐다.
며칠 전 어느 행사에 갔다. 그곳에서 참가자 모두에게 샌드위치를 나눠줬는데 햄과 치즈가 들어간 종류였다. 일행으로 온 것으로 추정하는 ㄱ이 ㄴ에게 “채식하는데 그거 먹어도 괜찮아요?”라고 물었다. ㄴ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ㄱ은 계속해서 “햄 들어가서 못 드시잖아요”라고 말했고 ㄴ은 괜찮다고 했지만 ㄱ은 계속해서 물었고 ‘염려’했다. 그 대화를 듣는 순간 깨달았다. 그래, 내가 이래서 채식한다는 말을 안 하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나는 괜찮은데 주변에서 떠드는 그 언설, 분명 나를 엄청 신경써주는 걱정이고 고마운 마음이지만 그럼에도 곤혹스러워지는 상황, 기본적으로 채식을 하지만 때로 상황에 따라선 그렇지 않은 음식을 먹을 수도 있는데 그런 선택을 염두에 두지 않는 태도가 나의 고민 거리였다.
이 고민은 정확하게 젠더를 둘러싼 고민과 연결된다. 지금은 내가 나를 트랜스젠더퀴어라고 설명하지만 내일은 그냥 여자라고 말할 수도 있고 다음달엔 그냥 남자로 살래요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다가 4월 즈음엔 호르몬 투여를 시작하고 수술을 받겠다며 돈을 모을 수도 있다. 나는 내가 젠더를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인식론적 변화를 요청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비건에도 정확하게 적용될 수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비건이지만 상황에 따라 비건이 아닌 음식을 먹을 수도 있다. 내가 내킨다면 그럴 수도 있다. 누가 이래라 저래라가 아니라 내가 내킨다면 말이다. 언제가 육식하는 채식주의자란 글을 썼듯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삶은 주변 반응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 너는 비건이니까 이런 건 먹으면 안 돼,라거나 너는 아무거나 먹는 비건이니까 그냥 대충 먹으라며 비건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전혀 준비하지 않는 상황 같은 것. 이런 것이 곤란스럽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규정하거나 확정하려는 방식말이다.
그런데 이런 오지랖이나 염려에 비하면 한국의 퀴어 관련 행사나 페미니즘 관련 행사에 과일을 제외하고 비건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하지 않거나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은 늘 놀랍고 고민거리다. 도데체 왜?
아무려나 나는 내멋대로 할거고 여전히 나는 비건이고 여전히 나는 채식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