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기획하고 개요를 짜고 초고를 손글씨로 완성해서 워드파일로 작성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뭔가를 쓴다는 건 자신의 위치를 다시 모색하는 일이고 어렴풋이 몸에서 떠도는 목소리들을 문자로 담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전에 중얼거린 말이 떠오른다: “내가 나이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아닌 척 하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글을 통해 커밍아웃을 할 상황이었던 그때, 이 문장이 몸에서 떠올랐다. 모든 글쓰기가 “나 아닌 척 하지 않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할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불편함에 어찌할 줄 몰랐다. 루인이 쓰는 모든 글이 결국엔 불만으로 아쉬움이 가득한 글이지만, 그 글은 유난히 그랬다. “나 아닌 척 하지 않기 위해” 글을 써야 할 텐데 “나 아닌 척” 글을 썼다는 느낌. 글이 루인을 완전히 설명할 순 없지만, 언제나 그 상황에 따른 일부분만을 말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그 글은 완성과 동시에 루인을 배반했다.
아니다. 배반한 건 그 글이 아니라 루인이다. 글을 완성하고 청탁자에게 메일로 보낸 직후, 그 글의 내용과 다른 루인으로 변한 것. 이럴 때의 상황이 참 재미있다. 글은, 그 글을 쓸 당시의 자신일 뿐, 일 년 전에 쓴 글을 지금의 그 사람인양 비판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다. 비단 글뿐만 아니라 다른 무언가도 비판은 그것을 행했던 당시의 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고 그 행동을 비판하는 것이지 그 행동을 한 그 사람의 전 생애, 그래서 향후 미래까지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은 그래서 엄청나게 끔찍한 소리며 본질주의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내일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그 글과 루인의 관계가 그랬다. 변하는 게 좋은 것이긴 한데, 청탁 받아 메일로 보낸 직후에 변하면, 그래서 인쇄되어 나오기도 전에 변하면 어쩌란 말이냐;;; 차라리 인쇄한 글을 읽다가 변하는 게 낫지. 흑흑.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쇄소 앞에서 기다렸다가 몽땅 회수하고 싶다, 루인의 글이 있는 부분만 찢어버리고 싶다는 얘길 했었다. 조만간에 그 글을 비판하는 독자투고를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했다. 후후. 같은 이름으로 반론을 제시하거나 다른 이름으로 신랄하게 비판하거나.
다행스럽게도 그 글을 비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것 같다. 누구도 신경을 안 쓰겠지만 혼자서 불쾌하고 부끄러웠는데 다행이다. 그나저나 자기가 쓴 글을 비판하는 글을 쓴다는 건 꽤나 재밌는 일이다.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