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편지

매일 밤, 玄牝으로 돌아가는 길, 우편함을 확인해. 편지가 왔을까, 오늘은 도착했을까. 혹시나 우편함 바닥에 놓여 겉으로 확인할 수 없을까봐 손으로도 확인해. 그러나 도착하지 않고 있어.

친구라고 해야 할지 지인이라고 해야 할지 어려워. 하지만 가끔 그런 관계가 있어, 알고 지낸지는 얼마 안 되지만 유난히 빨리 친밀함을 느끼는 관계. 루인에겐 그런 관계들이 있어.

휴학한다는 말에 아쉬웠어. 하지만 방향을 모색할 땐, 휴학이 좋은 방법이기도 하지. 다만 휴학을 하면 그 시간동안 만날 수 없음이 아쉬웠어. 어떻게 지낼 거냐는 질문보다 그 아쉬움이 컸지. 그런데, 이스라엘로 떠난다는 말엔 몸이 복잡해지는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 이스라엘이라고.

여전히 전쟁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은 곳으로 일 년 간 떠난다는 말. 뭐랄까, 복잡했어. 잘 갔다 오란 말 보다는 건강하게 지내라는 말을 먼저 할 수밖에 없고 그러고 나서야 떠나있는 시간만큼 변한 모습으로 만나자는 얘길 했지. 그런 얘길 편지로 했지.

잘 지내라는 스티커를 주고받기로 했고 먼저 보냈어. 그러면서 매일 우편함을 확인했어, 이제는 도착하겠지 하고. 떠나기 전에 문자를 보내고서야, 직접 만들었다는 스티커의 인쇄가 이상해서 다시 인쇄해서 보낸다는 얘길 들을 수 있었지. 떠나기 전 날 찾아서 보낸다는 말. 그렇다면 지금쯤은 도착해야 할 텐데. 결국 못 보낸 걸까? 이미 며칠 전 비행기를 타고 떠났지만 아직도 편지를 기다리고 있어. 일 년이란 시간을 이렇게 편지를 기다리며 보내게 될까?

사실, 일 년이란 시간, 금방이란 거 알아. 가장 친한 친구가 일 년을 떠났다가 돌아온 적이 있어. 그런데 의외로 금방이던 걸. 하긴, 친구는 3개월을 예정하고 떠났다가 일 년이 지나 돌아왔지. 종종 메일을 주고받았고, 한 번이지만 유럽에서 전화를 하기도 했지. 하지만 그곳에선 어떻게 안부를 물을 수 있을까. 인터넷은 잘 되는지 혹은 접근이 용이한지, 종이편지는 할 수 있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상태네. 혼자 떠난 것이 아니라 단체로 떠난 일 년이기에 더 불확실한 느낌이야.

보낸 스티커는 어디에 붙여서 가져갔는지 궁금해. 실은, 머리핀도 같이 보낼까 했어. 문득 [별의 목소리]가 떠올랐거든. 애니메이션에도 나오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만화책에는 나오지. 머리핀. 헌데 머리핀을 사용하는지 고무줄을 사용하는지 잘 몰라서 안 보냈어. 그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몸일 뿐이야. [별의 목소리]와는 달리, 시간의 속도가 같은 공간에 있으니까, 그 시간을 어떻게 겪고 다시 만날지가 궁금할 따름이야. 시간 속도가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로가 경험하는 시간이 다르니 얼마나 변한 모습으로 만날지, 궁금해. 그리고 기대하고 있어. 우리 변한 모습으로 만나.

그 시간 동안, 습관처럼 우편함을 확인하겠지.

유레루: 왜곡에서 발생한 빈틈.

[유레루] 2006.08.28. 월. 5회 20:50, 씨네큐브광화문 2관 37번

이 영화를 읽어야지, 했던 건, [메종 드 히미코]에 나온 오다기리 죠 때문이다. 순전히 오다기리가 등장한다는 이유 하나로 선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시바사키 코우가 나오는 [일본침몰]도 읽을 예정이다.) 더구나 이 영화를 볼 겸해서 [좋아해]도 보았고 곧 [빅 리버]도 볼 예정이다. 그럼 이 영화의 감상은?

1.
루인은 이 영화가 진행함에 따라 불편함을 느꼈는데, 그 이유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관계를 위해 죽은 사람을 아무렇게나 난도질하는 지점 때문이었다.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장면은 특히나 보기 괴로운데 단순히 법정의 언어들이 그런 것이 아니라 영화의 시선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대충의 스토리는, 오랜만에 형제관계인 타케루(동생, 오다기리 죠)와 미노루(형)가 만나 계곡에 갔는데, 같이 간 치에코(어릴 적 친구이자 형의 주유소에서 일하는 사람)가 미노루와 같이 있다가 다리에서 떨어져 죽는다. 그리고 이 죽음의 원인을 둘러싸고 법정에 가는 내용이, 이 영화의 한 축을 이룬다.

루인이 불편하게 느낀 지점은 (오다기리 죠가 캐릭터 상, 재수 없는 인물로 나와서가 아니라) 치에코의 죽음을 한 사람이 죽었음에도 애도와 망자에 대한 예의 없이 치에코의 죽음을 도구로 하여 두 형제의 갈등을 증폭하고 해소하는 역할-도구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의 갈등은 치에코를 매개하고 치에코의 죽음은 둘의 갈등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서만 사용한다.

덕분에 보는 내내 기분이 더러웠다. 죽음을 도구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자를 애도하지 않음은, (제목부터 끔찍한)[살인의 추억]만큼이나 불편하다.

2.
흥미로운 지점은 기억의 왜곡현상이었다. 루인의 기억을 신뢰할 수 있다면 다리에서 떨어지는 치에코를 회상하는 장면이 세 번 나온다. 그리고 그 장면의 내용이 모두 다르다.

당연히 영화는 미노루와 치에코가 다리 위에서 싸우는 장면의 일부만 보여준다. 즉, 갈등이 발생하고 이제 미노루가 화를 내는 장면까지. 그리고 나면 카메라는 계곡으로 향하고 치에코는 죽은 것으로 간주한다. 남는 사항은 미노루가 밀어서 죽인 것이냐, 치에코가 미노루를 피하려다가 죽은 것이냐의 공방이고, 타케루는 이 장면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다. 물론 초반엔 못 봤다고 주장한다. 묘한 것은 타케루의 행동인데, 치에코가 죽은 후, 다리 위에서 충격 받은 상태로 있는 형에게 달려가는데 그것이 마치, 형이 밀어서 죽였지만 자기 말고는 본 사람이 없을 테니, 자기만 가만있으면 된다는 식이었다. 그때, 타케루는 경찰을 부르자고 하고 미노루는 경찰을 부르면 안 된다고 하고, 타케루는 “형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말을 한다. 정황은 형이 밀어서 죽인 것 같은 분위기고 결국엔 경찰에 가서 자수한다.

첫 번째 회상은, 법정에서 형(미노루)의 증언과정. 문제는 이 장면에서도 정확한 정황은 안 나온다. 형이 치에코를 미는 것 같은 뉘앙스를 주고, 형의 법정진술도 자기는 잘못이 없다는 자기변호로 일관한다. 잘못은 했지만 그것이 치에코를 직접적으로 죽인 건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한다(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이 지점은 설득력이 있는 듯이 나온다).

두 번째 회상은, 역시 형의 법정 증언과정에서이다. 타케루는 형의 증언 과정에서 형이 치에코를 다리 밖으로 밀어버리는 장면을 회상한다. 형이 위증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 그전까지 승소가 불투명했다면 그 즈음엔 승소를 확신하는 분위기. 그리고 형을 면회했다가 둘 사이의 갈등이 증폭하자, 타케루는 예정된 증언에 나가 형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목격한 내용을 증언한다. 자기가 아는 착한 형을 찾겠다면서. 그리고 7년의 징역.

세 번째 회상은 어릴 때 찍은 비디오 필름을 보면서다. 어린 시절의 형이 자신의 손을 잡으며 도와주는 장면이 나오자, 타케루의 기억은 다시 바뀐다. 미노루가 치에코를 밀어서 죽인 것이 아니라, 다리 위로 넘어뜨린 건 분명하지만 그 다음엔 도와주려 하고 치에코는 그런 도움을 (폭력의 연속선으로 인식하며)피하려다가 다리 아래로 떨어진다. 이제 “진실”이 밝혀진 것일까. 타케루는 펑펑 울고 출소하는 형을 찾으러 간다.

“진짜” 기억은 어떤 것일까. “진실”이 있다면 어떤 것이 진실일까. 루인은 이 영화가 기억이 맥락에 따라 다르게 구성하는 것임을, 증언의 토대를 이루는 기억은 필요에 따라 재구성하는 것임을 말한다고 느꼈다. 말 그대로 “진실은 저 너머에 있고” 문제는 타케루가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기억을 다른 식으로 구성함을 보여줌으로써, 기억이란 것이 고정적이고 확고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한다는 것. 그렇다면, 타케루의 마지막 회상-타케루가 위증한 것이 되는 회상 역시 어린 시절 찍은 필름을 보며 재구성한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진실”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이 영화에선 그다지 의미가 없다.)

3.
출소한 형을 찾으러 가는 길. 처음엔 어긋났다가 나중에 길에서 만나는데 그때 형이 미소을 짓고는 버스가 지나간다. 루인은 그 장면이 씨익 웃고는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라고 느꼈다. 미소 한 번으로 화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웃고는 떠나버리는 장면. 뭐, 해석하기 나름이다.

좋아해: すきだ

[좋아해] 2006.08.28. 4회 18:00, 씨네큐브광화문 1관 C열 33번

지난 주 목요일, 이 영화를 즐기러 가고 싶었다. 저녁 출발하는 길에 일이 생겼고 그래서 결국 못 갔다. 아쉬움 속에서 [유레루]를 즐기려고 찾다가, 발견. 같이 보기로 했다.

왜 보고 싶었을까. 그 이유는 너무 간단한데 제목때문이다. [좋아해]라니, 너무 매력적인 제목이잖아. 너무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잖아.

[좋아해.] 두 번 나오는 말인가. 입모양으로 말하기까지 포함하면 세 번 나오는 그 한 마디, 좋아해. 이 말을 하기까지 17년의 세월이 걸린다는 내용. 그 사이의 소소함들이 너무 좋았다. 영상의 매력과 함께, 딱히 좋아한다는 말도 안 하고 티나게 행동 하지도 않지만 장면장면들이 그 팽팽한 긴장감으로 넘쳐나고 있다. 티가 덜 나지만 그 짜릿함이 넘쳐나는 장면들과 순간들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적을 수 밖에 없는 건, 별 다른 대사 없이도 그 어떤 느낌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장면장면들을 적기엔 루인의 글솜씨가 부족하기 때문.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혹은 너무너무 좋다란 느낌 속에서 뭐라고 적을 수 없는 속상함. 이 영화의 느낌은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읽은 느낌은, 그냥, すきだ , すきだ , すきだ .