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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저의 말이 당신[루인]에게 상처가 될까봐 질문하기가 조심스러워요”, 라는 말을 듣는다. 이런 말에 대한 루인의 반응은, 이 글을 읽고 있을 분들의 상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참 착하다. 루인은 범생이라니까… 😛
그러니까, 그런 말에 대한 루인의 반응은 간단하다. “루인이 상처 받을까봐 걱정인 것이 아니라 어떤 질문으로 인해 자신이 가해자가 될까봐 걱정인 것 아닌가요?”
누구도 대화를 시도하기 전까진 그 말이 상처가 될지 안 될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상처가 되면 또 어때. 상처를 주고받는 것에 너무도 과잉 반응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결국엔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왜들 그리 상처를 주고받는 일에 강박적인지.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과정 이후, 이와 관련한 어떤 대화도 나눌 수 없는 것, 그것이 더 문제라고 느낀다. 질문자는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질문을 받은 사람은 왜 그것이 상처인지를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얘기를 나눌 수 없을 때 상처가 되지 어떤 말을 했다고 무조건 상처가 된다고 느끼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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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정치적인 올바름”이란 말은 언어가 아니라고 예전에 많이 적었는데, 최근의 고민을 살짝 덧붙이면.
“정치적으로 올바른”이란 건, 상대방의 입장에 따른 “정치적인 올바름”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이 판단하는 “정치적인 올바름”이다. 즉 자신의 입장에서 “정치적인 것”을 구성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올바름”을 결정한다. 그러니 “정치적인 올바름”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화의 과정에서 그다지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질문하는 사람은 그것이 “정치적인 올바른” 질문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질문을 받은 사람에겐 폭력일 수 있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 같아 질문하지 않은 것이 너무도 중요한 질문일 수 있다.
결론은 같다. 뭐든 질문을 던지는 대신 그런 질문을 통해 대화를 하는 것. 어떤 사람이 동성애 혐오 발화를 하건 트랜스혐오 발화를 하건,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했는지 그 맥락을 듣고 싶다. 사과가 전부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