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된다는 것, 연상 된다는 것

블로그를 돌아다니다가, 문득, 어떤 무언가를 보면 누가 생각나, 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예전에 누군가는 버섯을 볼 때면 루인이 떠오른다고 했다. 예전 블로그에, 자취생활 하는 루인의 버섯요리 관련 글을 올렸기 때문이리라. 지금은 그렇지 않겠거니 짐작하지만, 버섯과 루인이라….

어떤 무언가를 보면 누가 생각나, 라는 문장을 떠올리며, 문득, 끔찍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기억 된다는 것에 왜 이리도 끔찍해 할까, 궁금해졌다.

예전, 생물 시간에 후각은 다른 감각 기관과는 달라, 곧바로 뇌와 연결 되어 있다고 했던가. 그래서 냄새를 맡으면 다른 과정 없이 바로 연상할 수 있다고 했던가. 후각의 기억력이 가장 빠르다고 했던가. 그래서 폭력 상황에는 언제나 그 어떤 냄새가 난다고 했던가. 생물시간의 그 말을 들은 이후, 냄새가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하여 기억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지금에 와선 이렇게 묻는다, 무엇을 그렇게 기억하고 싶지 않았느냐고. 무엇을 그렇게 잊고 싶으냐고.

루인은 다른 사람을 기억 못하는 만큼이나 남들도 루인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누군가가 루인을 어디선가 봤다고 하면 당황한다. 루인을 기억해준다는 말에 기뻐하기보다는 당황한다.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쩌자고 남들에게 기억될 만한 행동을 했느냐며 자신을 탓한다. 고등학교 때까지 같은 반이었던 사람들과 연락하지 않고 지내는 루인은 지금 이런 순간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지만, 그렇다고 그 시절 알고 지낸 누군가를 떠올리지는 않는다. 그냥 막연한 어떤 풍경 정도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떤 사물을 통해 연상되는 건, 상대를 고착시키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걱정도 있다. 왜 이렇게도 기억되는 걸 싫어할까. 몇 년 전 알고 지낸 사람을 다른 자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절친한 친구가 아닌 한, 구태여 아는 척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루인이 상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긴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도 일부러 그런다. 상대가 루인을 기억할리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루인은 기억에 남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루인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걸까. 문득 궁금하다. 2004년 12월 18일에 가진 이랑 첫 모임 자리에서 사람들이 자리에 앉은 순서는 다 기억하면서도 사람들 얼굴, 이름은 금방 잊어버린다. 이랑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모임 자리가 아닌 다른 공간에서도 알아 볼 수 있기 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런 건 잘못이 아닌데도 종종 상당한 잘못처럼 느끼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다른 공간에서 모른 척 하면 죽여 버린다고 했지만, 그 말만 기억할 뿐 그 사람의 얼굴과 이름은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된다는 것, 연상 작용을 통해 언제나 떠오른다는 것. 당신만은 가끔, 아주 가끔 루인을 떠올려 줬으면 하면서도 맹랑한 소리라고 비웃고 만다. …잠깐! 8~9년 된 친구의 얼굴이, 문득 안 떠오른다… -_-;;; 하긴 아직도 길에서 마주쳐도 긴가민가한 걸;;;;;;;;;;;;;;;;;; 이럴 땐, 뇌의 작동이 기묘해서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ㅡ_ㅡV 결론이 이상하게 나버렸다. 새삼스럽진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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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분히 생물학과 연결해서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 이런 현상, 재밌다. 얼굴과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상황은 기억을 하는 사람과 얼굴과 이름은 기억하지만 그 상황은 기억 못 하는 사람이 만나면 어떨까? 기억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렇다면 어떤 현상을 경험하며 몸에 남아 있는 흔적들은 어떻게 구성되는 걸까? 후후. 재밌다._M#]

짝사랑은 성적 지향성이 될 수 없을까.

길게 쓰고 싶지만 짧게 끝날 것 같다. 아직도 몸의 준비가 안 된 때문이다.

라디오를 듣다 보면, 짝사랑과 관련한 청취자들의 사연이나 진행자의 경험을 듣곤 한다. 대체로 그럴 때의 양상은, 과거를 회고하는 아쉬움이거나, 사랑을 이루기 위한 전단계이거나 미완의 사랑으로 설명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불만이었고, 왜 짝사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랑이 아닌가란 반문을 했다. 짝사랑은 미완의 사랑일까.

성적 지향성을 얘기하다보면 이성애 아니면 동성애를 얘기하기 마련이다. 이런 얘기 과정에 양성애나 무성애는 별로 얘기하지 않는 편이고 그래서 동성애 정도만 얘기해도 섹슈얼리티/성적 지향성을 모두 얘기한 것 마냥 여기기도 한다. 라디오를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질문을 던지면, 짝사랑은?

이런 문제의식으로 글을 쓰고 싶었다. 사랑이란 것이 반드시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발생할 때만 성립 하는 것인가. 아울러, “여성”으로서 “여성”을 사랑하면 반드시 레즈비언/동성애라고 불려야 하고 “여성”으로서 “남성”을 사랑하면 반드시 이성애라고 불려야 하나? 이성애/동성애/양성애란 식의 세 가지 구분만으로 충분한가? 이런 질문들을 같이 던지고 싶었다. 어떤 사람은 17년 가까이를 한 여자를 좋아했지만 그것을 레즈비언 관계로 부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이성애라거나 양성애란 의미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은 딱히 자신의 성적 지향성을 고민한 건 아니지만 “다들 그러니까, 이성애가 당연한가보다 했지”라는 얘길 한다. 이 말이, “어쨌든 나는 이성애자야”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이성애/동성애/양성애라는 식의 구분으로 섹슈얼리티를 설명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며 이런 식으로 구분할 수 없는 사랑은 너무도 많다. 손쉽게 “그건 이성애야”라고 말할 때조차 그렇게 부르기 힘들 때가 있다.

짝사랑이 그랬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상대방의 젠더 정체성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물론 개개인마다 자신이 특별히 끌리는 어떤 타입이 있겠지만, 루인이 말하고 싶은 건, 상대방의 성별이 아니라 짝사랑을 통해 겪는 그 아픔들을 하나의 섹슈얼리티로, 성적 지향성으로 설명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데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얘기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한 가지 형식으로서의 짝사랑이라면 이것 역시 하나의 성적 지향성일 수 있고, 이런 과정 중에서 현재의 루인을 설명하고 싶었다.

어제, 그 추운 밤, 玄牝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스팔트 도로에 주저앉아 펑펑 울 뻔 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몸을 다독이고 玄牝을 향해 걸으며, “그랬구나, 그랬구나”를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그러며 아직은 이걸로 글을 쓸 때가 아님을 알았다. 아직은 몸의 준비가 안 된 상황이다. 하지만 꼭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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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은 미완인가
왜 성적 지향성을 얘기하며 짝사랑은 빠져 있는가
사랑은 반드시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만 성립 가능한가
과거를 해석하며 현재의 변한 정체성으로 인해 과거까지 반드시 바꿔야 하나
반드시 자신을 이성애/동성애/양성애 어느 하나로 편입해야 하나
“이성애가 당연한가 보다 했지”
길에서 주저 앉아 엉엉 울 뻔 했음, 그런데 자꾸만 웃음이 났다

키워드: 짝사랑, 짝사랑이라는 섹슈얼리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