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대상 강의를 했는데

고등학생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정말 하기 싫었는데 요청 받을 당시 강의 자체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잘 할 자신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많은 강의가 망했지만 몇 년 전 10대를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 특히 망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지 않으려 했지만 하기로 했는데 교사가 아니라 학생이 직접 강의 요청을 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강사료를 지급하지만 학생들이 강의를 기획하고 강사를 선정하고 있었기에 사양하기 힘들었다.
어떤 내용을 하면 좋을까라는 내용을 담은, 사전 질문지를 받았다. 대학교 수업에서 조별발표를 위해 내게 인터뷰를 요청한 적이 있다. 사전 질문지를 받았는데 속이 터졌다. 무엇보다 질문자가 스스로를 이미 아는 주체로 가정하거나 나는 아무 것도 모르니까 네가 다 말해달라는 태도인 경우가 많다. 하고 싶은 내용은 불분명하고 질문 내용은 너희들을 알려달라는 것이라 정말 하기 싫거나 싸우자는 느낌일 때가 많다. 이번에 받은 질문지는 달랐다. 내용은 분명했고 알려달라는 내용도 분명했다. 무엇보다 어떤 겸손함이 있었다. 단순히 나이 위계에 따른 겸손이나 강좌 요청하는 입장의 겸손함이 아니라 그냥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의 겸손함이 있었다.
내용을 어떻구 구성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대학(원)생 혹은 성인 활동가를 대상으로 하는 내용을 그대로 담았다. 참가자가 50대도 있는 그런 강의에서 했던 내용을 그대로 담았다. 특강 혹은 기초 강좌에서 하는 내용을 거의 안 바꿨다는 뜻이다. 순서와 예시는 좀 바꿨지만. 고등학생인데도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질문지가 좋았기도 했지만 단순한 이 이유만은 아니었다. 퀴어 인식론을 이해함에 있어 나이와 학력 학벌은 중요한 변수는 아니다. 중요한 변수가 아닌 수준이 아니라 무관한 변수다. 변수는 자신의 위치성을 인식하고 사유하려는 태도다. 20대 초반의 사람이 매우 잘 이해하는 반면 대학 교수가 전혀 이해를 못 하기도 한다. 어려움 혹은 이해 여부를 가르는 변수는 자기 성찰과 상대화다. 그래서 그냥 평소대로 준비했다.
강좌를 하기 전까진 많이 긴장했지만 결과는 놀라웠는데 이제까지 했던 강의 중 이해도가 가장 높았다. 물론 실제 개개인이 어떻게 이해했는가는 다른 문제지만 분위기와 반응에 따른 이해도는 내가 했던 강의 경험 중 최고 수준이었다. 공동체 혹은 함께/더불어 사는 삶을 사유하고 체화하며 공부하는 이들은 이렇게 다른 걸까 싶기도 했다(대안학교였다).
참고로 강좌를 진행하는 내내 교사를 만나지 않았다. 모든 것을 학생들이 준비하고 진행했다. 대학생도 이런 걸 많이 하니 놀랄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엄청 감탄스러운 일이다. 내가 쪼렙이라 발생한 문제겠지만.
이런저런 내용과 별개로 뭔가 학생들의 기운이 발랄해서인지 뭔가 기운이 나는 경험이었다.

경고 및 알림: 제 이름을 파는 상황

제 이름을 파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행사 등에 참여하며, 촬영 금지를 공지했음에도 부당하게 촬영하면서 마치 저와 함께 기록 작업을 하고 있고 그래서 촬영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말한다고 하면서요.
분명하게 말하는데 저는 그런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촬영 금지를 공지한 행사에서 집요하게 촬영하는 등의 일을 하는 사람과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기본 예의 혹은 개념이 없는 경우니까요.
혹시나 이런 사람을 만난 적 있으시다면 그 분을 사진을 촬영해서, 혹은 사진이 없더라도 제보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다시 한 번 알리는데 저는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있으니 누가 그런 말을 했을 때 그 말을 믿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더 심한 욕설을 쓰고 싶었지만 참았음.)

채식 중단

채식을 중단할까보다. 더 이상 채식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까 싶다. 만고 귀찮아서. 그냥 대충 대충 사는 거지, 뭐. 그렇다고 식습관을 바꾸겠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까지 식습관을 바꾸는 건 더 귀찮은 일이다. 여전히 비건이라고 부를 법한 식습관은 유지할 것이다. 이걸 바꾸는 게 더 어렵겠지. 하지만 우발적으로 우유나 계란 든 음식을 먹었다고 해서 엄청 신경 쓰는 것도 귀찮다. 비염약을 비롯한 약을 먹다보면 비건이 아닌 약을 먹을 때도 많다. 꼭 먹어야 하는 약이 아니라면 피할 수도 있지만 꼭 먹어야 하는 약인데 비건이 아니라면 먹지 않을 것인가? 아니. 그냥 먹을 것이다. 실제 지금 먹고 있는 약 중에서 비건인지 아닌지 자체가 확인되지 않은 종류도 있다. 한동안은 어떡하면 좋을까를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해봐야 해결이 안 된다. 방법이 없다. 그럼 나는 더 이상 비건이 아닌 것일까? 혹은 채식을 하는 것이 아닌걸까? 어떤 대답도 쉽지 않다. 비건이라면 요구하는 또 다른 사항도 귀찮다. 비건이라면 동물성 성분이 들어간 제품도 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많은 제품이 이런 언설에 부합하지 않는다. 부합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이런 식의 기준이나 규범이 귀찮고 번거롭다. 그런 기준이 중요한 정치학임을 알지만 때론 더 복잡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기도 한다. 아무려나 만고 귀찮다. 그러니 더 이상 채식한다는 말을 하지 말까 보다. 채식하는 게 아니라고, 그냥 편식하는 거라고 말하고 다닐까 보다. 물론 편식한다는 말도 귀찮겠지. 설명하기에 따라선 채식이 더 편한 방법이겠지. 그럼에도 그냥 ‘나는 더이상 채식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다닐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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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크비건, 꿀비건(E님이 붙여준 명명)이란 표현은 계속 사용할 예정입니다. 무척 좋아하는 표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