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연구자란…

그런 연구자가 있다. 주변에서 그 사람을 토론자로 부르고 싶어하지 않고 학술대회에서 그 사람 논문에 토론자로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는 연구자. 박사학위는 있는데 논문을 읽으면 심각하다는 평이 먼저 나오는 연구자. 그런데도 엄청 성실해서 열심히 글을 쓰는 연구자. 그런 연구자가 있다.
그런 연구자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고민하는데 좋은 연구자란 무엇일까? 자기 위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식도 있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데도 주변에서 기피하는 연구자가 된다는 건 어째서일까? 사실 성실함은 연구자의 기본 덕목이지 장점일 순 없다. (껠바서 터진 나는 글렀어.) 그래서 “그래도 그 사람 엄청 성실하잖아”라는 평은 좋은 평일 수 없다. 물론 갈 수록 성실함이 좋은 평가 지표가 되고 있긴 하지만. ㅠㅠㅠ
아무려나 좋은 연구자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 똑같이 공부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의 위치를 질문하는 작업을 하는데도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쪼렙이고 평생 학생이고 싶은 나 따위야 신경 쓸 이유가 없지만 그럼에도 종종 궁금하다.

누가 비건의 음식 선택을 규정할까

며칠 전 채식한다는 말을 쓰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고민한 이유 중 하나가 다시 떠올랐다.
며칠 전 어느 행사에 갔다. 그곳에서 참가자 모두에게 샌드위치를 나눠줬는데 햄과 치즈가 들어간 종류였다. 일행으로 온 것으로 추정하는 ㄱ이 ㄴ에게 “채식하는데 그거 먹어도 괜찮아요?”라고 물었다. ㄴ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ㄱ은 계속해서 “햄 들어가서 못 드시잖아요”라고 말했고 ㄴ은 괜찮다고 했지만 ㄱ은 계속해서 물었고 ‘염려’했다. 그 대화를 듣는 순간 깨달았다. 그래, 내가 이래서 채식한다는 말을 안 하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나는 괜찮은데 주변에서 떠드는 그 언설, 분명 나를 엄청 신경써주는 걱정이고 고마운 마음이지만 그럼에도 곤혹스러워지는 상황, 기본적으로 채식을 하지만 때로 상황에 따라선 그렇지 않은 음식을 먹을 수도 있는데 그런 선택을 염두에 두지 않는 태도가 나의 고민 거리였다.
이 고민은 정확하게 젠더를 둘러싼 고민과 연결된다. 지금은 내가 나를 트랜스젠더퀴어라고 설명하지만 내일은 그냥 여자라고 말할 수도 있고 다음달엔 그냥 남자로 살래요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다가 4월 즈음엔 호르몬 투여를 시작하고 수술을 받겠다며 돈을 모을 수도 있다. 나는 내가 젠더를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인식론적 변화를 요청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비건에도 정확하게 적용될 수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비건이지만 상황에 따라 비건이 아닌 음식을 먹을 수도 있다. 내가 내킨다면 그럴 수도 있다. 누가 이래라 저래라가 아니라 내가 내킨다면 말이다. 언제가 육식하는 채식주의자란 글을 썼듯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삶은 주변 반응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 너는 비건이니까 이런 건 먹으면 안 돼,라거나 너는 아무거나 먹는 비건이니까 그냥 대충 먹으라며 비건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전혀 준비하지 않는 상황 같은 것. 이런 것이 곤란스럽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규정하거나 확정하려는 방식말이다.
그런데 이런 오지랖이나 염려에 비하면 한국의 퀴어 관련 행사나 페미니즘 관련 행사에 과일을 제외하고 비건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하지 않거나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은 늘 놀랍고 고민거리다. 도데체 왜?
아무려나 나는 내멋대로 할거고 여전히 나는 비건이고 여전히 나는 채식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사랑할 권리가 있는가?

우리에겐 혹은 누구나 사랑할 권리가 있다…라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특히 기독교 근본주의 집단 혹은 LGBT/퀴어 적대 집단에 대항할 때 이 표현은 ‘동성애'(!)를 옹호하는 언설로 무척 자주 언급된다. 누구나 사랑할 권리가 있다… 나는 사람들이 어떤 기획으로 이 구절을 선택했는지 모르니까 이 구절을 사용하는 사람 개개인의 맥락과 의를 알 수 없다. 그저 이 구절 자체가 갖는 의미를 구시렁 거릴 수 있을 뿐.
누구나 사랑할 권리가 있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 이 구절의 의미를 어디까지 염두에 뒀는지 궁금하다. 구절의 의미만 따진다면 이 말은 모든 사람의, 모든 형태의 사랑을 긍정하거나 옹호한다. 그리하여 많은 폭력과 이른바 혐오, 현행법상의 범죄를 함께 옹호한다. 일단 LGBT/퀴어를 적대하는 집단은 언제나 퀴어를 사랑한다고 주장하지 혐오하거나 미워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른바 반대 집회나 욕설은 학대와 폭력이 사랑이 매로 불리고, 데이트 성폭력이 용인되는 한국에서 사랑의 표현일 수 있다. 그런 방식의 사랑도 사랑할 권리에 속한다는 뜻일까? 혹은 많은 성폭력이 사랑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사랑도 포함한다는 뜻일까? 누구나 사랑할 권리가 있다는 말은 한편으론 의미있는 표현이지만, 사랑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말이지만 사랑이 무엇인지를 질문하지 않는다. 혹은 그 질문을 생략하며 사랑을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한다. 하지만 사랑은 자명하거나 마냥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사랑이 자명한 것이 아님은 ‘누구나 사랑할 권리가 있다’란 바로 그 구절이 말하는 바이기도 하다. 사랑을 권리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사랑할 권리라는 표현은 사랑을 자명한 감정이나 아름다운 관계가 아니라 정치적 의미 투쟁의 장, 끊임없는 논쟁거리란 점을 분명히 한다. 맞다. 사랑은 의미 투쟁의 장이며 권력 다툼이 첨예하게 작동하는 관계망이다. 따라서 ‘누구나 사랑할 권리가 있다’란 표현이 등장한다면 그 다음엔 ‘그러니 우리 사랑도 정당하다’가 아니라 ‘너의 사랑 개념과 나의 사랑 개념을 다투고 사랑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논하자’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러니 우리 사랑이 정당하다’와 같은 방식으로 논의가 흐른다면 일종의 언어도단이다.
다른 한편 누구나 사랑할 권리가 있다란 표현은 실제 정말로 아름다운 방식으로 쓰이지 않는다. 표현에 이어 ‘그러니 동성애는 정당하다’ 혹은 ‘그러니 동성애를 인정하라’와 같은 언설이 등장할 때 ‘누구에게나 사랑할 권리가 있다’란 표현은 결국 동성애만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쓰일 공산이 크다. 매우 위험한 언어 표현 전략이란 뜻이다. 누구나에 양성애자/바이섹슈얼, BDSM 실천자, 세대간의 사랑 실천자는 포함되는가? 몇몇 LGBT 모임은 BDSM 실천자는 퀴어가 아니라며 배제하거나 가입을 불허하고 있다. 세대간의 사랑은 마치 금기처럼 논의 자체가 안 되거나 범죄로만 다루는 경향이 있다. 지금도 꾸준히 여성전용 커뮤니티에서 양성애자/바이섹슈얼을 비난하는 글이 실리고 이 글이 논쟁글로 다뤄지고 있다. 누구나에 누가 포함되는가? 누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한계, 누구나라고 여기는 성적 선호나 실천의 한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그리하여 질문하자면, 누구나 사랑할 권리가 있다란 말은 정확하게 무슨 뜻일까? 어리석은 내겐 정말로 어려운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