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사랑할 권리가 있는가?

우리에겐 혹은 누구나 사랑할 권리가 있다…라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특히 기독교 근본주의 집단 혹은 LGBT/퀴어 적대 집단에 대항할 때 이 표현은 ‘동성애'(!)를 옹호하는 언설로 무척 자주 언급된다. 누구나 사랑할 권리가 있다… 나는 사람들이 어떤 기획으로 이 구절을 선택했는지 모르니까 이 구절을 사용하는 사람 개개인의 맥락과 의를 알 수 없다. 그저 이 구절 자체가 갖는 의미를 구시렁 거릴 수 있을 뿐.
누구나 사랑할 권리가 있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 이 구절의 의미를 어디까지 염두에 뒀는지 궁금하다. 구절의 의미만 따진다면 이 말은 모든 사람의, 모든 형태의 사랑을 긍정하거나 옹호한다. 그리하여 많은 폭력과 이른바 혐오, 현행법상의 범죄를 함께 옹호한다. 일단 LGBT/퀴어를 적대하는 집단은 언제나 퀴어를 사랑한다고 주장하지 혐오하거나 미워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른바 반대 집회나 욕설은 학대와 폭력이 사랑이 매로 불리고, 데이트 성폭력이 용인되는 한국에서 사랑의 표현일 수 있다. 그런 방식의 사랑도 사랑할 권리에 속한다는 뜻일까? 혹은 많은 성폭력이 사랑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사랑도 포함한다는 뜻일까? 누구나 사랑할 권리가 있다는 말은 한편으론 의미있는 표현이지만, 사랑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말이지만 사랑이 무엇인지를 질문하지 않는다. 혹은 그 질문을 생략하며 사랑을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한다. 하지만 사랑은 자명하거나 마냥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사랑이 자명한 것이 아님은 ‘누구나 사랑할 권리가 있다’란 바로 그 구절이 말하는 바이기도 하다. 사랑을 권리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사랑할 권리라는 표현은 사랑을 자명한 감정이나 아름다운 관계가 아니라 정치적 의미 투쟁의 장, 끊임없는 논쟁거리란 점을 분명히 한다. 맞다. 사랑은 의미 투쟁의 장이며 권력 다툼이 첨예하게 작동하는 관계망이다. 따라서 ‘누구나 사랑할 권리가 있다’란 표현이 등장한다면 그 다음엔 ‘그러니 우리 사랑도 정당하다’가 아니라 ‘너의 사랑 개념과 나의 사랑 개념을 다투고 사랑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논하자’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러니 우리 사랑이 정당하다’와 같은 방식으로 논의가 흐른다면 일종의 언어도단이다.
다른 한편 누구나 사랑할 권리가 있다란 표현은 실제 정말로 아름다운 방식으로 쓰이지 않는다. 표현에 이어 ‘그러니 동성애는 정당하다’ 혹은 ‘그러니 동성애를 인정하라’와 같은 언설이 등장할 때 ‘누구에게나 사랑할 권리가 있다’란 표현은 결국 동성애만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쓰일 공산이 크다. 매우 위험한 언어 표현 전략이란 뜻이다. 누구나에 양성애자/바이섹슈얼, BDSM 실천자, 세대간의 사랑 실천자는 포함되는가? 몇몇 LGBT 모임은 BDSM 실천자는 퀴어가 아니라며 배제하거나 가입을 불허하고 있다. 세대간의 사랑은 마치 금기처럼 논의 자체가 안 되거나 범죄로만 다루는 경향이 있다. 지금도 꾸준히 여성전용 커뮤니티에서 양성애자/바이섹슈얼을 비난하는 글이 실리고 이 글이 논쟁글로 다뤄지고 있다. 누구나에 누가 포함되는가? 누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한계, 누구나라고 여기는 성적 선호나 실천의 한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그리하여 질문하자면, 누구나 사랑할 권리가 있다란 말은 정확하게 무슨 뜻일까? 어리석은 내겐 정말로 어려운 표현이다.

대한민국이란 섬뜩한 구호

내일 [불온한 당신]을 볼 예정이라 그 내용을 떠올리다 문득 몇 장면이 떠올랐다. 그 장면은 공통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대한민국”이란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다. LGBT/퀴어를 적대하거나 반대하는 집단이 퀴어 관련 행사를 방해하면서 시위를 할 때 그들은 반복해서 “대한민국”이란 구호를 외친다. 이 구호는 2002년 월드컵 응원전에서 나온 바로 그 구호기도 하다. 그래, 이 두 구호는 시기와 맥락이 다르지만 참 닮았고 서로 잘 어울린다. 사실 같은 내용을 지시한다. 대한민국이런 전체주의, 단일 이상(ideal), 그리고 한국인이란 망상의 정체성 말이다. 정말이지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싶다.

맛난 비건빵은 비건전문빵집의 빵이 아니다.

몇 번 쓴 것 같지만 비건이 먹을 수 있는 빵은 비건전문빵집에서 파는 빵이 아니라 발효빵을 전문으로 하는 곳에서 파는 빵입니다. 정말로요. 비건빵 전문점에서 빵을 많이 사먹어봤지만 달리 선택지가 없어서 사먹었지 맛이 엄청 좋았던 건 아니었다. 물론 이태원의 플랜트처럼 뭐든 다 맛난 곳도 있지만. 🙂
조용필 콘서트에 갈 때 중간에 빵을 사먹었는데 그때 빵이 유난히 맛났다. 다시 생각하는 맛이었고 그래서 어렵게 빵집 이름을 찾아냈고 내가 큰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곳에 분점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그곳 빵을 사먹었는데 역시 내 입에 맞다. 맛있다. 비건빵 전문점은 아니고 발효빵을 파는 곳이었다.
사실 비건음식점이 자주 혹은 빈번하게 문을 닫고 있어서 의무처럼 비건음식점에서 사먹어야 할까란 고민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의 주요 활동반경에 비건식당이 별로 없기 때문에 잘 안 가는데 가끔 가도 맛이 별로일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이제는 문을 닫은 러빙헛 신촌점처럼. 한두 메뉴는 나의 입맛에 맞았지만 기본적으로 맛이 무난하거나 평이하거나 그냥 먹을만하거나 그런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비건카페에서 맛나다고 말하는 비건식당 평가가 어떻게 구성되는 것일까 싶을 때도 많다. 비건식당이 더 많아지길 바라지만 가격은 비싸고 맛은 별로인 곳이 가볼 곳으로 추천받는 건 좀 아니다 싶으니까.
마찬가지로 빵도 그러한데 비건이 먹을 수 있는 빵은 비건전문빵집 빵이 아니다. 가격은 확실히 비싸고 맛은 무난할 때가 많다. 그냥 발효빵을 파는 집에서 사먹는 게 훨씬 맛나다. 뭔가 슬프지만, 어째서인지 뭔가 슬프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더 많은 비건음식 전문점이 생기길 바라지만 잘 모르겠다 싶을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